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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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인식'을 통해 알려지기 이전에 먼저 '기분'을 통해 열린다.  

느낌이 이성보다 근원적이라 보는 철학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중요한 주체가 된다. '역겨움'과 더불어, 철학적 의미를 갖는 기분이 있다면, 아마두 '지루함ennui'일 것이다. 실존철학의 담론에서 '지루함'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예 현대인의 조건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한때 삶에 의미를 주었던 최종적 권위들(신, 국가, 이념)은 무너졌다. 산업화한 도시 속에서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이렇게 무의미한 삶이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는 느낌. 이것이 현대인이 느끼는 지루함의 요체가 아닐까?  

지루함에도 종류가 있다. 가령 외부의 대상에 대한 지루함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지루함을 느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마도 내면에서 올라오는 지루함이리라. 삶 자체가 쳇바퀴처럼 돌고 있다는 느낌. 물론 지루함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 지루함은 휴식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며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 하지만 그 어떤 삶의 행위로부터도 의미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절대적 지루함은 인간을 보들레르가 말한 '처형대'로 이끌 수 있다. 자살에 반드시 처절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영웅적인 것은 이 절대적 지루함을 분과 초 단위까지 충만하게 견뎌내는 인내심에 있지 않을까? 어느 에세이에 나오는 발터 베냐민의 말이 혹시 답이 될지 모르겠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정이 아니라, 자살을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진중권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를 갓 졸업한 후였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빨간 바이러스'라는 책을 통해서 그의 글을 접했는데 사회나 세상에 대한 정보나 지식, 경험 등이 부족한 터여서 독서한 후 그 느낌을 '삐딱이의 투덜거림'으로 정리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후 세상에 대한 공부도 좀 하고, 정치, 사회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다보니 그의 말이나 생각들이 좀 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이후 만난 책들 '미학 오딧세이', '호모 코레아니쿠스' ,'앙겔루스 노부스' 등의 책 등을 통해 그의 폭 넓은 지식과 리버럴한 생각과 태도에 감탄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언론이며 인터넷에서 얼마나 날카로운 논객이던가... 매체를 통해 만나는 그의 모습에는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날카로운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작년 초 노회찬의 '진보의 탄생' 출판기념회에 참여했을 때 그를 바로 옆애서 직접 본 적(만났다고 하기에는 혼자서 바라만 보았으므로 ㅠㅜ)이 있었는데 편한 캐주얼 차림에다 자그마한 몸집의 그냥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생님 혹은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곁에 다가가서 사인 받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바라만 보다 온 쓸쓸한 기억이 있다.  어쩄든 실제 그의 모습과 달리 예술, 철학, 사회, 정치 등 다방면에 관한 그의 지식이나 생각 등은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럽다. 또한 사회 현상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풀어내는 그 말솜씨나 글솜씨 또한 뛰어나다.  

이번 책 같은 경우 개념들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머리말에서 "이 책이 '인식의 효소'. 말하자면 독자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새로운 생각을 숙성시키는 효모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이 책을 읽고 난 후 각각의 개념어들과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 것 같다.  

위의 인용문 같은 경우 직장생활을 하면서, 혹은 쉬면서 느끼는 그 감정들을 'ennui - 무의미한 삶이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는 느낌'의 개념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요즘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너무나 명확히 적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외에도 파타피직스, 파타포 등의 개념 또한 현재 우리 사회의 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것 중에 하나가 신을 논하는 종교가 오히려 돈을 숭배하는 유물론적 태도를 보이고, 정당들이 이념 논쟁을 하고 있어 관념론적 태도를 보인다고 한 것. 현실을 이렇게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멋지다.  

책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 좀 더 부지런히 공부해야겠다는 자극도 받았다. 한동안은 꾸준히 그의 책과 글을 좋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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