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엔 언제 일주일 가나 했는데 어느덧 금요일이 코앞이다. 내일은 수업도 적고, 일찍 마치고 부산 전교조에서 주최하는 포럼에 참석 예정이라 설레는 기분이다. 게다가 다음날은 노는 토요일. 흐흐 좋다. 

오늘은 보충학습이 끝나서 8교시에 아이들 자습시키며 책을 조금 읽었다.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며칠째 읽고 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아 좋다. 나는 어떤 책이나 글이 적당한 때에 맞춰 그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 온다고 생각한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그 상황에 맞는 글이 우연하게 그 사람에게 다가온다는 것.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어쩜 운명일지도 모르곘다는 생각?  오늘 읽은 글이 꼭 그렇다. 안그래도 학교 돌아가는 사정이나 위에서 지시하는 일들이 맘에 안들었는데 그에 대한 불만을 표하지 못하는 학교 선생님들과 나의 처지를 반성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수한 무사유'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과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p155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를 포함한 많은 교사들이 아이히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치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던 아이히만과 유사하지 않을까하는. 어쩜 너무나 극단적인 생각. 지금의 교육 현실에 결코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다 알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거나 나는 그냥 열심히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상부의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이땅의 교사들은 '순전한 무사유' 즉 사유하지 않고 행동했단 아이히만과 유사하지 않을까?  

가끔 나는 교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든다. 올바른 삶을 살지도 못하고, 불의를 보고 정의롭지도 못하며, 개인의 안위와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내가 아이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내 생각과 의지와 다르게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구미에 맞는 지도 (야자 강요라든지, 일제고사 참여라든지)를 하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내 안위를 위해 또는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타협하고 사는 내 모습에 또 좌절한다.

오늘날의 교육이나 우리 사회가 이런 아이히만 같은 혹은 나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다.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 이 모순을 계속해서 지속해 가는 사람들... 

가르치는 것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라는데 나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헛된 희망을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 불의라도, 작은 모순이라도 당당하게 지적하고, 고쳐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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