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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평점 :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중,고등학교 공부하고 성적에 맞춰 대학에 입학해서 나는 제대로 공부해본 적 없이 어영부영 대학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때 본 국문학사, 국어사, 다양한 문학 작품들, 사조들, 부전공으로 공부했던 철학 과목들의 공부들은 헛되게 사라지지 않고 씨를 뿌려놓은 것처럼 나중에 싹을 틔우고, 내 생활과 사고를 자라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공부한 것들이 아마도 밑바탕이 되어 지금의 직업에서 더욱 비옥하게 가꾸고 그 싹을 틔우게 한 건 아닐까? 작가는 나와 동갑이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최우등으로 졸업했다는 작가는 고고미술사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하면서도 중국어, 법학, 한문, 프랑스 산문, 종교학 개론 등 다양한 과목을 익히며 사고를 비옥하게 다듬어 간다. 그때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나중에 일을 하면서 도움이 되거나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 또한 잊고 있었던 대학 생활에서의 배움들을 떠올리며 진정한 배움과 깨달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에 일었던 질투심도 말하고 싶다. 좋은 부모님에게 어릴 때부터 시를 배우고, 교양을 쌓았던 저자가 서울대에 입학해서 좋은 수업을 들으며,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는 너무나 협소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
남부럽지 않게 책을 많이 읽었어도 나는 그냥 지적 허영으로 책만 읽어댄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요근래 많이 들었다. 입력만 있고 출력은 없는 독서는 어떤 의미인가.
잊고 있던 대학생활의 배움과 그때의 교재와 과제를 모두 가지고 이렇게 책을 쓸 수 있는 저자가 부럽다. 그리고 배움과 공부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부럽다. 읽는 내내 그런 질투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랬다.
이후에 이 기자가 쓴 기사를 봤는데 책을 읽으며 어렴풋이 느꼈던 다른 결을 느꼈다. 앉은 자리가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 했는가. 아니 처음부터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달라서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느낀 사람. 그래서 나도 모를 의아한 질투심이 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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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 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층위마다 차곡차곡 고인 슬픔과 눈물과 어두움과 절망과 상처와 고통, 기쁨과 웃음과 약간의 빛의 흔적....... 나는 손을 내밀어 상대에게 묻는다. 더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 주겠냐고,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게 되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냐고.
p.62. 머릿속에 어슴푸레 남아 있던 '교양으로서의 판교'가 그렇게 20년 만에 비로소 명징해졌다. '교양(culture)'이란 원래 경작을 뜻하는 것이니, 수년 전 뿌린 씨앗의 결실을 이제야 거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교양서로 유명한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의 로고는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인데, 창립자 이와나미 시게오가 스스로를 '씨 뿌리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수업 덕분에 '판교'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친구에 대해 생각했다. 삭막한 신도시라기보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 있는 애틋함의 장소라 여겼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 다른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데 있는 것 아닐까? 대학 교양 수업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단편적이라기에는 무척 체계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업을 통해 엄청난 지식을 쌓는 걸 기대할 수는 없다. 수업 시간에 습득한 것들은 젊은 날 잠깐 머릿속에 자리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싹은 물 준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고 했다. 식견이란 지식을 투입하는 순간이 아니라 추수가 끝난 논에 남은 벼 그루터기 같은 흔적에서 돋아난다.
코로나 19 이후로 대학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우려가 높다. 많은 이들이 '교양'은 디저트 정도로 여기며 전공과목 교육이 부실해진 것만 걱정하지만, 나는 교양과목 수업이 망가지는 것도 못지 않은 문제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대학이 교양을 습득하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이 사라지니, 앞으로 무엇을 거둘 것인가?
p.131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며 창의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아직 뇌가 굳어버리기 전에 외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할 때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토양삼아 창의성이라는 꽃이 자랄 수 있을까? '창의적'이라는 것은 여러 연구 끝에 합의된 기본적인 지식을 소화해 바닥을 잘 다진 다음 단계에서의 도약을 뜻하는 것이지. 허공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창의성'은 영화 속에나 있다.
서양미술사 입문 수업을 듣던 대학 2학년의 나는 작품의 맥락이며 역사적 의미 같은 걸 깊이 이해할 새도 없이 굶주린 새끼 짐승이 어미 젖을 빨듯 무조건 외워버렸다. 그때의 나는 '이런 암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냉소했지만, 나이가 드니 삶의 어느 순간 옛 생각이 나면서 '그때 그 작품이 이런 의미였겠구나.'하고 이해되는 경험과 깨달음의 기쁨이 종종 찾아온다. 누군가는 '암기'를 '절반의 앎'이라며 비웃지만, 그 절반의 앎이 시작되지 않으면 완전한 앎이란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p172 세월의 더깨가 앉아 책장이 누렇게 변해 버린 그 '희랍극선'은 내개 오만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이 부여한 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휘브리스)'은 큰 죄로 여겨져 엄벌에 처해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운명을 거스르고자 시도하고 또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비극이 탄생하였다는 것을. 비극은 우매한 인간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지만 그 통렬함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 왔다는 것을.
p177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지만 훌륭한 사람만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다. 유일한 죄는 '자만'이다. 얼마 전 로버트 케네디 평전 '라스트 캠페인'을 읽었을 때,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아꼈다는 소포클레스의 이 말에 밑줄을 그었다.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인간의 오만을 경고한 소포클래스가 할 법한 말이라 생각하면서.
p264 한편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궁금해진다. 20대의 대학생이 고해성사하듯 털어놓은 이야기에 감사를 표하는 60대 노쿄수의 마음이란 얼마나 보드라운 것일까? 그 강의의 가장 큰 가르침은 편견에 갇히지 않고 남의 말에 귀기울일 수 있는 유연함, 경계 없이 열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책 속애 틀어박혀 머리만 키운, 재승박덕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학식과 함께 따스하고 도타운 마음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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