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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터키를 서양이라고 해야 하나, 동양이라고 해야 하나? 유럽과 아시아 경계에 있어 어디에도 소속되기 힘들어하는 나라. 그래서 그럴까? 터키는 그만큼 자기들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나라다. 유럽의 변방, 아시아의 변방인 터키. 대부분 유럽 국가의 종교는 기독교가 많지만 터키는 이슬람 국가다. 이 책은 그런 이슬람 문화와, 세밀화라는 예술, 남자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 세큐레의 사랑이 얽혀있는 추리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소설은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외곽에 버려진 우물 속에서 시작된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가 말을 한다. 작품의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소설이다. 죽은 자뿐만이 아니다. 말(馬)이 이야기를 하고, 나무가 이야기를 하고, 죽음이, 금화가, 빨강색이, 개까지 나와서 말을 한다.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화자가 되어서 이야기를 전개하다보니,(그렇게 시점이 바뀌다 보니) 처음엔 누가 얘기하는지 헷갈린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읽다보니 몰입하는데 힘겨웠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지식의 폭이 깊지 못한 데서 오는 힘겨움이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 살인사건의 원인은 사랑으로 인한 치정사건도 아니고, 돈이나 명예 때문도 아닌,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동양의 문명과 서양의 문명, 가치관의 갈등이 빚어낸 사건이다. 16세기, 터키의 전통 화풍인 이슬람 세밀화가 서양의 화풍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슬람 세밀화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즉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는 예술이어서 인간의 시각인 원근법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서양의 화법은 이들에게는 위험한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들은 평면적이고 투시적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신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신성을 모독하면서까지 예술이 우위일까? 아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가장 위대한 세밀화가는 자신이 일생을 걸고 얻은 화풍과 기법을 새 주인이 된 샤의 권력이나, 새 왕자의 기분, 혹은 다른 시대의 감각에 복종하려고 포기하는 일이 없다고 했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림의 화풍이나 기법을 바꾸지 않으려고 스스로 용감하게 눈을 멀게 한다고 했네...”(p255)
그들은 자신의 화풍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 것조차 거리낌없이 행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 초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에니시테는, 술탄에게 서양화풍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종용한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술탄의 세계를 서양화풍으로 그릴 것을 명을 받은 밀서제작 책임자인 에니시테는 궁정화원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 넷을 뽑아 일을 착수한다. 그 일을 시작하면서 네 명의 세밀화가, 엘레강스, 황새, 나비, 올리브는 서양화풍에 흔들리게 되고 여기서 갈등과 불안을 느낀다. 결국 그 갈등은 살인 사건으로 이르게 된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에까지 확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이 책은 세밀화뿐만 아니라 밀서제작책임자인 에니시테의 딸 세큐레와 살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12년 만에 고향에 온 카라와의 사랑이야기에도 흥미를 더해준다.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세큐레는 세상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남편이 전쟁에 나가 4년째 돌아오지 않은 미망인이다.(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세큐레를 열렬히 사랑하는 시동생 하산, 12년동안이나 한시도 잊지 못했던 카라. 이 두사람의 사이를 저울질하는 세큐레는 자기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남자 카라를 택하고, 카라는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살인 사건의 중심에 빨려 들어간다.
이 책은 알라딘에서, 그리고 언론에서 대대적인 광고 때문에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각 언론에서도 이 책에 대한 찬사는 뜨거웠다. “오스만 제국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과 사랑을 놀라울 만큼 생생하고 정밀하게 재현해 낸 이 시대의 고전(미국/ 로스엔젤레스 타임지)” “현기증이 일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로울 정도로 다채로운 세계문학의 진수(독일/프랑크푸프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 문학적 묘미와 재미를 결합시킨 완벽한 소설(영국/데일리 텔레크래프)”라고 하며 격찬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나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에서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격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일단 터키에 대한 문화적 이해도 부족하고, 예술에 대한(특히 세밀화) 지식도 부족한 탓일 것이다. 참 힘들게, 어렵게, 오래 오래 읽은 책이다. 그러나 읽는 것만으로도 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들 정도로 무게 있는, 값진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