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가끔 겪는 한 낮의 무더위가 감각을 무디게 한 이유도 있었겠지요.
ᄐ의 여자가 앙코르와트에 갔다는 말을 듣고서야 계절을 느낍니다.
정말 ᄐ에게 여자가 있구나 하고, 사랑을 하니 계절을 먼저 느꼈을 테고 팔월부터 이르게 보라색 긴 셔츠를 꺼내 입었겠구나, 중앙로에서 옷가게를 하는 미세스 임이 아침나절에 웃으며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올 가을 유행은 보라와 카키에요- 셔츠의 색을 상상하다 갑작스럽게 마음이 상해서 내게도 가을이 확 와 버렸습니다.
아침에는 햇살 가장자리에 발자국을 찍으며 가을이군, 했고, 앙코르와트라니! 화양연화가 먼저 떠올라 노래를 귀에 꽂고 걷던 산길에 노랗게 핀 산국을 보니 또 저리고 크게 잘 익은 호박밭과 아침나절만 잎을 여는 나팔꽃 무덤을 지나다가도 그랬습니다.

키가 아주 큰 헬스클럽의 남자가 장난스럽게 입맞춤 할래요? 했을 땐 정말 어느 구석에 끌고 가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늘이 푸르고 바람이 차고, 나뭇잎도 몇 개 구르는 정오의 가을이 뭐든 해보라고 충동 질 하는 것 같았습니다.
ᄐ의 여자는 앙코르와트의 돌 사원 오래 된 구멍에 입을 대고 뭘 속삭일까요.
ᄐ과 손을 잡고 잠을 자고 웃게도 하고 화나게도 하는 ᄐ의 여자가 걷는 앙코르와트의 사원은 가을이 없겠지요.
하도 행복해서 혼자 중얼거리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미 ᄐ의 전화번호도 잊었고, 손의 감촉,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 내게 빈자리가 생겼다고 전화 할 수도 없고, 어떤 고백 같은 걸 하기엔 부끄럽게도 나이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화양연화를 들어서 좋습니다. 찬 공기 때문에 살갗에 돋는 소름도 좋고,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 ᄐ의 여자까지도 좋습니다.
차게 언 날카로운 침에 찔린 것처럼 정신이 놀라 깨었습니다.
오래 쉬어서 녹이 슨 심장이 모처럼 피를 돌게 하고 눈가가 촉촉해 져서 종일 웃고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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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4-10-16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이 슨 심장에 모처럼 피가 돌았다는 말에 제 눈가도 젖어들 뻔..
책임 지세요.. ^^:

rainer 2004-10-19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니님 안녕하세요.
책임! 하고 소리치면 되는거죠?? 엊그제 누가 삼 년 전부터 마음이 굳었다고 해서 연애를 하랬더니,
자 그럼 연애하자 시작! 이러던데요.
저도 그럼,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