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에서 우연히 본 영화가 묘한 감동을 주면서 기억에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홀리 헌터와 키퍼 서덜랜드라는 이름을 보고 별 생각없이 선택한 영화 Woman Wanted (2000, director: Kiefer Sutherland)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24로 유명해진 키퍼 서덜랜드가 감독과 주연을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줄거리가 탄탄했다. 각본이 동명 제목의 원작소설에 기반하고 있었다. 작가는 조애나 맥클러랜드 글래스 (Joanna McClelland Glass).
예일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노교수 리처드 고다르드는 시를 쓰는 20대 후반의 아들과 함께 사는데, 그 둘 사이에는 심각한 소통의 문제가 존재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고 방에 틀어박혀 시를 쓴다. 노교수는 커다란 집도 관리하고 아들과의 문제도 집안에 여자를 둠으로써 완화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입주 가정부를 구하는 광고를 낸다. 제목인 woman wanted (여자를 구함)는 바로 그 광고 내용이다. 그리고 그 입주 가정부로 들어오는 여자가 바로 엠마 (홀리 헌터)다.
엠마는 열아홉에 우연히 보러간 연극의 주인공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가 남편이 '남자'친구와 심각한 외도를 함으로써 이혼하게 된 아이리쉬계의 생기발랄하고 지적이며 사려깊은 젊은 여자. 엠마가 들어오면서부터 집안의 분위기는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 다락방처럼 조금씩 밝아지고 엠마, 노교수 리처드, 아들 웬델 사이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에서와 같은 삼각관계가 생겨난다.
웬델이 아버지 리처드를 증오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사랑한 엄마 매리언은 그를 낳고부터 정신착란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남편과의 이혼을 요구했으나, 리처드는 웬델 때문에라도 그럴 수 없다고 처의 요구를 일축했다. 매리언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는데 그 와중에 리처드는 다른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 사실을 발견한 매리언은 자살을 기도해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웬델은 자기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매리언의 부고가 전해진 날, 리처드는 웬델을 죽은 매리언과 함께 내버려두고 뉴욕의 여자친구에게로 떠나버렸던 것. 사랑했던 어머니가 죽은 날 그 시신과 하루를 홀로 보내야 했던 슬픔과 배신감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자는 엠마라는 한 여인을 두고 진지하지만 다소 우스꽝스러운 경주를 벌임으로써, 비로소 오랫동안 언급하기를 회피해온 문제를 열린 공간에 내어놓고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 왜 그 날 밤 나를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내버려두고 떠났느냐고 웬델은 아버지에게 절규하듯 고함친다. 뜻밖에도 리처드는 자신은 울어야만 했다고, 너는 너무도 적대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둘다 울어야 했는데 다만 그 우는 일은 따로따로 행했을 뿐이다"라고 리처드는 엠마에게 말한다.
내 마음에 울림을 남긴 것은 그 한구절이었다. "너는 내게 너무 적대적이었다"는.
적의는 배신으로부터 잉태되지만, 또한 더 심각한 배신을 낳기도 한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사랑이란 스스로를 배신의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에서 적의는 독약보다도 치명적이다.
엠마는 리처드의 연인이 되지만 리처드의 출장 중엔 웬델과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아이의 양 볼에 입맞춤하는 웬델과 리차드의 사진이 클로즈업된다. 직업도 취미활동도 교양교육도 원하지 않으며 오직 단지 누군가를 완전하게 사랑하기만을 원한다는 엠마의 고백에 리처드는 다소 뜨아해 한다. 너무 고전적이어서 반동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소망이지만, 누군가를 돌보고 누군가에 의해 돌보아지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 존재에 뿌리깊은 것이어서 그 소망은 호소력을 잃지 않는다. 엠마라는 한 여성을 만남으로써 리처드와 웬델 부자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엠마는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말을 따라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다. 이 영화의 진실은 현실에서 아득히 멀면서 동시에 너무나 근접한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