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로르까)

새벽 꽃이 벌써
자기를
열었다
(기억하는가
오후의 깊이를?)

달의 감송(甘松)이 내뿜는다
그 찬 냄새를
(기억하는가
8월의 긴 눈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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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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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빼는 통에 한참동안 죽과 요구르트로 연명하다가 드디어 엉성하게나마 조금씩 진짜 음식을 씹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치과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퍼에 들러 비빔면 다섯 개가 한꺼번에 포장된 꾸러미를 샀다. 유독 반찬이 빈약한 밥상가에서 자라던 성장기에 인스탄트 라면은 밋밋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맛의 보고요 원천이었다. 나와 형제들에게 겨울음식의 보고는 짜파게티였고, 여름음식의 보고는 비빔면이었다. 채를 썬 오이라도 한 줌 얹고 얼음 덩어리라도 곁들이면 몇백원짜리에 불과한 비빔면에도 운치가 돈다. 참기름이라도 몇 방울 떨어드리면 더 바랄 바가 없다.

면을 끓여 찬 수돗물에 행군 후 딸려온 소스에 고추장을 추가로 넣어서 비볐다. 맛이 맵다 못해 얼얼했지만 냉수를 함께 마셔가며 계속 먹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살아 있다는 것이 혀에 얼얼하게 느껴졌다. 비빔면을 열심히 먹으며, 신현림의 시 "립스틱과 메니큐어"을 읽었다. "립스틱과 메니큐어"는 겨울을 노래하지만, 태양이라는 말에 따라붙는 수식어인 "이글이글"이라는 시어가 전체 시의 주조를 장악하는 바람에,  여름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시다. 

가을엔 슬픔으로 충만했으니
겨울엔 기쁨이 너를 원하므로
비누처럼 거품을 물고 즐거워하라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바꾸고
"사랑을 할 거야"를 부르며
사람들에게 열심히 꽃 바치고

해 지고 술 고프면
한번쯤은 치사량에 가까운
술을 마셔도 좋을 것이다

웬만하면 좌석버스로 시내나 돌며
정신 차리고 돌아와 밝은 방에서
책 읽는 게 최고의 희열이라

올 겨울엔 나도
빨랫줄에 간신히 매달린 흰 치마 같은
금욕의 처절함을 해제하고
이글이글 정사를 치러볼 것이다

     어떻게--슬픔의 체위를 바꾸면서
     어디서--헤어지지 않을 곳에서
     누구랑--헤어지지 않을 사냐랑
     왜--헤실헤실 웃는 아기를 가질까 해서
     뭔가 꽉 잡고만 싶어서                                          
"립스틱과 메니큐어"--신현림

그 날 밤 꿈에 오래 전 동무들이 그야말로 대량으로 출현했다. 한 때 문학반에서 문학지도 만들고 교지도 편집하고 연극이며 방송극도 올리고 시도 낭송했던 친구들이다.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학교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던 친구는 후에 실제로 연극무대에 선 것으로 알고 있다. 초연에 오라고 초대전화를 받았는데도 여차저차한 사정 때문에 가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한 해 어렸던 후배는 대학 진학 시에 문예창작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시를 찾아 읽는다. 이를테면 비빔면을 비벼 먹으면서. 그러고보면 그 때의 자잘한 문학반 활동 일이년이 꽤 큰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처음 대양을 건너 이 곳에 온 것이 얼추 오 년 전이다. 그 때 함께 왔던 친구 중 하나가 다음 달에 한국에 들어간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원래 목적을 달성하고 그야말로 짐을 싸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인지 방학이라 집에 잠시 들르러 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중간에 과정을 그만두고 프루스트가 시에서 그렇게 궁금해했던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된 나는 처음 함께 이국에 왔던 이들을 다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들이 하나씩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곳에 남는다. 방학 때마다 왜 한국에 안 가느냐고 곤란한 질문을 물어서 내 마음을 쑤셔파던 이들이지만 그들이 다 가고나면 한 구석에 그리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잘 알지도 못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은 이들을 그리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같은 시절 가까운 동네에 살았다는 것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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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비빔면 한 개는 모자르던데.ㅎㅎ
삶은달걀 없으면 프라이도 괜찮고요.
턱 얹어서 먹으면.....
그 동안 못 드신 것 맛난 음식 실컷 드시는 걸로 봉창하세요.
가까운 친구에겐 사소한 일로 삐치기도 하면서
멀리 있는 가찹지도 않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알 수 없는 마음이지요.^^

nada 2006-06-2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여기까지 오셔서 먹는 이야기를...=3=3=3

(조금만 도망갔다 다시 왔어요.^^;;) 외국에서도 비빔면 같은 것 쉽사리 구할 수가 있군요(촌티 내긴..). 비빔면과 짜파게티 정말 스테디셀러예요... 전 중국집 짜장면보다 짜파게티가 더 좋아요. 사랑에 관한 시치곤(?) 참 좋군요. 이글이글, 헤실헤실... 비빔면을 먹을 땐 츄르릅츄르릅..

검둥개 2006-06-25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도 한 개는 모자릅니다. 쿨럭. (갑자기 음식량을 고백하는 분위기? ㅎㅎ) 한국슈퍼는 멀고 한국음식점은 비싸서 아무래도 자주 못 먹게 되어요. 그렇다고 로드무비님처럼 음식솜씨가 끝내주는 것도 아니고 고추장통만 디비 파는 거죠. 말씀대로 멀리 있는 가찹지도 않은 사람을 실없이 그리워하면서요.

꽃양배추님, 츄르릅츄르릅 그건 영락없는 짜장면 소립니다. ㅋㅋ 먹는 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어데 있나요? 비빔면은 한국슈퍼에 가면 있어요. 신라면은 왠만한 아시아계 슈퍼에 다 있고요. 일반 편의점에서 한번 김치사발면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5개를 한꺼번에 사왔는데 점원이 놀리더군요. (중학교 때 매점에서 먹던 그 맛이 생각나서!) 그런데 못 먹겠더군요. >.< 그건 버렸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검둥개 2006-06-26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님 와, 33도요. 정말 쨍하게 더운 날이네요.
여기는 벌써 며칠째 또 비가 옵니다.
날씨가 완전히 장마철 같아요. ㅎㅎ
 


티비에서 우연히 본 영화가 묘한 감동을 주면서 기억에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홀리 헌터와 키퍼 서덜랜드라는 이름을 보고 별 생각없이 선택한 영화 Woman Wanted (2000, director: Kiefer Sutherland)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24로 유명해진 키퍼 서덜랜드가 감독과 주연을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줄거리가 탄탄했다. 각본이 동명 제목의 원작소설에 기반하고 있었다. 작가는 조애나 맥클러랜드 글래스 (Joanna McClelland Glass).

예일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노교수 리처드 고다르드는 시를 쓰는 20대 후반의 아들과 함께 사는데, 그 둘 사이에는 심각한 소통의 문제가 존재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고 방에 틀어박혀 시를 쓴다. 노교수는 커다란 집도 관리하고 아들과의 문제도 집안에 여자를 둠으로써 완화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입주 가정부를 구하는 광고를 낸다. 제목인 woman wanted (여자를 구함)는 바로 그 광고 내용이다. 그리고 그 입주 가정부로 들어오는 여자가 바로 엠마 (홀리 헌터)다.

엠마는 열아홉에 우연히 보러간 연극의 주인공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가 남편이 '남자'친구와 심각한 외도를 함으로써 이혼하게 된 아이리쉬계의 생기발랄하고 지적이며 사려깊은 젊은 여자. 엠마가 들어오면서부터 집안의 분위기는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 다락방처럼 조금씩 밝아지고 엠마, 노교수 리처드, 아들 웬델 사이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에서와 같은 삼각관계가 생겨난다.


웬델이 아버지 리처드를 증오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사랑한 엄마 매리언은 그를 낳고부터 정신착란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남편과의 이혼을 요구했으나, 리처드는 웬델 때문에라도 그럴 수 없다고 처의 요구를 일축했다. 매리언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는데 그 와중에 리처드는 다른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 사실을 발견한 매리언은 자살을 기도해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웬델은 자기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매리언의 부고가 전해진 날, 리처드는 웬델을 죽은 매리언과 함께 내버려두고 뉴욕의 여자친구에게로 떠나버렸던 것. 사랑했던 어머니가 죽은 날 그 시신과 하루를 홀로 보내야 했던 슬픔과 배신감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자는 엠마라는 한 여인을 두고 진지하지만 다소 우스꽝스러운 경주를 벌임으로써, 비로소 오랫동안 언급하기를 회피해온 문제를 열린 공간에 내어놓고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 왜 그 날 밤 나를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내버려두고 떠났느냐고 웬델은 아버지에게 절규하듯 고함친다. 뜻밖에도 리처드는 자신은 울어야만 했다고, 너는 너무도 적대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둘다 울어야 했는데 다만 그 우는 일은 따로따로 행했을 뿐이다"라고 리처드는 엠마에게 말한다.

내 마음에 울림을 남긴 것은 그 한구절이었다. "너는 내게 너무 적대적이었다"는. 

적의는 배신으로부터 잉태되지만, 또한 더 심각한 배신을 낳기도 한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사랑이란 스스로를 배신의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에서 적의는 독약보다도 치명적이다.

엠마는 리처드의 연인이 되지만 리처드의 출장 중엔 웬델과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아이의 양 볼에 입맞춤하는 웬델과 리차드의 사진이 클로즈업된다. 직업도 취미활동도 교양교육도 원하지 않으며 오직 단지 누군가를 완전하게 사랑하기만을 원한다는 엠마의 고백에 리처드는 다소 뜨아해 한다. 너무 고전적이어서 반동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소망이지만, 누군가를 돌보고 누군가에 의해 돌보아지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 존재에 뿌리깊은 것이어서 그 소망은 호소력을 잃지 않는다. 엠마라는 한 여성을 만남으로써 리처드와 웬델 부자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엠마는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말을 따라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다. 이 영화의 진실은 현실에서 아득히 멀면서 동시에 너무나 근접한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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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 영화네요.
내게 적대적인 사람은 그 누구라도 사랑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모르죠, 또.

검둥개 2006-06-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 관계된 적의는 언제나 사랑 뒤에 혹은 사랑이 생활과 혼합된 후에 주로 오죠. ^^ 처음부터 적의를 표명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할 거에요.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도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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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5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6-2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이건 유종호 선생 책에서 베껴온 건데 거기는 그렇게 되어 있어유.
왠지 이런 발음표기가 저는 정겹게 느껴져요. 프랑시쓰 쨈이라니, 베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백석의 시들은 정말 다 멋지구만유.

잉크냄새 2006-06-26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이 구절이 참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시지요.

검둥개 2006-06-2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넵!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