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를 빼는 통에 한참동안 죽과 요구르트로 연명하다가 드디어 엉성하게나마 조금씩 진짜 음식을 씹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치과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퍼에 들러 비빔면 다섯 개가 한꺼번에 포장된 꾸러미를 샀다. 유독 반찬이 빈약한 밥상가에서 자라던 성장기에 인스탄트 라면은 밋밋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맛의 보고요 원천이었다. 나와 형제들에게 겨울음식의 보고는 짜파게티였고, 여름음식의 보고는 비빔면이었다. 채를 썬 오이라도 한 줌 얹고 얼음 덩어리라도 곁들이면 몇백원짜리에 불과한 비빔면에도 운치가 돈다. 참기름이라도 몇 방울 떨어드리면 더 바랄 바가 없다.
면을 끓여 찬 수돗물에 행군 후 딸려온 소스에 고추장을 추가로 넣어서 비볐다. 맛이 맵다 못해 얼얼했지만 냉수를 함께 마셔가며 계속 먹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살아 있다는 것이 혀에 얼얼하게 느껴졌다. 비빔면을 열심히 먹으며, 신현림의 시 "립스틱과 메니큐어"을 읽었다. "립스틱과 메니큐어"는 겨울을 노래하지만, 태양이라는 말에 따라붙는 수식어인 "이글이글"이라는 시어가 전체 시의 주조를 장악하는 바람에, 여름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시다.
가을엔 슬픔으로 충만했으니
겨울엔 기쁨이 너를 원하므로
비누처럼 거품을 물고 즐거워하라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바꾸고
"사랑을 할 거야"를 부르며
사람들에게 열심히 꽃 바치고
해 지고 술 고프면
한번쯤은 치사량에 가까운
술을 마셔도 좋을 것이다
웬만하면 좌석버스로 시내나 돌며
정신 차리고 돌아와 밝은 방에서
책 읽는 게 최고의 희열이라
올 겨울엔 나도
빨랫줄에 간신히 매달린 흰 치마 같은
금욕의 처절함을 해제하고
이글이글 정사를 치러볼 것이다
어떻게--슬픔의 체위를 바꾸면서
어디서--헤어지지 않을 곳에서
누구랑--헤어지지 않을 사냐랑
왜--헤실헤실 웃는 아기를 가질까 해서
뭔가 꽉 잡고만 싶어서 "립스틱과 메니큐어"--신현림
그 날 밤 꿈에 오래 전 동무들이 그야말로 대량으로 출현했다. 한 때 문학반에서 문학지도 만들고 교지도 편집하고 연극이며 방송극도 올리고 시도 낭송했던 친구들이다.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학교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던 친구는 후에 실제로 연극무대에 선 것으로 알고 있다. 초연에 오라고 초대전화를 받았는데도 여차저차한 사정 때문에 가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한 해 어렸던 후배는 대학 진학 시에 문예창작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시를 찾아 읽는다. 이를테면 비빔면을 비벼 먹으면서. 그러고보면 그 때의 자잘한 문학반 활동 일이년이 꽤 큰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처음 대양을 건너 이 곳에 온 것이 얼추 오 년 전이다. 그 때 함께 왔던 친구 중 하나가 다음 달에 한국에 들어간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원래 목적을 달성하고 그야말로 짐을 싸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인지 방학이라 집에 잠시 들르러 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중간에 과정을 그만두고 프루스트가 시에서 그렇게 궁금해했던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된 나는 처음 함께 이국에 왔던 이들을 다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들이 하나씩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곳에 남는다. 방학 때마다 왜 한국에 안 가느냐고 곤란한 질문을 물어서 내 마음을 쑤셔파던 이들이지만 그들이 다 가고나면 한 구석에 그리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잘 알지도 못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은 이들을 그리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같은 시절 가까운 동네에 살았다는 것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