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무래기의 약(藥)> 백석



가무락조개 난 뒷간 거리에

빚을 얻으러 나는 왔다

빚이 안 되어 가는 탓에

가무래기도 나도 모두 춥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내 마음은 우쭐댄다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

이 추운 세상의 한 구석에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얼마나 기뻐하여 낙단하고

그즈런히 손깍지 베개하고 누워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출전:여성(193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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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람 (정현종)

내가 잘 댕기는 골목길에
분식집이 생겼다
저녁 어스름
그집 아줌마가 형광등 불빛 아래
재게 움직이는 게 창으로 보인다
환하게 환하게 보인다
오, 새로 시작한 일의 저 신바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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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 (정현종)

내가 미친놈처럼 헤매는
원성 들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송아지

너 때문에
이 세상도
생긴 지 한 달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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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魯迅 (김광균)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메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빰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요즘 이 책에 실린 시를 하나씩 읽는다. 

 와사등의 시인이 이런 작품도 썼다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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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손님 The Winter Guest> (1997, director: Alan Rickman)는 영화 해리 포터에서 포터를 못살게 구는 스낲 교수로 나온 앨런 릭맨의 감독데뷔작이다. 필리다 로와 엠마 톰슨 모녀가 영화에서도 모녀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네 쌍의 인물들이 보내는 추운 겨울날을 다루는데, 전체 영화의 시간이 겨우 하루라는 것, 그리고 영화 속 네 쌍 간의 대화 방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의 원작은 연극이며 원작자 샤만 맥도날드가 감독 앨런 릭맨과 함께 희곡을 영화로 각색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그 네 쌍의 인물들은 최근에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진작가 프란시스 (엠마 톰슨)과 그녀의 엄마 엘스페쓰 (필리다 로), 프란시스의 사춘기 아들 알렉스와 그를 짝사랑하는 동네 소녀 니타, 학교를 땡땡이치고 동네 바위산 부근에 숨어서 손발이 곱아들게 추운 날을 보내는 초등학생 톰과 샘, 그리고 장례식 방문을 즐기는 두 노파, 릴리와 클로이이다. 그리고 이들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주연,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겨울.   

  
프란시스와 엘스페쓰의 모녀간 갈등은 뚜렷한 설명 없이 도입되고 그들 관계의 역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당장 엘스페쓰의 마음을 괴롭히는 걱정은 실의에 빠진 딸이 날씨 궂고 바람 많고 겨울은 억수로 추운스코틀랜드를 떠나 손주와 함께 따뜻한 나라 오스트레일리아로 휑하니 날라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모녀간의 갈등을 풀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가 딸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것. 엘스페쓰는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딸에게 너 일하러 가는 데 나도 데려가라고 고집을 부리고 등대가 있는 바위산에서는 말리는 딸은 아랑곳 않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하고도 억지로 속력을 내어 앞서가다가 결국엔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는 타이즈에 줄이 갔다고 불평하는 엘스페쓰의 모습은 어머니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주름진 얼굴을 한 소녀의 그것이다.

무덤덤한 성격의 소유자인 프란시스는 바위산에서 동네로 돌아오는 경사진 길에서 손을 내밀지만, 엘스페쓰는 한사코 거부한다.

엄마, 내 손을 잡으라니까! 모친의 고집에 지친 중년의 딸이 소리지른다.

내 이름은 엘스베쓰다. 머리가 하얗게 센 엘스페쓰가 대답한다.

프란시스가 부른다. 내 손을 잡아요, 엘스페쓰.

원작이 희곡이라서 인물들 간의 대화가 간결하고 상징적이며 실감난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초콜렛바를 자로 재어서 반씩 나누어먹는 톰과 샘의 대화는 또 얼마나 리얼한지.
어른들에 대한 샘의 묘사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가끔 웃기는 하지. 하지만 어른들은 행복하지 않아.

가끔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거친 겨울바람으로 가득찬 스코틀랜드의 겨울풍경이 덤으로 따라오는 볼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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