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손님 The Winter Guest> (1997, director: Alan Rickman)는 영화 해리 포터에서 포터를 못살게 구는 스낲 교수로 나온 앨런 릭맨의 감독데뷔작이다. 필리다 로와 엠마 톰슨 모녀가 영화에서도 모녀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네 쌍의 인물들이 보내는 추운 겨울날을 다루는데, 전체 영화의 시간이 겨우 하루라는 것, 그리고 영화 속 네 쌍 간의 대화 방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의 원작은 연극이며 원작자 샤만 맥도날드가 감독 앨런 릭맨과 함께 희곡을 영화로 각색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그 네 쌍의 인물들은 최근에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진작가 프란시스 (엠마 톰슨)과 그녀의 엄마 엘스페쓰 (필리다 로), 프란시스의 사춘기 아들 알렉스와 그를 짝사랑하는 동네 소녀 니타, 학교를 땡땡이치고 동네 바위산 부근에 숨어서 손발이 곱아들게 추운 날을 보내는 초등학생 톰과 샘, 그리고 장례식 방문을 즐기는 두 노파, 릴리와 클로이이다. 그리고 이들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주연,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겨울.
프란시스와 엘스페쓰의 모녀간 갈등은 뚜렷한 설명 없이 도입되고 그들 관계의 역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당장 엘스페쓰의 마음을 괴롭히는 걱정은 실의에 빠진 딸이 날씨 궂고 바람 많고 겨울은 억수로 추운스코틀랜드를 떠나 손주와 함께 따뜻한 나라 오스트레일리아로 휑하니 날라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모녀간의 갈등을 풀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가 딸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것. 엘스페쓰는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딸에게 너 일하러 가는 데 나도 데려가라고 고집을 부리고 등대가 있는 바위산에서는 말리는 딸은 아랑곳 않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하고도 억지로 속력을 내어 앞서가다가 결국엔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는 타이즈에 줄이 갔다고 불평하는 엘스페쓰의 모습은 어머니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주름진 얼굴을 한 소녀의 그것이다.
무덤덤한 성격의 소유자인 프란시스는 바위산에서 동네로 돌아오는 경사진 길에서 손을 내밀지만, 엘스페쓰는 한사코 거부한다.
엄마, 내 손을 잡으라니까! 모친의 고집에 지친 중년의 딸이 소리지른다.
내 이름은 엘스베쓰다. 머리가 하얗게 센 엘스페쓰가 대답한다.
프란시스가 부른다. 내 손을 잡아요, 엘스페쓰.
원작이 희곡이라서 인물들 간의 대화가 간결하고 상징적이며 실감난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초콜렛바를 자로 재어서 반씩 나누어먹는 톰과 샘의 대화는 또 얼마나 리얼한지.
어른들에 대한 샘의 묘사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가끔 웃기는 하지. 하지만 어른들은 행복하지 않아.
가끔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거친 겨울바람으로 가득찬 스코틀랜드의 겨울풍경이 덤으로 따라오는 볼만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