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바자회를 하기로 했다.
도서실 도우미 어머니들과 교장선생님이 서로 주최하는 문제로 다소(라고 말하기엔 조금 피곤하게) 옥신각신했지만, 나는 도우미들을 달랬다. 결국 아이들이 도서실에서 재미있는 게 목표 아니냐, 엄마들 자존심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서.
교장선생님은 지난 학교(9월에 새로 오신 분입니다)에서 항께 하시던 업자를 불러오셨다.
그런데 주워들은 풍월에 비해 조건이 썩 좋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다른 업자들은 무조건 몇%를 해주는데, 이 사람은 5개 출판사는 더 많이, 나머지는 더 조금이었다.
그리고 그 5개 출판사의 책을 자기가 임의대로 가져와서 깔겠다고 한다.
어떤 책? 일단 업자에게 다른 학교의 리스트를 좀 달라고 했다.
헉, 거기서 봤더니, 업자가 가져온 책 리스트가... 음...
제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면 좀 고상한 표현이 될까?
<웃기는 게 딱 좋아>, <웃기지 웃기잖아>... 그리고 세계명작들의 만화축약본들... 등등
(위에 언급한 책들을 제가 직접 안 봐서 어떤 책인지는 모릅니다. 출판사 관계자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냥 제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혹시 제가 상상하는 대로라면 저는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오후,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교장선생님께 들어가서, 좋게 말씀드렸다.
이 업자 조건이 별로 좋지 않다
이대로 하면 교장선생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다(무지하게 말 돌려서 한 것)
엄마들에게 말이 날 소지가 많다
의외로 순순히 교장선생님께서는
그럼 그런 책 빼라, 업자가 뭐라고 하면 업자 바꾸면 된다, 다른 업자들 조건도 자세히 들어보고 보고하라...
라는 요지로 말씀하셨다.
혹시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나 싶어서, 정말 죄송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장실을 나섰다.
오늘 아침, 교장실에서 인터폰이 왔다. 호출.
내려갔더니, 그 업자가 들어와 있다.
교장선생님, 업자와 직접 교장실에서 얘기하란다.
- 부장님께서 주신 조건이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별로 만족스럽지 않아서요
- 다른 데는 어떤데요?
- 무조건 32% 해준다대요.
- 우리는 5개 출판사 책 36%까지 가능하다고 했잖아요
- 그 출판사 책들은 몇몇 책들을 제외하고는 탐나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업자들은 우리가 뽑은 책만 가져온답니다. 다른 책 섞지 않구요.
- 왜 그런 책들이 싫습니까. 그런 책 아이들이 다 좋아합니다. 깔아 보세요. 아이들이 어떤 책을 고르나.
- 아이들이 고를까봐 겁이 나서 싫다는 겁니다. 아이들 좋은 책과 그런 책 섞어두면 그런 책 고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책 집에 가지고 가면 엄마들이 '니네 학교에서는 그런 책 파니? 니들 코묻은 돈 벌려고.'라고 할 겁니다.
- 책 안 읽는 아이들은 그런 책으로라도 읽게 해야지요. 안 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 차라리 안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책에 잘못 길들이면 오히려 힘듭니다.
- 하, 참, 저 출판사 근무 27년째입니다. 사서교사 몇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더 잘 압니다.
- 판매와 영업에 관해서는 부장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어떤 게 더 좋은 책인지는 제가 더 전문가입니다.
- 출판사에서 다들 국문과 졸업한 사람들이 만듭니다.
- 국문과 나왔다고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잘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은 아닙니다. 저는 좋은 책을 팔고 싶습니다.
- 엄마들에게 다 물어보십시오. 이 출판사들 책이 그렇게 나쁜가. 엄청 잘 팔리는 책들입니다.
- 전교 엄마들에게 추천리스트 받았습니다. 그런 책들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여드릴까요?
- (교장선생님을 보면서) 독서지도사나 어도연(어린이도서연구회) 같은 단체들이 엄마들을 다 세뇌시켜서 그럽니다. 자기들에게 로비한 출판사 책만 좋다고 그래요.
-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우리의 교장선생님) 도서실 드나드는 엄마들도 그런 단체들입니까? 출판사에서 로비받는 그런 엄마들이 도서 선정이나 추천에 관여하면 문제잖아요.
- 제가 알기로는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쪽 관계자가 아닙니다만 제가 봐도 그쪽 추천도서가 더 낫습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설전이 점점 고성으로 변해서 오가다가...)
쉬는 시간 종이 쳤다.
- (나) 계속 같은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이들 올 때 되었으니, 저 갔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 (교장, 나를 보며) 왜 전에 있던 학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 학교는 이렇게 시끄러운 거요. 이런 식이면 하지 맙시다.
- (나) 그냥 문 쾅!
도서실로 돌아와서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생각했다.
사실 지금 내 여건상 풀타임 근무는 무리이다. 두 아이가 한참 손이 갈 초등학교 1,2학년이고, 4살짜리 늦둥이도 있으니까.
돈? 일당 33,060원, 한달에 70만원쯤 되는 돈이라면, 다른 일을 해서 벌 수 있다. 덜! 일하고 더! 벌 수도 있다.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나.
난 우리 아이들이, 아이들의 친구들이, 도서실에서 좀더 즐겁기를 바랬다. 그리고 내가 일조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건.방.지.게...
그리고 어린이도서관의 사서는 내 학교다닐 때의 꿈이었다는... 낭만으로...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아니, 오히려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해야 한다면... 그만 둘 수밖에 없지 않나.
아니면 싸워야 하나...
싸웠을 때 돌아올 그 보복은...
(결국 선생님들도 모두들 등을 돌릴테고, 난 아랫사람이니 갈구는 데에 당할 자신도 없고...)
온갖 생각을 다 했다.
나는 늘 비겁한데, 늘 입으로 앞장서다 정작 거리에는 잘 나서지 못했는데, 그런데 왜 늘 내 앞에는 이런 일들이 생기나...
할 일이 태산인데, 오늘은 술이나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