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난해서 너무 행복한 삶
김미순 지음, 최경락 그림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해마다 1월이면 공직자 재산등록이란 걸 해야 한다. 어느 부처는 고위공무원들만 하고, 어느 부처는 말단 공무원까지 다 해야 한다는데, 남편도 해당이 된다고 하여 우리는 1월만 되면 묵은 통장들을 다 꺼내놓고 북새통을 만든다.
그 재산등록이란 게 만만하지도 않을 뿐더러,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어느 통장에 있던 돈이 어느 통장으로 얼마 들어갔으며, 어디에 썼으며... 그런 것들을 일일이 기록해야 한다. 아마 검은 돈을 받지 않을까 걱정해서 만든 모양인데, 어느 누가 검은 돈을 받아서 당당하게 재산등록을 할까.
게다가 부처별로 재산등록을 제대로 했는지 살펴야 하는 인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니, 과연 이 제도가 효율적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위에서 하라니까 남편 몰래 들었던 적금까지 낱낱이 공개하면서, 우리는 어김없이 또 싸운다.
도대체 돈이란 것이 어떻게 된 게 모아지는 건 없고, 제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는가 말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매일같이 나오는 억 억 하는 소리들이 우리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운가 말이다.

돈을 어디에 썼나 되짚어본다. 나는 남편이 돈을 많이 썼던 일을, 남편은 내가 돈을 많이 썼던 일을 주로 생각해낸다.

남편 월급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어느 직장이 금고 문 열어놓고 필요한 만큼 갖다 쓰라고 하겠는가. 공무원이라는, 정신적 안정감을 주는 프리미엄까지 생각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결혼 8년 동안 옷 한 벌 사 입지 않고 살았는데, 이렇게 모은 게 없나 싶어 한숨만 나온다.

남편은 아이에게

<아들아, 넌 아빠의 길을 가지 말아라. 뼈 빠지게 일하고도 마누라 눈치나 봐야 하니...>라고 한숨짓지만, 난 나대로 야무지게 살림을 못한 게 눈치보인다.
그러다 화가 난다.
왜 연초부터 부부싸움을 하게 만드는가 말이다.

연예인처럼 예쁘고, 능력 있어 돈도 잘 벌고, 현명한 엄마이자 어진 아내이면서 때로는 남편과 동료가 되어서 직장 일도 의논하고...
이렇게 되고 싶은데, 현실의 나는 단 한 가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올해도 1월을 보내며 우울했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렇게 우울할 때 <너무 가난해서 너무 행복한 삶>이란 책을 읽고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신부가 되기 위한 길을 걷다가 그만 두고 빈민운동을 하던 남자, 그리고 성당일을 열심히 하던 아가씨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북한산자락 1.5평짜리 작은 찻집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얘기.
언젠가 화제가 되어서 언론에 자주 나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난해서 행복하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게 아니고?
제목이 잘못된 게 아닐까 했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로 '가난해서' 행복한 거였다.

두 사람이 가진 총 재산이라고는 월세 25만원의 작은 찻집 하나 - 이들은 여기에서 낮에는 차를 팔고 밤에는 잠을 잔다 -, 그리고 배낭 서너 개에 들어갈 만한 옷이 전부다.
고정관념을 깨면 그것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단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 수 있듯이.

씽크대에서 세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고, 매일 자기네 마당처럼 드나드는 북한산에서도 그들은 장갑이 없으면 두툼한 양말을 손에 신고, 반대로 양말이 젖었으면 장갑을 발에 끼운다.

목도리가 없으면 토시 두 짝을 이어 두르거나 스타킹을 꺼내 두른단다.

오히려 이들은 이런 것에서 사물을 사랑하는 방법, 사물이 지닌 가치를 새롭게 깨달으면서 즐겁다고 얘기한다.

결혼식장에 가면서도 등산복 차림으로 가서 진실한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이웃집 할머니가 주신 전기장판은 며칠 써 보고는 재활용센터에 갖다준다.
그 전엔 추우면 둘이서 꼬옥 껴안고 잤는데, 전기장판을 쓰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단다.
그는 '나는 장판의 전열보다 남편의 체온이 그리웠다'라고 썼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소유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고 한다.

아이도 욕심이 생길까봐 낳지 않기로 하고, 그 흔한 세탁기, 텔레비전, 장롱도 없이 살아가는 부부.
성경으로 말하자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고, 법정스님 식으로 말하자면 <무소유의 행복>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지난 며칠 동안 우울했던 일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남편에게 이 책을 내밀었더니 남편은,

<당신까지 이런 책을 보면 어떡하나. 당신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뭐 그런 책을 봐야지> 한다.

그렇지만 아마 나의 속얘기는 들었을 것이다.
<여보, 당신이 돈을 못 벌어온다고,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투정하는 건 아니었다는 거 알죠? 가정적인 당신, 건강한 우리 아이들... 지금으로도 나 충분히 행복해요.>

근데, 그 뒷말도 들었을까?

<그래도 올해에는 돈을 좀 모아봅시다. 집도 사야하고, 앞으로 아이들 교육비도 많이 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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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연초에 쓴 글이었습니다. 우리는 작년에... 드디어 집을 샀습니다. 결혼 10년째에 드디어 내집마련에 성공했는데, 돈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우리는, 집값이 꼭대기에 있을 때 샀다가 그 후로 이런저런 대책들이 나오면서... 지금은 집값을 알아보지 않습니다. 뭐 집값이 중요하겠습니까? 이제 집주인이 나가란 소리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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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6-1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____^
책을 읽지 않고도, 호랑녀님이 느낀 따뜻함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소유란 없다....

hanicare 2004-06-1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법정스님글보다 더 와 닿는다는 생각이 드네요.닉이 호랑녀여서인가,아주 당당하고 활달한 기상을 보여주셔서 제 마음까지 시원해집니다.경제관념이 없는 인간이어서 대강대강 살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나까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팔아주고 싶진 않아요.집을 사셨다니 축하드립니다.집이 주는 안정감은 돈으로 따질 수 없다 싶네요.저도 작년 늦가을에 평생 살고 싶은 집을 장만하게 되어 호랑녀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답니다.늘 행복하시길

panda78 2004-06-1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0년차 주부가 되면 제 집에 살 수 있으려냐요... 남의 얘기가 아니라서 한숨 폭폭 쉬다가, 해피 엔딩이라 살모시 웃고 갑니다. ^^

조선인 2004-06-15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집값이 중요하겠습니까. 두발뻗고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다만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은행집이 아닌 내집이 갖고 싶다는 소망인데... 언제쯤 가능할지 ㅠ.ㅠ

호랑녀 2004-06-1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은행집이 아니라 내집... 아직 빚이 쬐끔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 지분이 좀더 많으니, 내집(남편과 나의 공동명의로 된 집)입니다, 조선인님.(난 왜 아직도 그대를 부를 때 선인님이라고 자꾸만 나오는 것일까. 꼭 조씨 같잖아요 ^^)
팬더님, 저도 집이란 게 아주 멀리 있어서 영 내것이 될 것 같지 않더니, 그래도 좀 무리해서 장만하고, 허리띠 졸라 매서 사니깐 내것이 되더군요. 마음 같아선 인테리어 쏵 하고 들어오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답니다.
하니캐어님, 저는 님을 하니카레라고 읽었는데, 팬더님은 하니캐어라고 읽으시더군요. 호랑녀라는 닉네임에 제 인상을 각인시키지 말아주시와요. 알고보면 소심녀입니다. 공무원 마누라... 오죽하겠습니까? 집이 주는 안정감... 정말 좋더군요 ^^ 청소도 한번 더 되고...
진우맘님, 고맙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소유란 없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점점 살면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마냐 2004-06-15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로또가 되면...행복이 날라가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니까요. ㅋㅋ

호랑녀 2004-06-1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 로또가 되어도 행복 지킬 수 있을 것 같은데...ㅋㅋ
며칠 전 꿈에서 로또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겁이 나는 게 아니라 참 행복하더군요. 저는 겁이 날 줄 알았거든요.
동네 학교앞에 어린이집 인수해서 근사한 도서관 만들 꿈에 부풀다 잠이 깼습니다. 좀 허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기분이 들더군요. 으~ 어쩔 수 없는 속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