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3학년이나 된 큰놈이 계속 뭔가를 찾지 못한 채 버벅댄다.

미술준비물, 자, 투명종이, 수영모자, 영어책...

나한테 욕을 먹어가면서 묻는 게 이 정도니, 대충 그냥 지나가버릴 학교준비물들은 또 얼마나 많을꼬.

오늘 아침, 우연히 아이의 책가방을 들여다보았다.

필통이 터~ㅇ 비었다. 무지하게 야단치고, 매를 들고 엄포를 놓고, 다시 다 채워놓는 거 확인하고, 지우개 빠졌다고 또 야단치고...

이렇게 난리를 한바탕 치르고 출근해서 도서실에 앉아 있자니, 내가 꼭 그만했을 때 생각이 난다.

3학년 때부터는 사람이 좀 되었던 것 같은데, 2학년 때까지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공부는 비교적 했었는데(내 생애 공부 잘했던 유일한 순간) 내 걸 챙기는 것에는 정말 둔했다.

어느 날, 하도 지우개를 잃어버리고 다니자 엄마는 필통에 나일론끈으로 지우개를 매주셨다. 그리고 그날, 나는 필통까지 잃어버렸다.

물론, 연필 한 자루도 잃어버리는 걸 용납 못하셨던 엄마는 날 무지하게 혼내셨고, 초등학교 고학년인 울 언니는... 이것을 소재로 동시를 써서 큰상을 탔다.(얄미웠다)

뭘 무지하게 챙기지 못하는 내 아들, 누굴 탓하랴. 날 닮았다. 예전에 썼던 연습장 하나까지 꼼꼼하게 다 챙기는 남편과 날 반반 섞어서 닮거나, 차라리 그쪽을 닮지, 왜 날 닮아 지도 고생 나도 고생인지...

겨우 이 정도의 유전자밖에 물려주지 못하고도, 늘 야단쳐야 하는 내 맘도 편치않다.

좀 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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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5-28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혼내지 마세요.
전 신발 안 신고 학교 간 적도 있는걸요.
실내화 갈아신을 때서야 화장실 슬리퍼를 끌고 온 걸 알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그 정도면 애교로 봐주세용~

호랑녀 2004-05-28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그래도 바르게 잘만 컸는데 말예요 ^^
그런데 제가 더 아이를 야단치는 건, 제가 살아보니 주변정리 못하고(사람관계는 깨끗했슴다) 흘리고 다니는 게 영 불편하더라구요. 그래서 내 자식은 좀 안그랬음 좋겠는데...
누굴 탓해요...-.-;;

sooninara 2004-05-2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은 부모의 제록스죠^^ 저도 울 아이들이 나보다 성격이나 모든면이 나아보이는데도..불만이 많아서..에구...매일 잔소리로 시작해서 잔소리로 하루 해가 저물어요..

호랑녀 2004-05-28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밤, 제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는데,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헉, 우리집이었어?
뭐가?
아파트 현관에서부터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애를 잡길레, 저 무식한 여자... 했더니, 당신이네?
@*%$%*$#@...

다연엉가 2004-05-2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호랑녀님 저 무식한 여자 그 여자 여기 또 있습니다^^^

호랑녀 2004-05-2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쪽 소리는 여기까진 안 들리고, 그냥 우리 현관에선 우리집(3층) 정도 소리만 들려요 ^^
이제는 딸한테 전화왔네요.
엄마 배고파
어쩌라고~ 엄마가 나가는 거 하루이틀이냐? 여기저기 뒤지믄 먹을 거 있잖앗!!!

다연엉가 2004-05-2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호랑녀님 그렇게 하면 뒤져서 먹습니다.^^^그렇게 강하게 키웁시다.(^^)

진/우맘 2004-05-2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져서....ㅋㅋㅋ 갑자기 어제 본 <돼지책>이 떠올라요.^0^

호랑녀 2004-05-2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하게 크는지, 천덕꾸러기로 크는지...ㅉㅉ
진우맘님은 다른 고민들이 또 있으시겠지만, 그래두 아이들 먹을 거는 시부모님이 챙겨주시겠네요 ^^
우리 아이들은 돼지책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나봐요. 엄마가 있어도 집이 돼지우리 같아서인가?

AeroKid 2004-05-3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분의 아이키우기 를 보면서,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또는 아이를 돌아보지요..
어떻게 자랄까? 내 이 한마디 손길 한번마다...

호랑녀 2004-06-0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에어로키드님! 다른 사람 서재질에 제 서재 쉰내나는 줄 모르고...^^
내 손길 한번, 내 따뜻한 말 한마디마다 아이가 더 잘 자라겠지요... 그런데 그래도 저는 문제입니다. 따뜻한 손길, 따뜻한 말도 잘 못하니...-.-;;

아영엄마 2004-06-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왜 유독 큰 아이에게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지... 오늘도 저는 아이에게 바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답니다.. 평소에도 숙제 안하고 놀려고만 해서 한번, 두번, 세번.. 네번째에는 결국 고함이...ㅠㅠ 오늘도 동생 데리러 나가기러 해 놓고 시간 다되어 가는데 책 본다고 눈을 못 떼고 있는 녀석에게 몇 번 이야기 하다 안되니까 고함을.. 에휴.. 이 엄마가 발전이 없네요..쩝

호랑녀 2004-06-0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애에 대한 기대가 더 커서일까요, 아님 한번 실망해봐서, 둘째에 대해서는 좀더 너그러워질까요...^^
전 사실 둘쨰에 대해 특별히 너그럽지도 못해요. 가끔씩은, 내가 아동학대를 하는 건 아닌가, 회초리는 들더라도 마음은 어루만져주어야 하는데, 난 그것도 못한다 싶어서 자책합니다... 아우, 엄마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