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때 함께 하숙을 하던 후배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남녀공학, 것두 남자가 특히 많은 대학의 남자가 특히 많은 과를 다녔다.  여자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데모했다. 그리고 골수 운동권이었던 한 남자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나와 살 때는 상황이 거기까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녀는 다국적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의 집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은 늘 편찮으셨고, 형들도 많았지만 변변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취직하자마자 결혼을 했던 것은 어쩌면 그의 집 뒷바라지가 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장생활만으로는 돈이 빠듯했던 그녀는 결국 직장을 그만 두고 과외선생님이 되었고, 꽤 잘 나갔던 모양이다. 매달 고정적으로 시부모님의 병원비를 부쳐야 했고, 집안의 생활비를 대야 했고, 그리고 아들도 키워야 했는데, 게다가 아파트도 샀다.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여전히 운동권인 남편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모두들 변심하고 옛날을 노래할 때, 오직 그만이 계속 현장에 남아 있는 것이 그녀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을까.

그녀가 이혼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남편은 드디어 취직을 했고, 취직을 하자마자 첫번째로 한 일이 이혼이었단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그동안 네 돈을 받으면서 늘 부담스러웠어.

허, 참.

머리로 짚신을 삼아줘도 모자랄 판에, 10년 이상을 그녀에게서 우려낼 대로 우려내고, 그리고 찼다!

시댁으로 아이까지 보내고(그 아이는 그 집안의 제사를 모실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녀는 작은 아파트로 옮겼다고 한다. 한 친구가 물어물어 그녀를 찾아갔다. 그런데 냉장고는 텅 비어있고, 그녀의 눈은 촛점을 잃었더라고 했다. 그녀는 억울하다고 힘없이 얘기하더란다.

진심으로 남편을 자랑스러워 했고, 진정으로 시어른께 병원비며 생활비를 드렸단다. 자기 혼자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 무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봐 내색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았던 그 세월이 억울하단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한 번만이라도 자기 힘들다고 얘기할 걸 그랬단다. 밤마다 과외를 가느라고 어릴 때부터 밤이면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아들을 데리고 어디 여행이라도 한 번 해볼 걸 그랬단다.

얼마 전, 그녀를 만났다. 한밤중에 바람을 쐬러 나왔다며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그냥 모르는 척, 세상이야기만 했다. 비싼 집에 가서, 비싼 회를 먹었다. 내가 사주겠다고 했더니, 언니, 나 이제 돈 쓸 데도 없어! 한다. 말없이 그냥 안아주었다.

어쩌면 그는 그녀가 늘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건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긴, 인간의 탈을 쓰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우리 주변엔 너무 많다.

연약하고 사악한 인간에 불과한 나는, 늘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번엔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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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1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네 돈을 받으면서 늘 부담스러웠어.
------그러니 이제부턴 잘 해줄께...가 되어야지! 부부 사이의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습니다만...화가 나는군요. 뭡니까! 저게!!!!

진/우맘 2004-05-1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지붕공사가 왜 안 될까...<설정 저장하기> 안 누르셨나?

진/우맘 2004-05-1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되었네요!!! ^^ 가끔, 바뀐 이미지를 컴이 못 읽거든요. 호랑녀님, 지금도 안 보이시면, Ctrl + F5를 눌러보세요. 와~ 그림 조오타!

호랑녀 2004-05-1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되네요.
고맙습니다 진우맘님. 그런데 어떻게 하신 거에요? 신데렐라 요정마냥 마술지팡이 한번 휘두르신 거예요? 안되던 게 진우맘님 다녀가시니 되네요 ^^
(근데 그 남자 진짜 나쁘죠? 물론 그 남자 얘긴 한 마디도 듣지 않았으니 그 속얘긴 잘 모르겠지만... 불쌍해서 혼났습니다)

가을산 2004-05-1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 특히 80년대의 - 운동권이다 하는 사람들,
독재에 항거하니, 민주가 어떠니 하면서도 정작 자기 조직과 가정에서는 더 독단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이 되어도 정서적으로 가부장제도는 못벗어나는 '줏대있는' 치들의 한계이기도 해서, 오히려 내놓고 '보수'인 자들보다 더 해법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말빨도 더 세죠.)
친구분 말씀만 들어서는 '내색도 못했다' vs '부담스러웠다'로 드러나는데, 실상은 어떨지 제삼자가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둘 다 맞을 수도 있구요. --;;
어쨌든... 부부 한쪽의 성공 뒤에는 나머지 한쪽의 뒷받침과 성원이 중요한 것인데, 그 결실을 혼자만의 것으로 당연시하는 사람은 이제 없어야겠어요.

호랑녀 2004-05-11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 이던가? 그 사람의 소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거기 80년대 운동권 사람들, 가정에서 더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사람의 얘기가 나오더군요.
그 책을 읽으면서, 후배의 남편을 떠올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순결한 운동가였습니다. 적어도 제 머리 속에서는...

마립간 2004-05-1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두 사람 모두 양말 뒤집어 보듯 머리 속을 들여다 보고 싶군요.

로렌초의시종 2004-05-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얄팍한 이해와 절대적인 분노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도대체 그 남자는 무엇을 위해 운동을 했던걸까요? 약한 자들을 위해서 운동권에 투신한 것이 아니라, 강자들의 비열함을 더 적나라하게 배우고 싶었던 걸까요? 결국 그 자신이 남들이 운동할 수 밖에 없게끔 하는 악의 근원이 되어버렸군요.용서받을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