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을 다 먹고 나자 다시 불면이 계속되고 있다. 뻑뻑한 눈은 붉게 충혈되어도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 그런 검은 새벽. 인생의 투명도가 떨어지고 있어서일까. 뿌옇고 답답한 인생이여. 그럴수록 불면에 익숙해져 간다.
어제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침대맡에 놓아둔 노트를 꺼내 한 페이지 가득 생각을 정리해 가면서 간신히 마음을 다독여도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고 앉아 멍하니 맞은편 화장대를 응시하고 있는데, 순간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얼마전에 장만한 화이트 극세사 패드가 '괜찮아, 잘 될거야.' 라고 말이라도 걸어오듯 날카롭게 곤두선 내 신경을 누그러뜨려 주는 것이 아닌가. 순간 화이트 침대와 화이트 협탁, 화이트와 월넛의 화장대가 모두 천사처럼 보이면서 주변이 온통 흰색으로 보였다. 그 기운에 밀려 스러지듯 잠이 들었다.
만성 불면증에 하도 오래 시달리다 보니 이제 정신머리도 어떻게 된건가 싶기도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이가 들면 사는게 조금이라도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큰 착각이었다. 지식을 얻게 된다고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듯, 삶의 기술을 배우게 된다고 해서 사는게 쉬워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경험치가 늘어난다고 해서 안전망이 더 확보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설프게 이것저것 주워섬기다가 뭘 모르던 때보다 더 괴로워져서 모든걸 다 내팽개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뭔가 잘못되었을 때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책으로 이어져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힐난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대신에 스스로를 보호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는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힘이 되어준 것은 뜻밖에도 극세사 패드였다. 너무 포근하고 보드라워 침대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목청 껏 외치고 싶게 만드는 그것. 세일로 저가에 산 이 물건의 위력이 생각보다 참 대단하다. 그러나 물건도 그 물건의 효능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사람에게나 좋은 법. 아, 그러니 이 일은 또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주변의 사소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것. 그리하면 그것이 이토록 놀라운 힘을 발휘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