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큰 나무 아래서 내가 컸지요”
[조선일보 2006-04-22 02:58]    
소설가 박완서 맏딸 호원숙씨 첫 수필집 ‘큰 나무…’ 출간
엄마 “내 존재 부담될까 걱정” 딸 “소설가 엄마 원망하기도”

[조선일보 김태훈기자]

“책을 낸다는 말은 들었지만 도와주지 않았어요. 글이란 게 원래 혼자 쓰는 거잖아요?”(소설가 박완서)

“원고도 보여드리지 않았죠. 어제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셨고, 오늘 아침 제 책을 보셨어요.”(맏딸 호원숙·수필가)

소설가 박완서씨의 맏딸 호원숙(52)씨가 첫 수필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샘터)를 내고 지천명에 이르러 문인의 이력을 새겼다. 1992년 박씨의 문학세계를 다룬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에 ‘모녀의 시간’이란 글을 실었고, 2002년에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란 공저(共著) 책에 필자로 참여한 바 있지만 호씨는 “이전의 글들은 모두 ‘박완서의 딸’로서 쓴 것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어머니와 딸로만 지내온 두 모녀가 20일 오후 경기도 구리시의 박씨 자택에서 ‘문단의 정식 선·후배’로 첫 만남을 가졌다. 책을 낸 이는 딸인데 박씨가 내내 쑥스럽게 웃었다.

“쉰을 넘기도록 가정주부로 살아 왔지만, 한글을 익히기 전부터 文學(문학)이란 한자는 알고 있었어요.” 호씨는 “어린 시절, 집안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 제목 가운데 가장 빈도 높은 단어가 ‘文學’이란 한자였고, 나는 그 분위기에 빠져 문학을 꿈꿨다”고 말했다.

호씨는 2003년 모교인 경기여고가 운영하는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으로 봉사하며 인터넷 동창회 사이트에 글을 썼다. 100편 넘게 연재가 이어졌고, 그녀의 글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도드라져 소문이 났다. 이번 수필집이 그 결과물이다.

“원숙이가 내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딸애의 글을 진작부터 봐 왔어요.” 박씨는 그 글들이 “엄마가 아닌 작가의 잣대로 봐도 잘 쓴 글이었다”고 조심스레 평했다. “책으로 안 내길래 ‘발표 욕심은 없는 애로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나 한편으론 ‘내 존재가 부담이 되어서 그런가’ 싶어 미안해 하기도 했죠. 친구가 인터넷에서 딸애 글을 읽고 ‘너보다 잘 쓰는 것 같다’고 평했는데, 쉰 넘은 딸애 글 칭찬이 어찌나 듣기 좋던지….”

이번 책에서 호씨는,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어머니를 원망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고백했다. ‘우리 가족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만의 세계로 날아가 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운함에 마음이 저려와 밥도 물도 먹을 수 없는 시간이 있었다.’(213쪽)

호씨는 “독자와 딸 사이에서 거리조절을 못하다가 어머니를 작가로서 존경하게 된 것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난 뒤”라고 했다.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작가에 대한 존경과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겹쳐 읽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자신의 책을 정리할 때마다 “지겹게 많이 썼네”라고 했지만, 딸은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서 이겨낸 어머니의 모습과 작품은 말할 수 없는 겸허와 존엄에 차 있어 저리도록 아름다웠다”고 어머니를 평했다.

“실은 어머니께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책 제목의 ‘큰 나무’는 그늘이 아니었어요. 내 키가 커진 것 같아요.”(딸)

“나도 도와 주고 싶었단다.” 책을 낼 때 도와주지 않은 박씨였지만 앞날의 조언은 잊지 않았다. “내가 글을 쓸 때 곁에서 지켜봤으니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좋은 반응이 있더라도 남발하지 말아라.”(어머니)

(김태훈기자 [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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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저 두분 사이. 그런데 어쩌지? 따님이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은.. -_-;;;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서는,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과연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세실 2006-04-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지난번 박완서님 뵐때 옆에 계시던 분이예요~~ 아 그때 알았더라면 사인 받는건데. 쿄쿄쿄
실제 뵈면 4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으세요~ 와 50대시라니....

라주미힌 2006-04-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사진 보자마자 옛날 그 광고 카피문구가 생각나더라구요.

어느 것이 하늘빛이고, 어느 것이 물빛인가?(대충 이런거)

누가 딸이고 누가 박완서님인가...ㅎㅎㅎㅎ

이리스 2006-04-22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 오호~ 그런가요? 사진이 좀 못나온건가요.. ^^
라주미힌님 / 하하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