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몰라요오~
이렇게 말하면서도 기실 사랑이 뭔지 알기는 아는데, 하고
뭔가 아는체 하고 싶어 근질거려 못참겠다 싶은 때가 있었다.
허나, 돌이켜보면
모른다. 모르는게 맞다.
홍림은 어명을 받들어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를 품는다.
여자는 그의 동침 상대인 왕의 아내 왕후.
오로지 남자밖에 몰르고 자랐던 홍림에게 혼란이 찾아온다.
여자를 품는게 불가능했던 처음, 그러나 반복되는 상황에 그는 여자를 품는데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왕의 고통스런 모습에
이 감정은 욕정이었음을 고하고 용서를 빌며 왕의 곁에 돌아가
익숙했던 그 자리에 눕는다.
이렇게 간단히 정리가 될 일이었다면 세상에는 드라마가 없을터
회임을 했다는 왕후가 만나자는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홍림은
왕후를 다시 만나 또 한번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육체의 합일은 그 순간에 감정을 다른 곳으로 이끌어다 놓고 말았다.
이들의 정사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왕의 서슬퍼런 기세에도 왕후와 홍림은 서로를 감싸기 바쁘다.
목숨이 왔다갔다 할 판인데도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느냐고 묻는 왕의 절망도
그들의 목숨을 내 놓은 사랑 앞에 초라해질 뿐이다.
욕정이 연모로 바뀌는 것이 과연 어느 순간이란 말인가.
어떤 것이 연모이며 어떤 것이 욕정이란 말인가.
욕정에 눈이 멀어 크게 실수를 할 수는 있으나
욕정에 눈이 멀어 목숨까지 내놓고
욕정의 상대를 보호하려 들지는 못할 것이다.
연모는 기꺼운 희생이다.
홍림과 왕후가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는 것이 그것.
연모는 끝까지 믿고 또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다.
수많은 심증에 마음이 찢기듯 아파도
눈 앞에서 보기 전까지는 믿어주던 왕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이 엇갈림의 비극은 확인하려는 마음 속에서 더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왕후와 홍림은 서로의 마음을 어쩌면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알게 된 운 좋은 케이스다.
왕의 분노 앞에서 그들은 서로 고백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확인하고 되물은 것이 아닌
외부의 자극에 의해, 난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깨닫고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왕과 홍림은 아주 부적절한 방법으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자 했다.
서로를 끝까지 내몰아 벼랑 끝에 세운 후에 칼을 들이대고, 칼을 꽂고 묻는다.
눈 감는 순간까지 둘은 서로의 마음을 영영 헤아리지 못한채
미욱한 놈이 되어, 질투에 눈이 먼 놈이 되어 서로를 해하고 죽이고 만다.
나를 사랑하긴 했니? 나는 어떤 의미였니?
우리는 이 숱한 비슷한 류의 질문의 답을 알고 묻는 것인지도 모른다.
질문을 받은 사람도 어떤 답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 관계는 균열이 시작된
손 쓸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관계라는 것 또한 자명하다.
욕정이 어느 순간 숭고한 연모가 되기도 하고
연모의 끝이 칼 끝으로 상대의 심장을 저미고 말게 될 수도 있다는
이 하나도 새롭지 않은 사실에
여전히 코끝이 찡하고 저릿저릿한 속내를 감출 수 없는 까닭은
사랑이라는 이 거대한 단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여전히 나는, 사랑을 모르겠다.
* 신께서는 완벽한 조인성에게 하나 안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목소리인듯 싶다.
주진모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참 좋아하는 배우다. 이번 왕의 연기는 그, 였기에 이만큼이었다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서 호연을 펼친 송지효에게도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