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야 하는게 마땅한 전화번호가 있다.
그러나, 그 전화번호를 선택하여 삭제 여부를 묻는 창이 뜨면 주저하다가 취소를 누르곤 한다.
뭐 어때! '이 번호가 있다는 것 자체를 그냥 잊으면 그게 삭제한거야.' 요런 말도 안되는 논리로 전화번호를 남겨두는 것이다. 하지만, 내 이성이 이성이 아니며 기억이 혼미한 어떤 지점에 이르고 나면 어김없이 다음날 발신 내역에 그 번호가 떠 있다.
그 때 밀려드는 후회와 자괴감. 심지어 다음날 다시 그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올때 쯤엔 몸은 고사하고 머리 만이라도 이불 속에 넣어버리고 감쪽같이 숨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어떤 순간이 있다. 그것은 매우 명확하게 쌍방이 관계가 끊어지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 어떻든 간에 그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절대로 이전과 같은 관계로는 돌이킬 수 없다. 후에 엄청난 노력으로 돌리려고 발버둥 쳐봐야 더욱 더 멀어지거나 발버둥 치느라 괴롭기만 할 뿐이다.
안다. 안다. 안다. 알아. 그래, 안다고.
아니까, 그러니까, 그냥 지금은.. 그리고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그 때까지 그대로 저 전화번호를 남겨둘테다. 종이에 베인 것 처럼 아리고 쓰린 상처가 부드러운 스펀지로 툭 친 것 처럼 별 것 아닌 그 무엇이 될 때까지 그냥 자연 치유를 기다리는 거다. 예나 지금이나 무식하지만 이게 정석인 것 같다.
그 번호가 숫자의 나열에 지나지 않을 때까지, 삭제를 한 것과 다름 없는 그런 번호로 남을 때까지는 아직 담아 둔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