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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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이제는 박완서 선생님 글도 뭔가 예스럽게 느껴진다. 어투도 그렇고 등장하는 물건들과 생활상이 까마득하다. 물론 나에게는 여전히 한국어 글쓰기에 있어서의 부동의 전범이자 교본이며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테지만.

대학 시절 이 분이 한 번 우리 학교에 오셨었다. 실제 모습을 뵌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슨 강연이었던가는 기억 안 난다. 지나치게 수줍어하며 시종 몸 둘 바를 몰라 하시던 모습만 선명하다. 서늘하리만치 날카롭고 깐깐하던 글 속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그날 대중 앞에 서게 된 상황이 못내 부담스럽고 불편하셨던 것이다. 미처 거기까진 헤아리지 못하고 그때는 그저 어쩌다 우연히 마스크 벗은 이웃의 낯선 모습을 봤을 때처럼 뜨악하기만 했었다. 글 속의 인물이 글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얼마나 생경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최초의 아연한 체험이었달까.

그 후로도 운 좋게 몇 번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글 속의 인물은 글 속에서만 만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다. 글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형태다. 독자의 관념 속에서 일방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석된 후 제멋대로 확고하게 완결이 되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서, 글 속의 위인을 글 밖에서 재차 만난다고 해서 딱히 무슨 생산적인 효과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그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재조정해야 하는 구차스런 일만 생긴다.

다른 차원으로 옮기지 말아야 되는 게 있다. 함부로 손 뻗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둔 채로 바라보는 편이 더 나은 그런 경우. 글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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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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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시절의 마키아벨리가 통과했던 정치적 격변의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교활하고 냉소적인 인물이 아닌, 자기 일을 사랑하고 우국충정은 뜨거웠던, 어느 평범한 피렌체 시민이었던 마키아벨리의 모습도. 대단한 시오노 나나미 여사. 어쨌든 이 분한테 굉장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비르투(재능•역량•능력), 포르투나(운•행운), 네체시타(시대의 요구에 합치하는 것=시대성). 지도자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마키아벨리가 꼽은 세 가지. 마지막 항목에 관해서라면 철학자로서의 마키아벨리는 시대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는 르네상스인이 아니다. 근대인도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사실상 현대인이다. 더 이상 의미와 가치를 논하지 않고, 아니 애당초 그 어떤 형이상학을 옹립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다만 게임의 방법과 기술에 관하여 천착했다는 점에서.

그런데 왜 마키아벨리가 시오노 나나미의 친구인가. 관념론을 배격하는 현실주의라는 점에 있어서의 사상적 친연성과는 별개로 그녀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동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상의 직접적인 이유 한 가지가 뒷부분에 나온다. 마키아벨리가 썼던 단편 역사소설이 있었고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와 같은 이유로 주변의 질타를 받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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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탈리아 - 김영석의 인문기행
김영석 지음 / 열화당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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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한 문체로 문화 역사 예술을 망라하며 이탈리아 곳곳을 깊이 있게 짚고 있다. 고열량의 내실에 비해 지나치게 검박한 이 책의 물리적 외양이 모처럼 귀한 책을 접한 독자로서는 차라리 안타깝다. 컬러 도판에 양장본으로 나와야 마땅하련만. 곳곳에 밑줄치고 색칠하고 여백마다 이것저것 더 찾아 적어넣고 수시로 이미지 검색해보고 그렇게 부산을 떨어가며 읽었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볼 수 있을까. 가게 된다면 일순위로 가방에 챙겨 넣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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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층짜리 집 100층짜리 집 1
이와이 도시오 지음,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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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특유의 야무지고 꼼꼼한 세공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그림책. 미스터리한 편지를 보내온 친구를 만나기 위해 주인공 어린이가 100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온갖 동물들을 만나게 된다. 사는 모습도 가지각색. 가령 어떤 층에선 개구리 무리가 실내에 인공 강우 시설을 갖추어 놓고 물놀이를 즐기는 중인가 하면 또 다른 층에선 여왕벌이 쉴 새 없이 알을 낳고 있다.

문제는, 전자의 경우 천장에 구멍을 뚫어 윗층의 대형 수조에서 급수를 지원받는 만행을 불사하고 있으며 후자 역시 알을 대형 부화기가 있는 아랫층으로 내려보내기 위해 건물 외벽에 마구잡이로 터널을 설치해놓았다는 사실이다. 무단으로 증개축한 가구는 이들만이 아니다. 동심이라고는 모조리 썩어버린 나로서는 그저 주택임대사업이란 것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고충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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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것은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8
브라이언 멜로니 글, 로버트 잉펜 그림, 이명희 옮김 / 마루벌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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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하고도 깊은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그림책이어서 아이한테 보여주려 했건만 과욕이었나, 5살 짜리한테는 그저 충격과 분노와 울화만 쌓이는 책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죽는대.
-왜요?
-늙으면 다 죽어. 엄마도 언젠가는 죽어.
-안 죽으게...
-안 죽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조심해야지.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은 다 죽는대.
-왜요?
-원래 언젠가는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대. 그러니까 엄마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어.
-아니야! 안죽으게... 안죽으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안 죽게 할 수 있을까.
-참으면 돼.
-참는다고 안 죽을 순 없어.
-엄마가 안죽으게... 안죽으게... 으어어허아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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