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와 주위 인물들이 모두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인터뷰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씌여진 (게다가 출판하기 전에 인터뷰이의 검열까지 다 거친) 책이다보니 약간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공인 전기라기보다는 인터뷰집에 가까운책이지만, 저자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벽에 붙은 파리의 심정으로 최대한 비틀즈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비틀즈의 모든 것을 담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인터뷰어의 정성이 느껴지는 책인 것만은 확실하다.
예리하기는 하지만 일본 고유의 특성이라기보다는 동양권 문화의 공통된 성향 같다. 뒷부분 해설을 읽어보니 뜨끔하게도 나같이 말하는 사람은 이 책을 한 번밖에 안 읽은 사람이라면서 책을 두 번 이상 읽어야만 베네딕트가 분석한 일본인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난감하다. 언제 이 책을 또 읽게 될지 모르겠다.
한편으로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독일의 경우와 단순 비교해서 뻔뻔하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독일의 경우에는 전쟁 도발에 대한 사과가 곧 회개 후 '리셋'을 의미한다. 조상의 모든 과오와 깨끗이 결별하고 다시 새출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무와 기리의 정서를 가진 일본으로서는 사과가 리셋이 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사과가 독일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각종 고문서와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대표 화가들이 남긴 삶의 자취를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걸출한 재량을 가지고 사연 많은 생을 살다 간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심금을 울리는 인물은 호생관 최북이다. 까닭은 그가 제일 '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북은 왜 짠한가. 천형처럼 타고난 거침없는 광기가 짠하고, 광기와 배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라는 점이 짠하고, 작은 그릇으로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그의 신분상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점이 또 짠하다. 이 책에 도판으로 나오는 최북의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도 공산무인도나 풍설야귀인 같이 거침없는 필치로 그려낸 작품들이 그러하다. 과감하게 뭉개버린 배경이나 거센 추위와 바람을 묘사한 부분은 자못 현대적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말콤 X는 흑백 통합이 아닌 흑백 분리를 주장한 급진적 흑인 인권운동가였는데,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백인 입맛에 맞는 흑인해방운동을 한다고 비난한다. 그의 눈에 비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디까지나 ‘백인 밑에 기식하는 흑인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운동가였던 것이다.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필두로 미국 흑인해방운동의 노선이 두 가지였다는 사실, 즉 60년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에는 인종뿐만 아니라 계층 문제도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기 전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말콤 X는 미국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 그러니까 할렘가 흑인들의 삶을 조명했던 셈이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강자가 서술하는 역사에는 결코 큰 비중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 같다.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정당하고 숭고하게 묘사되는 이 소설이, 나는 사실 불편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한의 경지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자기초월의지, 용기, 결단력, 의연한 모습 같은 것들은 물론 충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움이, 인간을 극한의 경지에 놓이도록 종용하는 근본적인 시스템마저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