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의 저항
이인성 지음 / 열림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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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언어는 아마도, 살로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내면서 살아서 가고 있음을, 살아가면서 다른 살이 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실존의 실감과 질감의 언어일 것이다."(146)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부터 (문학의 언어가 나를 허락하기도 전에) 문학의 언어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스스로 철회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존의 구체적 양상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삶의 가장 예민한 속살을 허물없이 내보이는 일이리라. 이 ‘드러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나를 점점 더 침묵하게 한다. 부끄러움은, 드러내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드러낼 만한 내용 자체의 빈궁함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익히기. 그리하여 나를 둘러싼 구체적 삶에 대해서, 즉 나 자신의 "실존의 실감과 질감"에 대해서 함구하기. 보다 차갑고 무표정한 언어로 연막을 피우기. 그렇게 스스로에게 딴청을 부리며 살기. 언젠가부터 나는 이것을 성인이 되기 위한 심리적인 훈련의 일부로 여기게 된 것 같다. 자잘하고 궁색한 비밀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토할 것 같으면서도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해대는 것은, 어쩌면 자존심과 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로맹가리의 말로는, 다른 모든 곳에서 실패한 자들이 마지막으로 모여드는 데가 문학이라고 하니까. 내 알량한 자존심은, 나의 실패를 아직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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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권유 - 시골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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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어떻게 오는가. 장석주 시인에 따르면 "간밤의 노름판에서 판돈을 몽땅 털리고 터덜거리며 돌아오는 탕자의 빈 가슴에 쌓이는 상심처럼" 온다. 12월이 그러한데 하물며 삼십대의 첫 12월은... 판돈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빚더미에 올라앉은 기분이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온통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들 투성이고. 이곳 서재에 소꿉질처럼 써 놓은 걸 다시 읽어보면 이 얄팍한 기웃거림의 기록이 다 무어냐 싶다. 그러나 아무튼, 시인의 글은 탄식마저도 화려하고 낭만적이다. 여전히 미모를 간직한, 때로는 소녀스러운, 그러면서도 원숙한 여배우 같은 문장들. 미문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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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2012.12
우먼센스 편집부 엮음 / 서울문화사(잡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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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으로 들어있는 내년도 가계부가 실하다는 네이버 부녀자들의 극찬에 혹하여 구입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다. 나에게 가계부란 가계가 도무지 수습이 되질 않는 상황에 대한 알리바이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일단 가계부가 생기니 적이 안심이 된다. 짧은 식견으로 판단해 보건대 주부 잡지의 탐구 주제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인간사의 드라마틱한 비밀과 미스터리를 추적하거나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환상적인 의식주를 보여주거나. 파헤치고 파헤쳐도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비밀과 환상 사이 그 어디쯤에서 매달 잡지 부록을 저울질하며 방황하고 있는 여인네가 비단 나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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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의 집
김남주 지음 / 그책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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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위화감을 조성한다느니 가진 자의 삶을 전시한다느니 투덜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는 바로 그 위화감을 느끼기 위해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이니까 말이다. 위장이 고생할 줄 알면서도 매운 음식을 찾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걸 또 울면서 먹는 사람들처럼. 차라리 이 책에서는 김남주가 '뭘 샀는지' 보다는 '어떻게 샀는지'를 눈여겨보는 게 낫겠다. 어차피 그녀가 구입한 고가의 물건을 우리도 똑같이 장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평소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충분한 안목을 쌓은 뒤에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최적의 물건을 장만하는 수집가형 소비 자세만큼은 배워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배우는 마음에 든 물건을 참으로 끈기와 인내와 정성을 다 바쳐 구입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몹시 긍지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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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깊이 읽기 왕실문화 기획총서 3
김동욱.유홍준 외 지음, 국립고궁박물관 엮음 / 글항아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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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여덟 번 째 꼭지 <조선의 서울 자리를 겨루다>에서 글쓴이는 조선시대의 풍수를 ‘문화적 코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문화적 코드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규약 체계라고 할 수도 있고, 인식론적 프레임 혹은 사유 체계의 토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글쓴이가 소개하고 있는 것이 조선의 지방 고을의 산세를 그려놓은 18~19세기 무렵의 고지도들이다. 모든 고을이 하나같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갖추어진 전형적인 ‘명당’풍으로 그려져 있지만, 흥미롭게도 이들의 실제 지형은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풍수학적 관점을 고려하여 살펴본다 하더라도 그다지 명당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의 지도 읽기 잣대로 평가하면 조선 시대의 지도들은 현실을 상당 부분 왜곡한 부정확한 지도라는 것이다.

 

현대인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무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전국의 모든 산세에서 즉각적으로 왼쪽과 같은 식의 패턴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렌즈를 착용하고 자연세계를 바라봤으며, 그들만의 인식론적 프레임 속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을 인식했다. 고지도는 바로 그 정직한 인식의 기록인 셈이다. (왼쪽은 이 책 375쪽에 실린, 1872년경의 석성현을 그린 지방도)

 

조선 건국 당시 풍수는 수도를 결정하는 데 주요한 코드로 작용한다. 글쓴이는 이때의 풍수가 “본질론적 차원의 절대적 명당을 전제하는 풍수라기보다는 장소 의미를 구성하는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서울의 풍수가 ‘절대적으로 명당’이어서 수도로 확정된 게 아니라, 다양한 권력 의지들이 풍수 담론의 언표들을 둘러쓰고 수면 위로 부상하여 엎치락뒤치락한 결과 최종적으로 서울이 수도로 확정된 거라고. 무정형으로 부글대던 권력 의지들이 풍수 담론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하게 언어화되어 풍수의 이름 아래 경합하게 되었다고. 하나의 ‘언어’로서의 풍수. 하나의 ‘게임 룰’로서의 풍수. ‘때마침’ 풍수였지, ‘반드시’ 풍수일 필요는 없었던 셈이다. 의미를 관철하기 위해 풍수는 (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풍수는 언제부터 미신이 되었을까. '풍수학자'는 언제부터 더 이상 '지리학자'가 아니게 되었던 걸까. 우리는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풍수를 버리고 풍수 아닌 다른 인식의 프레임으로 갈아타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새로운 언어게임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 환승의 지점은 어디쯤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 과정 속에서, 어떤 사건의 펼쳐짐 속에서 그러한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새로운 프레임은 세계를 어떻게 재편했고, 그 구체적 동역학은 어떠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국인의 지리적 공간적 사유에 있어서의 역사적 단절의 지점 및 그 계면에서 발생했을 사태들에 관해서 기회가 닿으면 좀 더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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