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슈만 : 피아노 협주곡, 서주와 알레그로 아파시오나토, 노벨레테, 토카타 & 숲의 정경 - DG Originals
슈만 (Robert Schumann) 작곡, Witold Rowicki 외 지휘, 스비아토 / DG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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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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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물음에도 실상은 두 가지 차원의 문제가 섞여 있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특정한 노동자의 노동 능력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다. 대개 집과 학교에서 학습과 사회화를 거쳐 개별 노동자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숙련(skill)이 만들어진다. (...)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노동자의 ‘노동자됨’, 또는 ‘노동자다움’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다. (...) ‘노동자다움’이 무엇인지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회가 주어진 시점에서 요구하는 ‘노동자다움’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것을 잘 만족시키는 사람은 취업을 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취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 개인적 차원에만 집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차원을 완성시키는 부수적 효과를 빚어낸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이유를 내 능력이 부족하거나 내가 게으른 탓으로 돌리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자다움’의 내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다운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에 대해 사회가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 즉 개인의 몸과 마음에 대해 작용하는 권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사회가 ‘노동자다움’을 규정짓고 설명하는 말들, 이른바 담론(discourse)의 체계를 통해서 완성된다. (...) 말하자면 자기착취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1960~70년대에는 대통령이나 기업주를 아버지로 국민이나 종업원을 자녀로 은유하는 가부장주의(paternalism)였다면,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는 국가경쟁력 또는 개인의 역량 강화라는 명제였다. 조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온갖 고생을 감내했던 ‘산업전사’나 ‘수출역군’은 이제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나 ‘좋은 인적자본의 소유자’로 거듭나야 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형태로 간주되었던 ‘이타심’이나 ‘협력’은 이제 그 거추장스러운 위장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개인과 가족의 경쟁력 안에 ‘이타심’이나 ‘협력’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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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명이 한 날 한 시에 모여 치르는 수학능력시험의 점수를 철저하게 서열화한 대학에 진학하는 근거로 삼는다.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직장에서조차 신입사원을 뽑을 때 토익점수를 선발 기준으로 삼는다. 이는 모두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통제하기 쉬운 사람을 뽑는다는 같은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셈이다. 영어 능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토익이라는 정형화한 형태의 시험을 준비하는 지겨운 과정을 효과적으로 견뎌낸 사람을 선발함으로써 노동력을 길들이는 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만약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그 지겨움을 잘 견뎌냄으로써 토익 점수가 변별력을 잃게 된다면? 다시 새로운 기준이 고안될 것이다. 결국 노동력이 만들어지는 첫 과정, 그것은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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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경제적 거래가 가지는 인적 속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물적 속성 사이의 관계, 계약관계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보다는 물 대 물, 성문화한 명시적 조항들로 규정할 수 있는 계약만이 문제가 되는 세상으로 변화한다. 앞서 ‘관계에서 거래로’라고 말한 변화다. 이에 더해 이제 ‘일’ 자체가 익명화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환원할 수 없는 개별성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OO아빠’에서 ‘OO호 아저씨’로, 그리고 다시 ‘출입카드 소지자’로의 변화다. 고용관계가 아웃소싱이라는 거래관계로 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누가 고용주고 누가 고용된 노동자인지도 불분명해진다. (...)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다른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익명성이 깨지는 것조차도 자본의 논리가 필요로 할 때라는 사실이다. 생산 담당자나 최종 검수자의 이름을 표기한 제품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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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생계비라는 측면보다는 그때그때 일한 대가라는 관점이 강화되는 흐름은 고용의 형태가 유연해진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일 자를지도 모를 노동자에게 생계비라는 개념으로 임금을 지불하고 싶은 고용주는 없기 때문이다.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기도 한다. 그때그때 한 일에 대해 그때그때 대가를 지불하였으므로 갑자기 해고를 하더라도 도덕적 부채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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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로널드 코즈는 기업을 시장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실은 마르크스가 오래 전에 이미 그러한 개념을 이해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이라는 제도를 통해 움직여나가는 사회다. 그리고 시장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끼리 교환한다는 원리로 운영된다. 그런데 시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인 기업 내부에는 시장 원리가 아니라 지휘와 통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마치 군대나 관료 조직에서 상급자가 결정하여 명령하면 하급자는 그에 복종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일대일의 계약 관계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고용주는 피고용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피고용자는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더구나 기업은 이른바 ‘going concern',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조직이므로 명령과 복종의 관계는 반복된다. 이렇듯 권력 관계가 반복해서 작동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종의 신분적 위계는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 외관상 형태만 부드럽게 바뀔 뿐 권력이 행사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변화없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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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화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심지어 자녀 양육에서까지 나타나는 국제적 사슬(chain) 관계를 강조한다. 예를 들면 로스앤젤리스에 사는 백인 중산층의 아기는 영어에 능통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필리핀 마닐라 출신의 이멜다(이름이야 무엇인들)가 돌본다. 그렇게 번 돈이 마닐라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된다. 그 돈 중 일부는 이멜다의 아이를 돌보는 시골 출신 보모에게 수당으로 지급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하는 ‘장거리 사랑’의 한 가지 형식이 이렇게 탄생한다. 한국에서도 중산층 맞벌이 부부의 입주 베이비시터는 대부분 가족을 두고 떠나온 조선족 중장년 여성이다. 이것은 이른바 생산의 글로벌 가치사슬 구조와 같다. 즉 말레이시아에서 만들어진 부품으로 중국에서 조립된 완제품을 한국 회사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구조다. / 사실 이러한 구조는 이멜다나 조선족 여성에게 경제적으로는 분명히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 사회의 신분 구조라 할 영주와 하인 관계가 변형된 모습을 한 채 글로벌한 규모로 다시 등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상적인 가족 형태에서 어머니가 담당하던 돌봄노동은 가난한 나라에서 이주해온 여성 노동자의 몫으로 바뀐다. 울리히 벡은 이를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가 이제는 부엌과 아이 방으로까지 들어온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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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체성과 소비자 정체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 충돌은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하다. 이를테면 노동자로서 나는 열악한 작업 조건과 불안정한 일자리로 고통받는 대형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 ‘마트 안 가기 운동’을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대다수 노동자가 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연대를 시도한다면 불합리한 구조는 바꾸지 못한 채 소비자로서의 합리적 소비와 효용 극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결과만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연대를 포기하는 것이 이득이다. 다른 노동자들도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결국 플리트우드가 지적했듯이 이런 ‘나’들의 태도와 행동이 모여 집합적으로 다른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해로운 작업 조건을 유발하게 된다.”

 

“인건비가 궁극적으로 기업이 시장에서 소비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구매력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되었다. 상품을 동료 자본가에게만 팔 수는 없다.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가 사주지 않으면 생산한 제품을 제대로 판매할 수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자본가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사는 노동자에게 충분한 구매력이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개별 자본자 처지에서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자신은 임금을 적게 지급해 비용을 절약하고, 동료 자본가는 임금을 많이 지급해 시장에서 노동자가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게 되는 상태다. 모든 자본가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서로 눈치만 보면서 임금을 적게 지급하려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 역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이다. 자본가 A와 자본가 B가 모두 저임금 전략을 추구하면 경제 전체적으로는 노동자에 대한 지나친 착취와 함께 유효수요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동시에 자백한 두 명의 용의자가 모두 무거운 죄를 받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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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한국사회 -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박인석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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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세대 주택이냐 단독주택이냐 아파트냐. 새로운 가족과 함께 할 주거형태를 두고 여전히 저울질 중인 상황에서 이 책은, 주거문화 회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는 그 취지가 무색하게도 퍽이나 나쁘게(?) 읽힌다. 왜 아파트로 가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표가 명백해진 까닭이다. “기반시설이 허약한 도시 공간을 사유(私有) 기반시설을 갖춘 자족적 아파트 단지들로 분절 격리하고 이를 개인이 구매하도록 하는 전략”(34)을 통해 공공투자를 최소화하면서도 중간계층의 증가하는 공간 욕구를 충족시켜온 것이 저간의 한국 도시주택개발정책의 역사라면, 열심히 구매력을 길러 열악한 도시 공공공간 환경이라는 사막 속에 자리 잡은 사설(私設) 오아시스인 아파트 단지”(24)로 진입해야 하겠다는 결심은 차라리 절박한 어떤 것이 된다.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공적 차원의 영역을 시장과 개인에게 내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오늘의 교육 현실과 아파트 문제를 동일선 상에 놓는다. 교육 문제에 통감하고 교육계의 변화를 바란다면 나부터 내 자식을 사교육 시장에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공공영역에 대한 시민적 책임의식을 가진 개인이 할 수 있는 개혁적 실천이 있다면 제일 먼저 아파트에 안 사는 것이겠다. 그러나 과연 내게 조금이라도 경제적 여력이 생길 때 내 자식 사교육을 안 시킬 수 있을까. 아파트에 안 살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용기와 신념과 배짱이 있지 않고서야. 여담이지만 결혼은 확실히, 인간을 한층 더 보수화시키는 것 같다. 미래에 관한 여러 가지 구상이 내 가족을 염두에 두는 순간 점점 더 안전 지향적으로, 소시민적 가족주의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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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특별 보급판 세트 - 전9권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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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가슴 저미는 드라마 본 소감 치고는 불경한 얘기일 수도 있겠으나 드라마 보면서 다시금 통감한다. 일이란 얼마나, 사랑해야 하면서도 또한 사랑할 수 없는 그 무엇이냐. 일이란 자기존재증명의 수단이면서 또한 얼마나 고되고 천하고 슬프고 노예적인 것이냐. 일이 주는 고난과 시련이 인간을 보다 겸허하고 원숙하게 만들어줄 지라도 오로지 그러한 효과 때문에 일을 긍정한다는 건 노예의 마조히즘적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리라.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애증의 대상일지언정.

 

드라마 보면서 결심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는 점은, 무슨 궁리를 써서라도 일을 되도록 적게 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설계해 나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일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자본과 대지를 소유하는 것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가장 확실한 길일 것이나 그것이 어렵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게 차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불가능하다면, 일을 단순히 일 이상의 의미를 갖는, 내재적 합목적성을 가지는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격상시켜서 더 이상 일을 일이 아니게 만드는 방법이 있겠다. 어떻게? 

 

①일을 인식하는 내 정신 상태를 개조한다. 즉, 일에 대한 인식의 프레임을 바꾼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기계발이데올로기를 자발적으로 내면화시켜서 정신승리법으로 일을 일이 아니게 만들어버린다 ㅜ_ㅜ;;; ②일 자체를 바꾼다. 일을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키거나 노동요처럼 일에 유희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일의 속성을 변화시킨다. 근무 중에는 ①과 ②를 병행하다가 퇴근하고 나면 최소 두 시간 이상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에 매진하면서 피폐해진 영혼을 달래는 복합적 방안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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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근무 환경이 업무 강도의 측면에 있어서나 급여 수준에 있어서나 이제까지 내가 겪어본 것 중에서는 객관적으로 가장 나은 편이 아닌가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직업 자체로는 무슨 조건으로 일을 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거 같다는 확신이 든다. 뭔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해지네."

"완전히 다른 길을 찾기보다는 근무 시간을 조정해보는 게 어떨까.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은데. 극단적 혁명이 아니라 수정주의적 조율로..."

(...)

"그래 사실 근본적으로 직장 생활이라는 건 정말 사육 당하는 돼지의 삶에 다름 아니야. 감옥이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내면화하게 되는 어떤 세계관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일이란 인간의 천형이며 인생은 출구 없는 감방이고 세계는 절망으로 가득찬 지옥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점점 더 자꾸만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을 가진 철학자들 책을 찾게 되는 것 같아."

(...)

"어쩌면 처음부터 창문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 애초에 창문이라는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행복한지도 몰라. 창문 너머 들판을 봐버린 것이 내 고통의 시작인지도."

(...)

"<프레카리아트>라는 책 한 번 읽어봐. 일본 젊은이들의 실태를 쓴 책인데, 불안정한 노동이 어떻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보게 되네."

"재밌겠는데. 어떤 자율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일본에서 출현한 그 프리터라는 신종 노동 형태에서 발견하기도 하던데, 그러나 내가 직접 프리터로 살아본 바로는 21세기 프리터도 19세기 프롤레타리아 못지 않게 미래가 안 보이는 암담한 인생 같더구만."

(...)

"그리고 난 아직 애도 안 낳았지만 벌써부터 뭐가 걱정이냐면, 이 모든 직업적 고민=존재론적 고민=자유와 행복을 찾기 위한 고민의 방점을 자식으로 찍어버리는 것- 그래서 오로지 애를 키우기 위해, 그러니까 유전자 보존과 개체 번식이라는 지극히 생물학적 본성에 충실한 나머지 자진하여 감옥에 입소해 스스로 뇌를 제거해버리고 기꺼이 체제의 관리에 따르는 한 마리 양순한 가축이 되어버릴까봐, 좀비가 되어버릴까봐 그게 벌써부터 걱정이 돼. 그래서 난 <모성애의 발견>이랑 <어머니의 탄생> 막 이런 책들을 벌써부터 사놨어. 나중에 태어날 내 자식한테 쉽게 매혹당하지 않기 위한 자기최면으로다가. 자식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니까 면역력을 보강하기 위한 일종의 지적 백신으로서 벌써부터 미리 몇 권을 쟁여놨다고. 그 책 보면서 최소한이나마 자식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

"주위 여자들을 보면 확실히 애한테 빠져버리는 순간 인생 훅 가는 듯. 대부분의 향락은 시효가 지나면 대체로 빠져나오기 마련인데 애한테 빠지는 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더라. 자식이야말로 종교에 육박하는 블랙홀인 거 같다-_-;;;; 종교든 자식이든 치명적인 외간남자든 돈이든 뭐든 뭘 만나도 끝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으면서,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거 같아."

(...)

"남편이든 아이든 사회 자체든 나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면서 특정 지위를 명명하고 역할을 기대하는 그 어떤 대상에게도 절대로 함부로 간이고 쓸개고 영혼이고 모조리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또한 그 모두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적당히 발란스를 맞추면서 어떻게 살아나갈 건가 하는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해봐야 할 듯. 확실히, 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 부양의 한 축을 담당하는 누군가의 아내라는 정체성, 그리고 훗날 누군가의 엄마라는 정체성... 이런 여러가지 다양한 외적인 자기 정체성들과 내밀한 개인적 자아를 서로 반목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한 다양한 역할 또한 나에게 명백히 성취감과 즐거움을 주고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니까. 아무튼 내가 관계 맺는 세계와 조화롭게 상생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의 고유성을 심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적으로 추구해나가는 그 절묘한 방법과 기술을 모색해나갈 필요가 있는 듯."

"그래 그걸 깨달아나가는 게 성숙의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 

"남편을 보면, 남편한테는 일이 정말로 삶의 의미거든. 직장인으로서는 드문 경우겠지만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그 분야의 일을 진심으로 좋아해왔고 지금도 자기 일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근데 이 엿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무섭도록 효율적이고도 잔혹한 게,? 니가 그 일을 좋아한다고? 어어 그래 너 그 일 정말 좋아한댔지? 그럼 졸라 죽을 때까지 해봐.’ 이런다. 자본의 시스템이 남편을 이렇게 겁박하고 착취한다고. 그니까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도 이 체제가 결국에는 개인을 최종적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든단 말이야. 근데 내가 옆에서 남편을 보면 남편도 그 안에서 여차저차해서 자기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게 보여. 내가 남편 보면서 느낀 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든 그게 아니든 간에 누구나 사회의 겁박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거 같고, 때문에 자기소외를 겪지 않을 만큼의 지점을, 각자의 고유한 자기균형점을 잘 찾아나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 것 같아. 나중에 애 생기고 나서 더욱 더 집 문제, 교육비 문제로 허덕이고 그러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기꺼이 정신적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노동을 자처하게 되는 서글프고도 기막힌 상황에 봉착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하루하루 나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아. 결코 좀비가 되어서는 안 될 거 같아."

(...)

"가능하기만 하다면, 오로지 전적으로 창작 활동으로만 생계를 해결하는 삶이 가장 이상적일 텐데."

"그렇지. 나도 자식 낳으면 정말이지 돈도 벌면서 창작하는 직업을 갖도록 세뇌시키려고. 매뉴얼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행정직이나 기술기능직 쪽으로는 절대로 못 가게 하려고. <어머니의 탄생> 같은 책을 정신적 백신이라면서 벌써부터 장만해서 책장에 꽂아두어 놓고서는 또 한편으로 이런 정신분열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나도 참 딱하지만, 일단 내가 생각해놓은 직업은 피디랑 기자야. 창조적으로 글쓰고 프로그램 만들면서도 잉여가 아니잖아.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서 뚜렷한 직능을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와 불화하지 않고 상생해서 돈을 벌잖아."

"기자도 창작하는 직업은 좀 아니지 않나-_-;;;"

"그래도 글을 쓸 수 있는 삶이 너무 부러워. 글 쓰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이... 윗선 눈치 보느라 글을 내맘대로 쓰지 못한다는 그런 푸념마저도 부럽다고. 배부른 고민으로 들린다고. 그런데 아직 애도 안 낳아놓고 벌써부터 내 욕망을 미래의 자식에게 투사하기 시작하는 나도 참 별 수 없네-_-;;; 엄마의 욕망, 이게 진짜 무서운 거 같다. 프링글스도 아니고 정말이지 멈출 수가 없네."

 

*

 

친구와 간밤에 카톡으로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비록 사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어서 이곳에 일부 옮겨본다. 간밤의 이런 이야기에 비하면 내가 그간 서재에 끄적여둔 영화 리뷰며 현학적인 책에 대한 요약문 따위는 도무지 삶의 주변만을 에두르는, 삶의 변죽만을 울려대는, 등 따숩던 호시절의 허영스런 소꿉질 밖에 안 되는 것이다. 팔불출 같지만 친구 자랑을 좀 하자면 카톡 주고받은 이 친구는 스무 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당선 소감문이 당선 작품보다 더 근사하게 읽힌다

 

어린 나이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에 일찍 지쳐 시들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 영국의 사회제도는 지금의 대한민국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오이디푸스를 동정하고, 줄리엣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늘이 있고 달이 있습니다. 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소리가 있고 쓰레기가 있습니다. 낙엽이 있고 택배 배달 아저씨도 있습니다. 지하철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우정이 있고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김광섭 시인의 말마따나,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지금 창밖에는 아무래도 추운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 제가 사랑하는 사람, 저를 고마워하는 사람, 제가 고마워하는 사람, 저를 미워하는 사람, 제가 미워했던 사람, 저를 원망하는 사람, 제가 원망했던 사람, 저를 싫어하는 사람, 제가 싫어했던 사람,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어떻게든 마주쳤던 사람들, 오늘 아침 버스에서 본 해해 웃으셨던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제가 미처 만나지 못했던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모두들 행복한 한 해, 더 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그러길 바랍니다.

 

두 번째 문장이 유독 아프다.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쓸 줄 아는 내 예쁜 친구가 정말로, 젊은 날에 일찍 지쳐 시들어버리지 않길. 마찬가지로 나도 당신도 그러하길. 시들지 않으려면 친구의 말마따나 노력을 해야한다. 집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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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14-12-1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참 감사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수양 2014-12-18 18:4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한 일이지요... 이 친구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 예술적 재능... 이런 것들이 활짝 꽃피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늘 응원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면... 등단하기도 쉽지 않지만 등단하고 나서도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꼼쥐 2014-12-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에게 일이 삶의 의미라기보다는 일이 없어지는 순간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죠.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을 것만 같은 불안감, 그런 게 있는 거죠.

2014 서재의 달인이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수양 2014-12-22 07:51   좋아요 0 | URL
꼼쥐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너무너무나요!! 벽에 가만히 귀를 갖다대고 있으면 옆방에서 나직이 말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것만으로도 따스한 위안이 됩니다. 온기를 느낍니다. 어쩌면 그 온기로 올해도 살았던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계속 이곳 알라딘에서 동고동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01-21 0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2 0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