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사주 보는 일에 빠져 있었다. 조물주의 섭리에 의해 저마다의 인생에 매뉴얼 같은 게 마련되어있다는 사실이 두렵고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의지라는 것이 거대한 주형틀 안에서의 부질없는 발버둥일 뿐인가 싶어 허탈하고 슬펐다. 젊은 시절 관상학에 심취했다가 자신의 관상이 형편없음을 알고 공부를 작파해버렸다는 백범 선생의 일화도 떠오르고, 목숨을 위해 친자를 버렸으나 결국 신탁을 거스르지 못한 테베의 왕도 생각났다.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의 숨결이 자신의 삶 전체를 서늘하게 관통하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언젠가 <소립자 샤워>라는 제목의 실험 그래프를 본 적이 있다. 방사능에 노출된 원자로부터 뿜어져 나온 소립자들의 자취를 기록한 그래프였다. 거기서 소립자들은 순간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저마다 즉흥적인 행로로 뻗어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지만 조금 떨어져 실눈을 뜨고 바라보면 그 흐릿한 형상이 흡사 꽃이 피어나는 장면 같았다. 아름다워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처럼 나도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신이 유미주의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두려움과 무력감의 정점에서 난데없이 소립자 곡선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내가 그 그래프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인간사라는 것도 소립자 곡선 같은 게 아닐까. 방향이나 경향성을 부여하는 것은 신이지만, 구체적 궤적이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 의지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자는 통계를 내어 도식화할 수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소립자의 운동처럼 오묘해서 명이 다할 때까지 변화무쌍하게 요동치기 때문이다. 신이 섭리와 질서를 창조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신이 코스모스를 주관할 때 인간은 제 삶의 카오스를 주관하는 것이다. 이것이 며칠간 사주를 탐구한 끝에 내가 얻은 잠정적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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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결코 발설되지 않는다. 그해 겨울, 염습한 할머니 시신 앞에서 아빠가 안경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후 우리 가족이 그 일에 대해 어떠한 후일담도 나누지 않는 것처럼. 그런 것들은 모두 저마다의 틈 속에 은폐될 뿐이다. 그때 흘렸던 아빠의 눈물도 여전히 아빠의 틈 속에 조용히 고여 있을 것이다.

아빠가 시시껄렁한 시비를 걸어와 나를 괴롭힐 때 화를 참는 신속한 방법은 아빠의 틈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빠의 틈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스산해지면서 말대꾸할 기운이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 나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가늘고 깊은 틈이 있어서, 종종 그 안에 짠하고 허허로운 것들이 석류알처럼 박혀있는 상상을 한다. 그것은 모두 우주가 끝날 때까지 비밀로 남을 것들이다. 이야기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볍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결코 발설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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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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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일생의 세부적인 부분들을 모두 인용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책 읽기를 소중한 요소로 삼았다고 고백하며 이런 말을 적고 있다. “본래 말이란 타인의 것이다ㅡ 이러한 단언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면, 적어도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ㅡ. 말의 바다의 공유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랑그’는 생각할 수도 없고, 개인에 의한 구체적인 발어로서의 ‘파롤’도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오에는 타인의 말에 중독됨으로써 자신이 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경지(그래서 자신의 대부분이 타인의 것으로 ‘인용’되어질 수 있는 경지), 심지어는 자신이(또는 자신의 문체가) 완전히 그 사람의 것(또는 그 사람의 문체)으로 잠식되어버리는 경지까지도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다. 

오에 자신도 소설을 쓰는 내내 3년을 단위로 하여 탐독의 대상을 교체해 왔다고 하면서 그의 경우에는 대상이 블레이크, 단테, 사르트르, 엘리엇 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에는 탐독의 대상이 교체되면서 정서의 기조라든지 소설 문체상에 변화가 오는 점에 대해서도 별다른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는데, 타인의 문체에 영향 받는 것을 의식적으로 기피하던 나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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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비밀일기 - 1910 7.29 ~ 10.2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항재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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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인류로부터 성자로 추앙받던 한 인간의 가정생활은 그가 운명을 달리하는 순간까지도 참혹한 아수라였다. 이토록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의 비밀 일기장은 온통 아내에 대한 증오와 혐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자기 다짐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사상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아내와 끝없는 불화를 겪으며 죽을 때까지도 오욕칠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온 세계에 사랑을 천명했으나 결코 자신은 사랑으로 평화롭지 못했던 비운의 성자 톨스토이. 누구나 원대한 이상과 추잡한 현실 사이에서 번뇌와 고통을 겪기 마련이겠지만 톨스토이만큼 그 간격이 컸던 이도 드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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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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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생애가 유독 흥미롭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세계 만방에 평화와 사랑, 인류애, 형제애를 천명하면서 내적으로는 극도의 자기 절제와 자기 재판, 자기 검열을 반복했던 사람이었다. 안과 밖으로 모두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책 관련해서 친구와 나눴던 채팅을 요약하는 것으로 리뷰를 갈음한다. 

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를 읽고 톨스토이가 남긴 일기에 관심이 생겨서 어제 학교 가서 톨스토이의 일기를 빌렸다.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보다도 톨스토이라는 사람 자체에 더 관심이 간다. 톨스토이는 확실히 나와 비슷한 인간형인 것 같다. 물론 그 사람은 거장이고 나는 한갓 필부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친: 그 책에서 톨스토이는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나?
나: 그는 굉장한 이상주의자였다. 대외적으로는 작품을 통해 세계 만방에 평화와 사랑, 인류애, 형제애를 천명했지만 내적으로는 극도의 자기 검열과 자기 재판을 반복했던 사람이었다. 가혹하리만큼. 스스로를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채찍질했던 사람이다.
친: 빡센 인생을 살았겠군.
나: 난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뭐랄까, 나 역시 이상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 간에 끝없이 어떤 괴리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톨스토이의 고통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츠바이크의 책에서는 톨스토이의 일기가 자주 인용되는데 스스로를 너무나 자학하는 듯한 그의 일기에 기가 찬다. 
친: 어떤 이야기가 있길래?
나: 12시부터 2시까지 비기체프와 보냄. 너무 거리낌 없이 말함.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기만적이었음. 2시부터 4시까지 운동. 지구력과 인내력 부족. 4시부터 6시까지 식사, 불필요한 것들을 사들임. 집에 와서는 글을 쓰지 않았음. 게을렀음. 볼콘스키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음. 거기 가서 거의 말을 하지 않음. 비겁함. 옳지 못한 행동을 함. 비겁함, 자만심, 경솔함, 나약함, 게으름.
친: 장난아닌데.
나: 츠바이크는 톨스토이가 소설을 통해서 굉장히 이상적인 사상을 이야기했으면서도 스스로가 일상에서는 그러한 이상을 따르지 못해서 내심 고통받았던 점을 무척 위대하게 묘사하면서 참으로 인간적인 인간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카사노바랑 스탕달은 별로 매력을 못 느끼겠지만 이 톨스토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참 흥미를 느꼈어.
친: 그런데 츠바이크는, 톨스토이를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놓은 이유를 뭐라고 했지?
나: 왜 세명을 한데 묶었냐면, 모두 일생의 많은 부분은 자기묘사에 할애했던 사람들이거든. 소설이나 일기를 매개로 하여 자기 묘사를 보여준 사람들인데 그 질적 수준이 카사노바에서 스탕달, 스탕달에서 톨스토이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거야. 카사노바는 자기 보고, 스탕달은 자기 관찰, 톨스토이는 자기 재판에 가깝지. 그런 점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반성하게 된 책이기도 해. 나 역시 지금은 카사노바에 가까운 것 같아.
친: 그런데 너는 스탕달의 자기 묘사가 자기관찰의 수준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그게 어떤 것인지?
나: 사실 스탕달의 경우를 자기관찰이라고 하긴 했는데 잘은 모르겠다. 카사노바와 톨스토이의 중간적 단계 정도인 것 같긴 한데, 스탕달이 자기 기만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카사노바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기만을 의도하는 어떤 장치조차 없이 그저 천진난만하고 생각없이 자기를 기술한 게 카사노바였고, 최소한의 어떤 자아상 같은 게 있어서 거기에다 맞추어 자기를 윤색했던 게 스탕달인 것 같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모든 저열한 차원을 뛰어넘은 사람이고.
친: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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