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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마법의 사중주 ㅣ 클리나멘 총서 1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5년 11월
평점 :
이 책은 근대 화폐 시스템의 형성과 발달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 현상으로서 접근할 것을 요청한다. 요컨대 화폐란 역사적 형성물이자 하나의 사회적 배치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 저자는 근대적 화폐의 출현을 다양한 요소들이 특정한 시간 속에서 서로 맞물려 발생한 ‘근대적 화폐구성체’라는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요소들로 ①시장, ②국가, ③사회, ④과학이라는 네 가지 영역을 지목한다.
①시장(=화폐거래네트워크): 국내교역과 대외교역의 구분은 해소되고, 전국적 차원에서의 수평적 통합성(전국을 연결한 네트워크의 구축)과 계층적 차원에서의 수직적 통합성(기층 민중의 화폐경제로의 통합)을 갖춘 동질적인 화폐거래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②국가(=화폐주권): 영토국가는 전쟁과 사치, 행정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공채 등을 매개로 하여 대외적 화폐네트워크를 포획했다. 화폐거래네트워크에서 화폐가 상품으로서 혹은 상품의 매개자로서 전국을 순환했다면, 화폐주권에서 화폐는 징세라든가 하는 '명령'으로서 전국을 순환했다. 전국적 행정체제의 발전, 조세 체계의 통합, 중앙은행의 설립, 국민통화의 발행과 더불어 사회계약론이 대두하고 이같은 변화 속에서 출현한 19세기 국민국가는 매끄러운 화폐주권의 공간이 탄생하였음을 의미한다.
③사회(=화폐공동체): 화폐공동체로서의 사회란 근대 이전의 특수 공동체들이 해체된 결과이다. 화폐는 특수 공동체들과 공존하는 또 다른 특수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특수 공동체들의 해체를 전제하는 일반 공동체이다. 교환의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는 모든 차이들을 해소하는 동일자다. 사회적 교환이 내포하는 여러가지 빛깔의 다양한 의미들을 일거에 퇴색시켜버리는 화폐라는 동일자의 무지막지한 습격 속에서 증여와 호혜의 경제로 순환하던 기존의 전통적 공동체는 빠르게 붕괴, 몰락했다.
④과학(=화폐인식론): 근대 화폐론은 대체로 화폐와 부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화폐는 16세기에는 그 자체로 부이면서 부의 척도로 간주되었고(거울), 17~18세기에는 부의 표상으로 간주되었으며(혈액), 19세기에는 부의 생산수단으로 강조되었다(생물).
근대 시장의 형성, 근대 주권의 형성, 근대 사회의 형성, 부에 관한 과학적 담론의 대두. 이들의 우연적이고도 입체적인 상호 맞물림 속에서 근대화폐가 출현했기 때문에 화폐의 의미는 위의 각 요소들에 정확히 상응한다. 즉 화폐는 ①상품 혹은 교환의 매체이며 ②국가가 개인을 포획하고 관리하는 권력 장치임과 동시에 ③사회적 유대 내지는 이해관계의 수단이기도 하고 ④그 자체로 부나 가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부'로서의 화폐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상품으로, 권력으로, 관계로의 전환가능성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최근 비트코인이라는 디지털화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화폐의 역사에 대한 좀 더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해 읽게 되었다. 근대 화폐가 형성되는 과정을 다룬 이 책은 동시에 '호모 머니쿠스'로서의 우리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고고학적/계보학적 연구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책을 읽어보면 역시 IT기술이야말로 국가를 탈주하는 새로운 화폐 흐름을 촉발함으로써 기존의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교란시키는, 그리하여 수세기를 걸쳐 견고해져온 화폐구성체제에 갑작스런 흠집을 내는, 놀라운 파문을 일으키는 제5의 새로운 화폐구성체 요소 같단 생각이 확고해진다.
이 책을 통해 16세기 이래로 지속되어온 화폐를 둘러싼 세계 변화상을 통시적으로 일람해볼 때, 만약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화폐가 촉매가 되어 기존의 국가체제가 분열하게 된다면 그 시기는 (즉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예견한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은) 빨라도 22~23세기 무렵은 되어야지 않을까 싶고, 그러한 변동이 2~3세기는 족히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비트코인 사놔봤자 살아생전에 비트코인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건 그저 소꿉장난 수준이고 비트코인의 진정한 가치는 내 증손자의 증손자의 증손자 때에나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