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주체 -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브루스 핑크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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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핑크는 구조주의 너머에 있는 '라캉의 주체'를 모색하기 위해 일단 라캉 이론에서 '구조의 층위'(기표 사슬의 자동적 작용의 층위)와 '원인 작용의 층위'를 구별한다. 그리고는 이 책 3장까지는 전자에 대해 철저히 살핌으로써 무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주체를 위한 그 어떤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 궁극의 경지로 달려간다.

 

그렇다면 대체 주체의 자리는 어디인가, 주체적인 순간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쯤 저자는 '4장 라캉적 주체'로 넘어가 원인 작용의 층위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상정한 무의식의 주체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슬로건 대로 '프로이트로 돌아간다'. 이 책 4장에서는 라캉이 프로이트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으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상술하고 있는데, 핵심을 추려 이해해보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주체는 운동하지 않는다. 정태적이다. 반면, 라캉의 주체는 프로이트의 주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부단히 '맥동'한다. 애초에 라캉적 주체는 프로이트 식 주체가 뒤집힌 상태에서, 즉 (A∪B)-(A∩B)라고 하는, '존재하는 나'와 '사고하는 나'가 분리된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프로이트 식 주체나 라캉 식 주체나 현상학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로 출현하고 인지되지만 실상 그 둘의 내막에는 차이가 있다.

 

비유를 들면, 조각상 VS 광선 입자의 부단한 운동으로 입체적 상이 맺히는 홀로그램. 혹은 석고로 뜬 구(球) VS 반원 모양의 종이가 축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함으로써 구의 형태를 보여주는 경우. 이런 식의 차이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즉, 라캉의 주체는 프로이트 식 주체와 달리 부단히 획득되어져야 하는 주체이고, 부단히 달성되어져야 하는 주체이고, 부단히 운동되어야지만 하는 주체이다.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주체.

 

5장에서는 ‘소외’와 ‘분리’, 그리고 ‘추가적인 분리’라는 이론적인 개념을 통해, '맥동'으로서 도래하는 라캉적 주체에 대해 보다 세밀하게 살피고 있다. 우선적으로 주체는 언어와 같은 상징 질서로 이루어진 무의식 속에서 소외와 분리를 겪는다.

 

  • 소외: 상징계로의 강제된 진입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한정된 선택지 가운데 어쩔 수 없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 소외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주체는 텅 비어버리고 만다. 즉, 주체는 무수한 담화와 말들에 의해 ‘실존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허울처럼, 그저 ‘자리-보유자’로서, ‘존재 없이’ 남아있는 꼴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오히려 ‘존재의 순수한 가능성을 낳는다’. 왜냐하면 텅 빈 상태가 ‘있다’는 것, 결여의 ‘자리가 있다’는 것은 곧 그러한 공간의 존재론적인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분리: 상상적인 결합 상태로부터의 분리. 타자의 유일한 욕망의 대상이기를 원하지만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상태. 아이의 경우로 말하자면 엄마를 완벽하게 보충하려는, 그래서 엄마의 욕망의 공간을 완전히 독점하려는 시도의 불발. 기표와 기의로 말하자면 그 둘의 영원한 낭만적 합일이 불가능하고 언제나 미끄러짐과 어긋남이 발생하는 상황. 욕구와 요구 사이의 균열과 간극 속에서 욕망이 발생하듯이, ‘분리’로부터는 ‘덧없고 난포착적인 부류’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존재가 발생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대상 a와의 은밀하고도 환상적인 공모관계를 이루고 있는 주이상스 상태의 그 ‘존재’를 말한다.)
  • 제3항의 도입: 분리는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은유되는 제3항의 도입과 함께 이루어진다. 라캉이 보기에 엄마-아이라는 이원적 상황은 잠재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인데, 제3항이 하나의 굄대로서 이 사이에서 기능함으로써 아이가 보호된다. 제3항이 도입되면 이제 어머니의 욕망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의되는 그 무엇이 된다. 즉, 어머니의 욕망이 기표로서 대체된다. 기표화된 어머니의 욕망은 이제 상징계적 질서 속에서 끝없는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존재하는, 영원히 전치가능한, 영원히 변신하고 영원히 달아나는 어떤 것이 된다.

 

제3항의 도입과 함께 분리된 주체는 "타자로부터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여물/상기물에 달라붙음으로써 전체성의 환영을 유지"한다. 다시 말해 "주체는 대상 a에 달라붙음으로써 자신의 분열을 무시"하게 된다. 이 상태가 바로 “$ <> a”의 상태. 이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는, 일종의 자기기만의 상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대상a라는 환상적 보충물에 의해 욕망하는 존재로서 주체 자신이 존재 속에서 '지탱'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 상태에서 주체는 문자 이후의(제3항이 도입된 이후니까) 주이상스 J2를 체험한다. “분리에 의해 가능해진 환상을 통해서만 주체는 라캉이 ‘존재’라고 부는 것의 한 모금을 자기 자신에게 조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a에서 맛보는 주이상스는 일시적이다. 영속적일 수 없다. ‘분리’는 ‘환상 가로지르기’라는 추가적 분리가 일어남으로써 완성되기 때문이다. 추가적 분리라는 것은 정신분석 과정에서는 치료의 목표이자 종결지점이기도 하다. 즉, 분석가는 $<>a라는 병리적인 상태를 헤매고 있는 분석자의 환상의 배치를 뒤흔들어놓고, 그럼으로써 주체가 욕망의 원인(대상a)과 맺고 있었던 기존의 관계를 파열시키고, 관계를 새롭게 변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추가적 분리는 분열된 주체($)가 원인의 자리(a)를 떠맡게 됨으로써 외상적 원인을 주체화하는 과정이다. a를 수용하기. a를 나의 것으로 내면화하기. 어떤 식의 책임지기. 인정하기. 받아들이기. 이러한 추가적 분리로 인해 비로소 “욕망하는 주체”가 탄생한다. (‘그런 일이 내게 어쩌다 일어났어’, ‘그들이 내게 이런 일을 했어’, ‘그 일은 운명처럼 닥쳐왔어’ 등등의 언술로부터 ‘나였어’, ‘내가 했어’, ‘내가 보았어’ 등등의 언술로의 전환)

 

“이 추가적 분리는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되려는, 원인의 자리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되려는 주체의 시간적으로 역설적인 움직임에 있다. 외래적 원인, 주체를 세계에 데리고 온 저 타자적 욕망은 어떤 의미에서 내면화되고, 책임져지고, 떠맡아지고, 주체화되고,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p.127 

 

참으로 아프고 힘겹고 눈물겨운, 그러나 가슴깊이 뭉클한 성숙의 과정이자 극적인 내적 도약의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추가적 분리=환상의 횡단=$가 a자리로 건너간다는 것, 그러니까 외상적 원인을 주체화하고 거기에 책임을 지는 이러한 일련의 작용은 지극히 역설적이며, 사실상 주체로서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외상의 계기들에 대하여 주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어떤 주체적 연루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때, 주체적 연루는 언제나 사후에 발생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의미론적 맥락에 의해 소급적으로 그 연루과정이 구성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주체의 윤리이며 주체화의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 뭔가 복잡한 상념에 잠기게 되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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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Queen - Made In Heaven [2CD Deluxe Edition][2011 Remaster]
퀸 (Queen) 노래 / Island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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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much love will kill you. 정말이지 어떤 고통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너무나 지극해서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얄궂을까. 사랑이 많은 사람의 운명은. 이 노래는 마치 그런 이들을 위한 송가 같다. 가사에는 회한이 배어 있지만 멜로디는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허허롭고도 따스한 달관마저 느껴진다. 심보선 시인의 말처럼, 그 어떤 심오한 빗질의 비결로 노래는 치욕의 내력을 처녀의 댕기머리 풀 듯 이리도 단아하게 펼쳐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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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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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겨울, 일본에서 어느 급진 좌파 학생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비밀 기지를 꾸린다. 이후 두 달 동안 일어난 일은 끔찍했다. 조직원 열두 명이 동료들의 손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 권력 다툼도, 치정극 때문도 아니었다. 혁명가로서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정신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신체를 학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생활 태도가 불량하게 느껴지거나 공동작업에서 실수를 한 동료를 골라내어 영하의 추위에 세워놓고, 밥을 안 주고, 집단 구타하는 식으로 차례차례 죽여 나갔다. 

 

“진정한 혁명가는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 놓여도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원들은 동료의 죽음을 ‘패배사’로 규정했으며, 나약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동료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땅에 묻었다. 희생자 중 누군가는 자신의 나약함을 반성하며 죽여 달라고 애원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지도부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부하들을 제대로 정신무장 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구타에 참여한 조직원들은 “폭력에 참가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죄책감 자체를 뛰어넘어야 할 자신의 정신적인 나약함”으로 여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다고 하나 학생운동조직 멤버들은 대부분 중산층 출신의 고학력자 젊은이들이었으며, 논리적으로 사고할 줄 알고 자기 반성 능력도 뛰어난, 지극히 평범한 정상인들이었다. 심지어 조직의 우두머리는 사건 이후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자기 비판을 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광기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보며 내가 그런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을 만큼 사리 분별을 못하게 된 상태였다거나 상황을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리했던 것이다.” 

 

이성이란 사리에 치우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협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비이성이란 사적인 열정을 대표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불화를 빚어낸다. 보편적이고 공정한 진리의 기준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안녕에 으뜸가는 요소라고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시각은 합리성이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시대에는 물론이고, 합리성이란 자신이 동조할 수 없는 부분에서 살인으로 해결해버릴 만한 배짱도 없는 사람들의 헛된 꿈에 불과하다며 합리성을 경시하고 거절하는 불행한 시대에는 더더욱 지당하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中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러셀의 이런 말도 도무지 허튼 망언처럼 들리고 만다. 숙청은 결코 우발적으로 행해진 광기의 잔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집단구성원들의 민주적인 결정에 의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된 사건이었다. 급박했던 당시 상황 속에서 숙청이 하나의 기이한 유행으로 자리잡게 된 심리적 메커니즘 역시 어떤 고유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폐쇄 사회 안에서 배출되지 못하고 쌓여가는 공격적인 에너지가 바야흐로 임계점에 육박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든 내부적으로 소진시키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융성하게 된 집단적 향유의 극단적 형식이 곧 숙청이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이성은 무엇이고 비이성은 무엇이며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성과 비이성이란 차라리 뫼비우스의 띠의 안팎과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교한 논리 회로를 따라가서 끝내 비이성의 문을 열고 나오는 일이야말로 인류가 반복하는 영원한 희비극이 아닐지. 저자의 말대로 이 사건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떤 사람이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 '멀리'라고 하는 공간적 간격 역시 따지고 보면 주관적인 기준점으로부터 상정되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신체 학대와 고문과 살인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더없이 끔찍한 최악의 행위로 파악하는 현대사회야말로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상태인지 모른다고. 연합적군 사건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서적 반응이야말로 유사 이래 전무후무할 만큼 극도로 생명을 중시하는 기이한 휴머니즘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궤변인가. 하지만 무엇이 비이성인가. 무엇이 광기이며 무엇이 비극인가. 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온 걸까. 어디쯤에서 헤엄치고 있는 걸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헤엄을 칠 뿐이다. 적군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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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모두 이 자리에서 '멀리' 와 있더군요. 여기랑 다른 곳에 가 보면 금방 느껴져요. (그러니까 도시에 있다가 시골에 가 보면. 문명 속에 있다가 인디언들 읽어 보면...등등)

수양 2013-02-24 23:55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종종 일부러라도 '다른 곳에 가보는' 연습을 해야할 것 같아요. 깜짝 놀라기 위해서요.
 

사람마다 궁합이 안 맞는 책이 있을 거다. 막연한 역사적 채무감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못 읽겠는 책. 내게는 이 책이 그랬다. 선악구도가 뚜렷하고 비장하며 엄숙한 데다가 증오와 적의에 가득한 이 책이 나는 좀, 촌스러웠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었다. 정서, 기조, 색채, 뉘앙스, 분위기... 그러니까 선(先)언어적 차원에서의 어찌할 수 없는 구시대성.

 

80년대식 정서에 대해 이렇게 함부로 지껄여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악의적인지 잘 안다. 하지만 어떤 한 가슴 아픈 시대로부터의 완벽한 극복, 깨끗한 작별을 위해서는 일부러 이렇게 함부로 말해버릴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미 돋아난 새살 위에 여전히 말라비틀어진 채로 덜렁대고 있는 거추장스런 피딱지를 무람없이 긁어서 떼어버리듯이.

 

정의와 약자,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이제는 보다 다른 정서로, 그러니까 21세기적인 상상력과 감수성을 가지고 이야기해볼 수는 없을까. 이것이 단지 지난 정권 때 광화문에서 정수리에 물대포 한번 맞아본 적 없는 자의 속편한 소리일까. 하지만 내 세대의 정의라는 것은 비판과 부정 속에서 반대급부로서 고양되는 눈물겨운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롭고 엉뚱하고 진기하고 재미있는 무언가를 좇아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식이라고 믿는다.

 

예전에는 참 열심히 읽었는데, 이제는 이런 책이나 박노자, 김규항 같은 사람들한테 한계를 느낀다. 나의 정치적 좌표가 예전보다 좀 더 우편향되어서 그런가 하면, 결코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의 경제적 처지나 사회적 지위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고, 사회를 대하는 가치관이랄까 사고방식이랄까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 덕분에 오히려 더 급진적으로 변한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단은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유머가 없고 언어에 증오의 핏발이 서려 있다는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는 징후니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면 일단은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 정서적 코드가 달라야 하고, 감각을 수용하는 촉수의 형태가 달라야 한다. 이것은 점진적인 변화로서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전향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촛불 때 내게 제일 멋지고 근사해보였던 사람들은 전방에서 확성기 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전단지 뿌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후방에서 다정하게 참이슬 나눠 마시며 기타치고 북치고 노는 히피 무리들이었다. 난 경직된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유희하는 그들이야말로 혁명의 진정한 전위라는 생각을 했었다. 음, 근데 무슨 이야길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나. 모종의 의무감으로 이 책을 정독하려 했으나 지겨워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길 하려던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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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너머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80
찰스 키핑 글.그림, 박정선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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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해져 가는 오후 제이콥은 커튼 사이로 창밖을 구경하고 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길은 '제이콥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세상'이다. 그 길을 사람들이 '쭈그렁탱이'라고 부르는 노파가 지나간다. 그녀가 키우는 개도 보인다. 그 개는 '비쩍 말라서 뼈다귀에 가죽을 뒤집어쓴 몰골'을 하고 있다. 거리를 청소하는 위레트 씨도 지나간다. 조지도 있다. 과자 가게로 들어가는 조지가 제이콥은 부럽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말 두 마리가 질주해 온다. 양조장에서 뛰쳐나온 모양일까. 사람들이 말을 잡으러 우르르 쫓아 나온다. 제이콥은 궁금하다. "무슨 일일까? 하지만 나는 이층에 있으니까 안전해." 다행히도 마부가 겨우 말을 붙잡아 세운다. 그런데 이때

 

 

개를 꼭 껴안은 쭈그렁탱이가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붉은 장면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쭈그렁탱이 곁으로 모여든다. 심상치 않다. 말이 무슨 짓을 한 걸까. "우리 개가 말하고 싸운 걸 거야. 그래, 분명히 그랬을 거야." 하지만 제이콥의 추측은 억지스럽다. 제이콥은 아마도 마음을 편하게 해두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믿고 싶은가보다. 이제 곧 엄마가 차를 끓이려고 이층으로 올라올 것이며, 제이콥은 학교에서 돌아온 누나와 기분 좋게 차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잔상이 남아서였을까. 자리를 뜨기 전에 제이콥은 유리창에 입김을 내뿜어 그림을 그려놓는다.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저것은 이슬일까. 피일까. 눈물일까. 제이콥은 알았을까. 몰랐을까. 알고도 모른 척 했을까. 창 너머 세계이기 때문일까. 제이콥은 왜 이런 걸 그렸을까. 어차피 누나랑 오순도순 차나 마실 거면서.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일까. 여러가지로 모골이 송연한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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