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가 하와이로 된 것은 지극히 자의적으로 보였다. 단 한 톨의 흠결도 없이 완벽하게 세팅된 낙원! 그곳은 사실 지구 어디든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사회 인간들의 안식과 재충전을 위해 태평양 한가운데 조성된 이 섬이 너무나 완벽했으므로 눈물이 다 났다. 고백하자면 어떤, 열패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이곳은 너무나 아름답구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기꺼이 개가 되고 싶도록, 개가 되어 한 몇 년 일하고 나서 다시 또 찾아오고 싶도록- 자연환경, 쇼핑, 오락, 스포츠, 휴양 모든 방면에 있어서 빈틈없이 아름답구나. 돈을 들고 온 자에게 이 섬은 천국을 열어주었다.

 

비현실의 현실화를 목도하고 거기서 어떤 숨막히는 절대성을 발견했을 때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경이 앞에 무력하게 굴복하는 것 뿐. 지난 시절 독서를 통한 나름의 탈체제적 모색들(?)이 순진한 몽상이자 소박한 관념 찌끄러기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진심으로 회의하게 만들 만큼 하와이는 무시무시하게 실제적이었다. 그 실제성이, 하와이를(내지는 하와이 같은 것을) 경험한 자로 하여금 기꺼이 자발적으로 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리라. 이 섬은 너무도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다정하지만 엄격한 어머니처럼, 굴종을 가르치고 있었다. 야속해라. 이 아름다운 섬에는 선택지가 없구나. 하와이에서 석양을 옆에 두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스테이크를 써는데, 벅찼다. 여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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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집으로 가는 길 : 초회 한정판
방은진 감독, 전도연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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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는 무력한 국가와 무고한 개인을 대비시키면서 가족주의적 해법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어쩌면 영화는 가족주의가 근대국가체제의 빈곳을 메꾸면서 어떻게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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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철학책 읽을 때 강독 수업, 온라인 강의, 세미나 중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매개는 세미나였던 것 같다. 삽질도 많이 하지만 그만큼 남는 게 있다. 온라인 강의나 강독 수업이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할머니가 생쌀을 꼭꼭 씹어 미음으로 만들어 준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기분이라면, 세미나는 허기진 친구들과 직접 야산에 올라 여기저기서 굴러 떨어지면서, 떨어지면 서로 손 내밀어 부축해주고 하면서 칡뿌리 같은 걸 캐먹는 기분이다. 무식하고 야만적이다. 험난하고. 먹고 나서도 내가 좋은 걸 제대로 먹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래도 일단 야산에 한번 올라갔다 오면 나 자신이 조금은 뭔가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야산에서의 즐거웠던 추억들- 그또한 삶의 뜻깊고 다정했던 한 시절로 영원히 마음 한 켠에 새겨지는 것이다. 생활이 안정되고 나면 다시 세미나 모임에 나가보려고 한다. 푸코를 읽을 것이다. 모임에 가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체제 전복을 꿈꾸는 백수, 자퇴 청소년, 대학원생, 퇴직한 어르신, 주부, 시인, 선생님, 회사원, 의사, 심리상담가, 설치미술가, 그 외 정체불명의 인물들, 그리고 나- 보르헤스의 중국백과사전에 실려 있을 법한 조합이 아닌가. 이런 어중이떠중이, 아니아니, 재야인사들과 더불어 다른 누구도 아닌 푸코를 함께 읽어나간다는 거야말로 의미있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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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나물 밥상 차리기
이미옥.김건우 지음 / 성안당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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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침이나 볶음 반찬에 들어가는 다진마늘이란 화장으로 치면 아이셰도와 같은 아이템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에 가볍게 살짝만 더해주면 사뭇 그윽한 느낌이지만 욕심이 과해 계속 손대다보면 자칫 이제까지 해놓은 걸 완전히 망쳐버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이 책을 식탁 옆에 펼쳐두고 무나물볶음(68쪽)을 했는데 의욕이 과했는지 다진마늘을 너무 많이 넣어서 무나물이 아니라 마늘나물이 되어버렸네? 아무튼, 집에 요리책이 아무리 많아도 실제로 자주 꺼내보게 되는 책은 몇 권 없는데 이 책이 그 소중한 몇 권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래도 평소에 나물요리를 좋아하는데다가 맨 끝에 가나다 순으로 색인이 나와있어 그때그때 찾기 편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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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 수업 - 다정 선생님의 다정 선생님 수업 시리즈
최정화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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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기법으로 제조한 다채로운 천연 양념장과 맛국물, 정확한 계량법의 준수 등 요리의 과학적 엄밀성에 대한 고집과 신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식탁 위에 펼쳐놓고 얼른얼른 재빨리 대충 봐가면서 만들기에는 영 까다로운 요리책이다. 흡사 실험실 연구원이라도 된 양 투철한 과학정신에 입각하여 조리를 해야 되는 이 난감한 상황은 뭔가. 서양학문의 폐해가 요리책에까지 미친 건가;; 요리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정확한 계량법과 이색적인 조합의 양념장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날씨, 요리사의 기분과 마음 자세, 각종 양념들의 마법과도 같은 우발적 마주침,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늘의 도우심- 이 모든 것들의 총화라고 믿는 신비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어머니의 손맛'을 무의식적으로 배척하고 있는 듯한 이 요리책은 깔끔한 편집에도 불구하고 시종 뭔가 팍팍하게 느껴진다. 무릇 요리책이라면 책에서부터 일단 좀 감칠맛이 나야 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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