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The Bad Seed (나쁜 종자) (한글무자막)(Blu-ray) (2011)
Warner Home Video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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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영화치고 몰입도 최고임. 사이코패스 주인공의 말로를 벼락맞아 죽는 것으로 처리해버린 결말이 다소 황당하기는 하다. 그러나 악인이 벼락맞아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는 얼마나 부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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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오패스에게는 가령 루쉰, 슈테판 츠바이크, 괴테,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보여주는 중후하고 심오한 정신성 같은 게 전혀 없다. 아주 얇다. 얇고 날카롭다. 날선 백지(白紙) 같다. 그는 괴로워하지도 고뇌하지도 회의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애당초 감정을 느끼질 못하니까. 자신의 이득에 따라 움직이므로 신념도 없다. 아니, 그렇다면 이득에 따라 움직인다는 게 바로 신념이겠군? 앞서 리뷰에서 소시오패스 유형으로 레니 리펜슈탈, 니체, 돈 후안, 박정희, 괴벨스 등을 들었는데 이중에 과연 니체를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니체는 좀 예외적인 것 같다. 니체야말로 소시오패스 철학(그런 게 있다면)을 정초한 사람으로 보여지기는 하지만 정작 그의 본성은 오히려 전혀 소시오패스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는 고통에 너무나 예민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작은 날씨 변화에서조차 우울을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고 그랬던, 무슨 지진계 바늘 같던 사람이었으니까. 차라리 그는 소시오패스의 대극에 서있던 자였으나 극도의 자기단련 끝에 소시오패스로 거듭난, 노력형 소시오패스라고 해야 할까. 니체의 진정 대단한 점은 자기극복에 있는 것 같다. 하여간 특이한 종족인 듯. 벤치마킹해볼 만한 탁월한 기질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

 

가까운 주변 인물 중에서 소시오패스 유형에 근접하는 자를 찾자면 남자친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넘치는 자신감, 낙천성, 강한 승부욕과 성취욕, 스릴과 모험 추구, 위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적음, 감정이 거의 없음(없는 듯이 보임), 그래서 늘 차분함, 공감 능력 결핍, 감각추구 경향.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결혼상대자로서 소시오패스 유형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현실 사회에서 생존 능력이 취약한 나의 무능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인간형을 내 삶에 초빙하고 싶었는지도. 생존과 안전에의 절박한 욕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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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The Classic Collection (Hardcover)
Life Magazine 지음 / Time Home Entertainment Inc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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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는 카페의 책장 한구석에서 우연히 <The Best of LIFE>라는 제목의 1977년판 라이프 잡지 사진집을 발견했다. (알라딘에는 해외서적으로만 검색이 된다.) 책을 펼치면 첫 장에 1936년 헨리 R. 루스라는 사람이 쓴 라이프지 창간 예고문이 실려 있다.

 

“사람들의 삶, 즉 라이프와 세계를 봅시다. 큰 사건들의 목격자가 됩시다. 가난한 이들의 표정과 어엿한 사람들의 거동을 살펴봅시다. 기계, 군대, 엄청난 군중, 그리고 밀림에서 달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우주 삼라만상- 이들, 평소에는 눈에 익지 않은 것들을 봅시다. 그림, 탑, 대발견 등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을 봅시다. 수천 킬로미터나 저편에 있는 것, 혹은 벽이나 방 안에 숨어 있는 것, 위험을 무릅써야 접근할 수 있는 것, 사나이들이 한없이 사랑하는 여성과 어린이들- 이 모든 것을 봅시다. 그리하여 즐기고, 놀라고, 배웁시다.”

 

다음 페이지에 라이프지 최후의 편집장으로 남게 된 랄프 그레이브의 서문 역시 인상 깊다.

 

“라이프지는 1936년 11월에 창간, 1972년 12월에 애석하게도 폐간되었다. 36년의 삶이었다. 수명이 긴 편은 아니었으나,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잡지를 들추어 보아도 라이프만큼이나 생생한 충격을 독자에게 던진 잡지는 없으리라. 라이프는 전세계를 독자의 눈앞에 펼쳤다. 그 방법 또한 독자들이 들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경험’이란 결정적인 무게를 가진 낱말이다. 무수한 사진은 다만 봄으로써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는 자의 마음을 감동으로 끓게 한다. 기백만, 아니 기천만 독자의 가슴에 남긴 감동의 물결, 이것을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하략)”

 

세상에 나온 지 37년 만에 우연히 내 손으로 흘러든 이 책은 카페 책장에 꽂힌 어느 책보다 노쇠했지만 그 위력만큼은 내게도 충격과 감동의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본군에 의해 참수 직전에 놓여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비행사,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게릴라들의 시체 속에서 자기 아들을 발견하고 실신한 부인, 동독의 어느 폭탄제조공장에서 대거 학살된 노동자들, 수용소 건물의 문을 빠져나오다가 목과 팔이 문틈에 낀 채 그대로 불에 타 죽은 어느 정치범, 베트남 전쟁 당시 온몸이 묶인 채 죽어있는 남편의 시체를 발견하고 통곡하는 월남 여성, 곤봉과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을 추격하는 영국군인들...

 

사진집에는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가슴 먹먹한 사진들뿐만 아니라, 중국 대기근 당시 통통하게 살쪄서 웃고 있는 쌀장수 부인과 그 옆에서 뼈만 남은 채로 구걸하는 굶주린 소년의 사진도 있고, 물레질 하는 마하트마 간디와 달의 표면에 첫발을 내딛은 닐 암스트롱의 사진도 있다. 불법선거자금을 받았다고 비난받은 부통령후보 닉슨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솔한 대모대가 경찰견에 의해 저지당하는 장면, 심지어는 인간의 두피를 500배로 확대한 모습까지도 실려있다.

 

 

이 책에는 ‘스포오츠맨이 전개하는 근육과 정력의 드라마’라는 타이틀 아래 각종 스포츠 경기 장면을 포착한 사진들 역시 대거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그중 조지 실크가 찍은 <파도타기 명수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위 사진이 압도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꼽고 싶다. 파도 꼭대기에 오른 서퍼 니크 벡의 모습을 찍은 이 사진은 카메라를 널빤지에 부착시킨 후 벡으로 하여금 셔터의 줄을 당기게 해서 촬영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이 사진을 봤더라면 흔한 광고 사진 같아 시큰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과 독재, 국가 폭력, 인종 갈등, 기근과 지진 등 20세기 인류가 통과한 절망적이고도 참혹한 비극의 현장 사이에 끼어있는 이 사진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준다. 아, 그러나 또한 이것이, 하지만 바로 이것이,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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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소시오패스 - 차가운 심장과 치밀한 수완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M. E. 토머스 지음, 김학영 옮김 / 푸른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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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고 있다. 소시오패스야말로 정확히 내가 직장에서 추구하는 직업인으로서의 내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주인공처럼 내가 유능한가 하면 (아쉽게도) 그건 전혀 아니다. 의식적으로 소시오패스적 인간형이 되고자 함은, 오히려 타인에게 나의 직업적 무능 내지는 직업적 능력에 대한 확신 없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반동 심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선천적으로 소시오패스하고는 거리가 멀다. 나는 자신감이 부족한 편이고, 성취욕이 낮으며, 논리보다 감성이 발달한 사람이다. 감정의 기복 역시 심하다. 공감 능력도 넘쳐 흐른다. 초자아에 짓눌려있어서 양심에 거스르는 일을 할때는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신속 정확한 일처리가 요구되는 대부분의 직종이 그렇겠지만 이 모든 인간적 자질들은 현실적으로 업무에 커다란 방해가 된다. 자연히 나는 업무 수행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 유약하다고 판단되는 혹은 거추장스럽다고 여겨지는 나의 어떤 면을 의식적으로 억누르게 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괜한 얘기가 아니다. 업무 현장에서 상호간에 만족도를 높이려면 자본사회에 특화된 인간 유형으로 인격의 셀프튜닝을 해나갈 수밖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자신은 그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했듯이 나도 업무에 충실을 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시오패스 유형으로 변모해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나를 봐도 확실히, 악은 평범한 것 같다.

 

그러나 내 안의 욕망을 최대치로 실현시키려면, 그리고 때로 모순되기도 하는 여러 욕망들을 동시에 성취하려면, 즉 초자아의 요구와 이드의 요구를 두루 만족시키려면, 또한 일터든 사회든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강건하게 살아남으려면, 아니 생존을 넘어 강한 살아있음을 느끼려면- 소시오패스적 삶의 태도가 꽤나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즉흥적으로 떠올려보면 아마도 레니 리펜슈탈, 니체, 돈 후안, 마키아벨리, 괴벨스, 박정희 등이 강한 소시오패스 기질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덕적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를 차치하자면, 다들 자신이 가진 생명력을 극도로 분출하며 살다 간 사람들인 점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실상 업무효율성과 노동생산성을 우선시하는 이 사회야말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소시오패스적 인격을 적극 계발시킨 장본인이리라. 어쩌면 이런 생각도 든다.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자기유지 및 증식을 위해 소시오패스적 개체들을 양성해나가고 게 아닐까 하는. 나처럼 소시오패스하고는 거리가 먼 (자칭) 식물성 인간들까지도 소시오패스화(化)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아이히만도 가정에서는 다정한 아버지였다질 않나. 나 역시 직장에서 스스로를 단련시켜 후천적 소시오패스로 거듭나느라 소외된 내 자아의 연약한 한쪽 면을 어떻게든 숨쉬게 만들어줘야 한다. 내가 아무런 경제적 보상도 없는 알라딘 리뷰쓰기를 끊지 못하는 이유다.

 

책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최대 4%가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사주명리학에서는 사주원국에 삼형살이 있는 경우 소시오패스 유형으로 본다. 형살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컨대 축술미 삼형의 경우 무은지형이라고 하여 성질이 냉혹하고 은인을 해치며 적과 내통을 잘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사신 삼형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형액을 만난다고 하며, 자묘형의 경우 무례지형으로 성품이 포악하고 남을 무시한다고. 흔히 사주원국에 삼형살이 자리잡은 경우 그 사주의 격이 높으면 군인, 경찰, 판검사 등 권력을 휘두르는 직업을 갖게 되지만 격이 떨어지면 옥살이를 하게 되거나 각종 배신, 사고, 수술을 당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똑같은 사주를 가지고도 깡패가 되어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느냐 아니면 깡패를 철창에 잡아 가두는 권력자가 되느냐, 다시 말해 천라지망을 펼치느냐 아니면 천라지망에 갇히느냐 하는 것은 각자 알아서 살아가기 나름이라는 얘기다. 극과 극을 달리기로는 이 책에 나오는 소시오패스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다. 형살이라는 것이 하나의 통계학적 경향성으로 전해지는 고서(古書)의 이야기에 불과하며 괜한 편견만 낳을 뿐 실상 별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의견도 상당하므로 맹신할 것은 아니다. 다만 동양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이코패스 유형이 태생적 기질로서 학문적으로 유형화되어 이해되고 있다는 점만큼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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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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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걷기가 있다. 비 맞으며 걷기, 밤중에 걷기, 뙤약볕 아래 걷기, 냄새 맡으며 걷기, 혼자서 걷기, 여럿이서 걷기, 지칠 때가지 걷기, 관찰하며 걷기, 침묵하며 걷기, 노숙하며 걷기, 노래 부르며 걷기, 오솔길 걷기, 도시 이곳저곳을 걷기, 방안에서 걷기, 도중에 멈춰 상념을 기록하며 걷기 등. 헉헉. 저자는 이 모든 걷기에 각각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섬세하게 음미한다. 가장 나중에 언급되는 걷기는 순례길 걷기다. 신성한 종교적 행위로서의 걷기야말로 궁극의 걷기라는 얘기인가 보다.

 

천천히 산책하듯 이 책을 읽었다. 저자에 따르면 산책은 “친숙한 것의 낯설음을 고안해낸다. 산책은 디테일들의 변화와 변주를 민감하게 느끼도록 함으로써 시선에 낯섦의 새로움을 가져다준다.” 낯섦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읽다 지쳐 도중에 잠깐 잠들어버렸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하지만 “여러 시간 걷고 난 다음에 허락되는 낮잠이나 밤잠은 가히 축복이라 할 만 하다. (...) 잠자는 것은 미적 관조가 겹쳐진 하나의 육체적 쾌락이기도 하다. 한 밤 지붕 없는 곳에서의 잠은 또한 철학으로의 초대이며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한가한 성찰에의 초대다.” 아무렴.

 

*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9쪽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그것은 오직 순간의 떨림 속에만 있는 내면의 광맥에 닿음으로써 잠정적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는 행위다. -21쪽

 

보행자가 공간을 끝없이 돌아다닐 때 그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만큼의 대항해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언제나 인식을 위한 탐사가 진행 중인 어떤 대륙과 비길 만한 것이 된다. 보행자는 전신의 모든 살로써 세계의 두근거리는 박동에 참가한다. -41쪽

 

걷기는 언제나 미완상태에 있는 실존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불균형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보행자는 규칙적 리듬으로 바로 앞서의 운동에 그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운동을 즉시 연속시켜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을 때마다 항상 불안정한 상태가 출현하면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발한다. 요컨대 너무 빨리 걷거나 너무 천천히 걸으면 단절이 생길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먼저 발걸음에 다음 발걸음이 적절히 따르도록 조화를 기해야만 비로소 잘 걸을 수 있게 된다. 보행은 세상을 향한 자기개방이므로 겸손과 순간의 철저한 파악을 요구한다. 한가로운 소요와 호기심이라는 그것 특유의 윤리는 개인의 인격형성과 몸을 통한 실존수행의 이상적 수단이 된다. -88쪽

 

한밤중에 달빛을 받으며 숲속이나 들판을 걷게 되면 그때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별빛 속이나 캄캄한 어둠 속에 서면 인간은 무한하고 진동하는 어떤 우주 속에 던져진 피조물로 되돌아간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되고 그 순간의 어렴풋하지만 강력한 우주론 혹은 개인적 종교성에 빠져든다. 밤은 인간을 경이와 두려움이라는 성스러운 두 가지 얼굴과 대면시킨다. 그것은 일상적인 지각의 세계에서 뿌리가 뽑혀 나와서 자아를 초월하는 피안의 세계와 접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111쪽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여러 세대의 인간들이 풍경 속에 찍어 놓은 어떤 연대감의 자취 같은 것이다. -119쪽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 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다. -237쪽

 

걷기는 시선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공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가게 한다.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외면의 지리학이 내면의 지리학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평범한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킨다. -251쪽

 

수많은 발걸음들에 점철되어 있는 고통은 세계와의 느린 화해로 가는 과정이다. 걷는 사람은 낭패감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계속 한몸을 이루고 사물들과 육체적 접촉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온몸이 피로에 취하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저곳으로 간다는 보잘것없지만 명백한 목표를 간직한 채 그는 여전히 세계와의 관계를 통제, 조절하고 있다. 물론 그는 방향감각을 잃기도 하지만 아직은 알지 못할 어떤 해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걷기는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되어 불행을 기회로 탈바꿈시킨다. 인간을 바꾼다는 영원한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길의 연금술이 인간을 삶의 길 위에 세워놓는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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