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쁘락에서 잘 추는 땅게라들 보면 스텝 밟는 게 좋은 글을 쓰는 것과 닮았다. 낱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어순에 맞추어 날렵하게 완성한 문장. 지저분하지 않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확하게, 신중하게 바둑알 놓듯 이어나가는 문장과 문장들. 스텝도 그렇게 밟는다. 글 쓰는 것과 발 쓰는 것이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땅게라들 발놀림 자체가 무슨 붓털 끝의 움직임 같기도 하고.
 
2 평일이든 주말이든 보통 밤 8~9시부터 시작되어 자정 넘어 문 닫는 춤판은, 마치 세상이 깊은 숙면 속에서 꾸는 하나의 화려한 꿈 같다. 밤에만 꿈틀대는 거대한 무의식. 뉴스에 나오지 않는 세계. 배면의 세계. 어떤 강습소는 제대로 된 간판도 없어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9와 3/4번 승강장처럼, 아는 이들만 쓰윽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선 정말로, 머글들이 모르는 또 다른 삶의 희노애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간극이 큰, 억압된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밤마다 달콤한 악몽을 꾸듯 춤판으로 모여드는 것인지도. 몽정을 해서라도 욕망은 어떻게든 그 출구를 찾아야 하므로.    
 
3 사주적으로 보면 십신 중에서 춤은 식신·상관이다. 끼와 재주를 펼쳐내는 것이다. 요리, 출산과 육아 등도 모두 다 식상이지만 춤이 식상에 해당하는 각종 활동 중에서도 유독 허망한 까닭은 그것이 아마도 오행적으로 순환이 되질 않기 때문 아닐까. 아기를 낳으면 무럭무럭 성장하여 다음 세대가 된다. 음식을 만들면 먹는 사람이 기운을 차리고 튼튼해진다. 그러나 춤은 자족적이다. 춤으로부터 다른 무엇인가로 기운이 이어지질 않는다. 강사급을 제외하고는 식신생재로 에너지가 연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재주를 펼쳐내어 변화를 도모하지 못한다. 밤중에 꾼 꿈처럼, 환상으로 떠올랐다 저버리면 그 뿐. 춤추고 돌아올 때 우리가 종종 우주의 블랙홀 한 가운데로 떨어진 듯이 쓸쓸한 허무를 느낀다면 바로 그 때문인지도.  
 
4 오늘 아브라소를 배웠고, 아니, 배웠다기보다는 한 번 해봤고, 선생님 두 분이 한 곡 추는 걸 지켜봤다. 두 번의 감동. 땅고는 정말 멋진 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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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락에 처음으로 가봤다. 적당히 어수선하고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아는 이도 없으니 벽에 붙어있다 오겠거니, 열심히 걷기 연습이나 하자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랑 홀딩을 하게 되었다. “이건 발스라고 해요. 음악을 들어보세요. 3/4박자죠. 네. 이게 왈츠예요.”, “오초를 이렇게 변형시킬 수도 있어요. 재미있죠?”, “어디까지 배우셨죠? 아, 그럼 충분해요.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한 곡 출 수 있어요.”, “아, 이 음악이 괜찮네요. 여기 맞춰볼까요?”, “음악을 많이 들어보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스스로가 퍽이나 남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 우스꽝스럽고도 참혹하게 밑도 끝도 없이 추락했다고 여겨질 때, 춤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주는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얼마나 황송한 구원으로 다가오는지. 집에 돌아와 누웠는데도 아까 쁘락에서 홀딩하면서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얘기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추운 날 따스한 국물 같은 그런 말들이 나는 몹시 그리웠던 것 같다. 함께 무언가를 완성해가며 다정하게 마음과 감정과 기분과 느낌을 나누는 그런 말들.

 

춤으로 대동단결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한 것처럼 보이는 이곳도 기실은 인간의 소굴인지라- 경쟁과 시기 질투가 있고 정치가 있고 권력이 있고 자본의 획책이 있고 거짓말과 배신과 사기극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곳 춤판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냉혹한 정글의 세계라는 것을 나도 이제는 잘 알지만, 그럼에도 실로 오랜만에 방금 막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의 환대 속에서 이렇게 또 다시 새로운 춤을 한 걸음 씩 배워나가는 상황에 놓이고 보니 선의로 가득한 사람들의 따스한 말 한 마디가 다시금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하고 애틋하게 생각된다. 딱 10년 전 부기우기바에서 스윙댄스를 처음 배웠을 때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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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8 0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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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05: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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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8 08: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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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0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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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춤, 땅고 Tango - 소통과 공감의 기술
이기현 지음 / 학민사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탱고 관련 도서 검색 중에 찾은 책. 프로그래머의 길을 걷다가 뒤늦게 택견을 수련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태극권, 가라데, 영춘권 등의 무술과 요가, 필라테스, 웨이트 트레이닝, 사교댄스 등을 두루 경험하면서 그 관심사가 무술에서 운동으로, 운동에서 바른 몸 움직임과 명상적 걷기로, 나아가 인간의 몸으로 점점 확대되었다는 저자의 이력이 매우 흥미롭다.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ch5.net)를 살펴보니 개인 교습도 받을 수 있는가 보다. ‘명상적 움직임에 꼭 필요한 코어를 각성하기 위한 근본이 되는 체를 기르는 체조법’이라는 코어 각성 체조, ‘양가 태극권 37식을 코어 회전 및 중심 이동하는 원리에 맞게 지도’한다고 하는 태극권 수업, ‘코어를 써서 무게 중심 이동과 중심축 회전법을 익히는’ 걷기 수업, ‘명상적 걷기의 응용으로 무술의 기본 공격 및 방어 기술을 걷기의 흐름에 맞춰 하는 이동 수련법’ 등 다루는 내용도 호기심을 돋운다.
 
스윙댄스가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놀이나 익살맞은 장난 같다면, 탱고는 도인들의 수행이나 수련, 구도, 자기 연마에 가까운 것 같고(연습 모임의 분위기에서부터 강사를 향한 수강생들의 태도, 춤출 때 사람들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나뿐일까) 그래서인지 탱고인들 중에는 실제로 이 책의 저자처럼 동양적 수행의 일환으로 탱고에 접근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는 것 같다.
 
무술, 요가, 웨이트 트레이닝, 춤추기 등 그 실천의 양태는 저마다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는 부단한 자기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해 나가는 행위, 자신의 신체에 끊임없이 변형을 가하면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의 자기를 완성해 나가는 행위에 다름아니며 이는 곧 주체의 자기배려 기술에 주목했던 말기 푸코 사유의 구체적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앞으로는 탱고를 단순히 인간의 난교 욕망 내지는 성적 해방 욕구의 승화적 분출구로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마음을 가지고 구도자적인 태도로 진지하게 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명상적 걷기의 응용으로서 땅고가 매우 이상적이며 명상적 걷기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웬만큼 몸으로 숙달시킨 단계로 올라왔을 때에만 비로소 땅고 댄스를 즐길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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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왜 자기배려라는, 그 흔한 주체라는 용어 대신 자기라는 말을 쓰는지 그거는 이제 여러분들이 이해하실 거 같아요. ‘자기는 항상 변형 가능한 것이고, 또 그 변형 속에서, 사실 자유라는 것이 뭡니까,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를 변형시켰을 때, 이전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화되는 순간의 그 반짝이는 것이 자유란 말이에요. 자유라는 것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어떠어떠한 형이상학적인 명상을 통해서, 모든 회의를 거치고 거쳐서 아주 말끔하게 인식의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딱 얻어내면 끝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한도 끝도 없는 작업이란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한 형태를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주체화 방식을 통해서 발견하는 거예요. 그래서 푸코는 이제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집단의 지식이라든가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타진했고, 그러면서 한 발짝 더 나아가다가 죽음을 맞게 된 것이죠."  -심세광 선생님의 푸코 후기 사유 강의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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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와이드 셧 SE (2disc)
스탠리 큐브릭 외 감독, 톰 크루즈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2/3까지 보다가 졸려서 잤다. 그럼에도 리뷰를 적는 이유는 이 영화 보면서 자꾸만 지난 날 스윙판에서의 경험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사교댄스가 인간의 성적 해방 욕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면 이 영화에 나오는 비밀결사는 그것을 종교적 명분을 내걸고 승화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실현을 시켜버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큐가 아니라 영화이므로 이 또한 큰 틀에서는 예술적 승화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술적 승화의 형태든 종교적 제의의 형태든 그 어떤 명분과 외양으로 포장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폴리아모리즘을 구현하는 집단이라면 역시 현실적으로 구성원의 바디라인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씁쓸한 물음이다ㅠ 영화에 나오는 비밀결사 모임의 나체 여인들은 무슨 다 모델들인가. 여자 몸만 보다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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