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넘어선 자본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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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어떤 힘이 있다면, 시스템 자체를 전복하거나 개조하는데 그 힘을 발휘하기보다, 오히려 힘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시스템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활용하는 편이 낫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한 책. 그러나 나의 까칠한 태도가 이내 무색해지도록 이 책은 뜨거운 책이었다. 그러나 뜨거움과는 별개의 문제로, 정통 맑스주의에서 통념화되고 상식화된 내용을 흔들고 뒤집어 보았노라고(p.460) 저자 스스로 이미 고백한 바 있듯이 이 책의 내용을 과연 어느 정도까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경제학에 대한 배경지식도 전무할 뿐더러 맑스를 읽어보지도 않은 지금의 상태에서! 때로는 어려워서 때로는 의아해서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그저 일단 내 수준에서 이해되는대로만 몇몇 부분을 정리해둔다. 자본론 2권과 3권에 해당하는 8~9장은 읽다가 포기했다. 

1.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데, 이때의 이윤이란 절대이윤과 상대이윤의 합으로 산출된다. 절대이윤은 생산수단의 배타적 소유에 기초하여, '노동이 산출한 가치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일정 근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이 100을 생산했을 때, 80에 해당하는 몫만 월급으로 주고, 20은 자기가 챙길 때의 그 '20') 상대이윤은 '노동의 가치' 내지 '노동의 대가'를 모두 지불하는 경우에도 발생하는 잉여가치로써 (노동의 대가를 모두 받는 경우에도-정확히 말하면, 노동자가 자신이 행한 노동의 대가를 모두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에도- 착취는 발생한다!) 최열등 노동과의 편차에 의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말한다. (일정 근무 시간 동안 100을 생산하던 노동자들을 닦달해서 140을 생산하게 하고, 아까의 20과는 별도로, 닦달해서 생긴 40을 가로챌 때의 그 '40'-노동자들의 월급은 여전히 80/n)  

"절대이윤은 노동의 가치화가 노동력의 구매에 투입된 가치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가치화의 결과는 항상 잉여가치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노동자가 받은 돈에 비해 더 많은 가치를 자본가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반면 상대이윤은 노동을 가치화하는 순간, 가치화된 것의 비교 자체를 통해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고, 가치법칙에 따라 동일하게 지불된 노동력이 산출한 다른 결과란 점에서 노동가치론의 '가치법칙' 안에서 산출되는 잉여가치다. 즉 상대이윤은 '가치법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착취법칙임'을 보여준다. 이는 가치화와 동시에 발생하는 잉여가치고, 노동력의 사용과 동시에, 다시 말해 노동과 동시에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이런 점에서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잉여가치 없는 가치는 없으며, 잉여노동 없는 노동은 없다." -p.149  

2. 19세기 이전의 노동력이란 장인적인 숙련과 도제적 훈련을 거친 일종의 전문 인력이었기 때문에, 노동과정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간섭할 수 없는 자본가는 그저 오로지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만을 이윤으로 취할 수 있었다. (노동의 형식적 포섭) 그러나 산업혁명기 이후 분업과 협업 체제가 발달하고 기계가 도입되면서, 기계에 장악된 노동은 점차 숙련노동의 성격을 잃어가고, 자본은 노동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 이로 인해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촉발된다. (노동의 실질적 포섭) 이 시기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절대적 잉여가치에 해당하는 노동시간마저 늘어남.  

20세기에 이르면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 진행된다. 자본은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낸 자동화(노동능력 자체를 직접적으로 기계화)와 정보화(모든 사회적 활동에 요구되는 '접속'을 기계적으로 포섭하고 장악) 시스템을 이용하여 노동력의 구매 없이 사회적 노동을 직접 착취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들을 감옥 같은 데다 몰아넣고 닦달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도처에서 생산에 관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에 접속하여 활동하게 한다. 이 자체로 기계적 잉여가치가 창출되기 때문에. 기계에 접속한 활동을 원활하고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각종 신분확인과 검열제도가 강화되고, 그 결과 19세기식 훈육사회는 이제 통제사회로 진화. (5장)  

3. 자본은 생산된 잉여가치를 추가 자본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가치증식운동이 진행되면서 최초에 투여된 자본은 무한소에 가까운 크기로 줄어들고, 잉여가치에서 연원하는 자본은 실제로 가동되는 대부분의 자본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투여된 자본이 확대된다는 것은 노동력 구입에 들어가는 가변자본의 크기보다 재료나 기계 같은 생산수단에 들어가는 불변자본의 크기가 확대됨을 의미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기계를 추가 구입해서 사업규모를 확장하면 했지 인력을 더 고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가변자본의 투입 비율은 갈수록 줄어 자본의 축적이 고용의 감소나 임금 삭감을 수반하게 된다. 즉 ‘노동인구는 그들 자신이 생산하는 자본축적에 의해 그들 자신을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드는 수단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생산’하게 되는 셈.  

결국 자본사회가 발달할수록 과잉노동인구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렇게 발생한 과잉노동인구, 즉 유휴노동력은 근대산업의 하나의 필요조건으로써,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을 때 자본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노동력 풀을 형성한다. 이렇게 자본은 노동하는 인간을 자신의 모델로, 동일자로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실업자 내지 과잉인구, 유휴노동력이라는 타자(제 존재를 정의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타자) 또한 만들어낸다.  

이들 타자에 대한 자본의 가차 없음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실업화 압력’에 시달리도록 하여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해내는 동력이 된다. 오로지 일하는 자만 인간으로 취급하며, 일하지 않는 부랑자, 실업자, 거지 등은 철저하게 게으르고 부도덕한 인종으로 내몰아 핍박하고 격리시켜버리는 새로운 사회의 출현. ‘인간’이 되려는 자에게 제시되는 자본의 요구는 이제 노동자 자신의 욕망이 된다. 구태여 강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열심히 노동한다. (6장) 

4. 자본 축적의 원천은 잉여가치이고,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자본의 대부분은 잉여가치로 이루어진 것이 된다지만, 이러한 증식활동의 시작점이라고 할 만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자본이 있을 것 아닌가. 이 ‘본원적 축적’, ‘사전적 축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먼저 지배세력과 기득권층에 의한 폭력과 약탈, 강압과 협박에 의해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가 자행된다. (ex.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 제국시대의 식민지 정책) 그 결과, 자본가의 생산수단 독점이 이루어지고, 근대적 무산자가 대규모로 양산되어 노동시장(인력풀)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시장은 더 이상 원시적 형태의 ‘단순상품 내지 소생산에서 비롯되는 국지적인 자연발생적 교환의 장으로서의 시장’이 아니라, ‘기아와 결핍에 의하여 시장에 나가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다. 국가는 통치 전략으로서 이러한 시장의 전국적인 확대를 지원하는 한편, 노동력으로 기능(?)할 수 없는 자들은 치안을 이유로 모조리 수용소, 병원, 학교, 감옥 등에 격리 또는 감금하고, 교화와 훈육 및 처형을 감행한다. 결국, ‘본원적 축적’이란, 거대한 국가적 폭력이 개입하여 지극히 비경제적이고 반도덕적인 방식으로 탄생된 것.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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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할 때면, 친구들과 나는 늘 온갖 꼼수를 써서 끝내 맨 뒷자리를 차지했다. 분단마다 뒷자리를 점거한 우리들은 만만하다고 여겨지는 선생님의 수업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책상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책상을 화장실에 숨겨놓고 학교 뒷산으로 도망가는 무리 중에 하나가 나였다. 잎사귀 사이로 아득하게 들려오는 수업 종소리란 늘 묘한 긴장과 흥분을 자아내는 것이어서 도주는 중독성이 강했다.

 

그러나 혼자였다면 결코 감행하지 못할 비행이었으리라. 일찍부터 어줍잖은 패거리 문화에 눈뜬 나는 기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소인배에 불과했다. 나의 객기는 치졸하게도 집단에 속해 있을 때만 과도하게 발휘되었다. 그 시절에는 비행으로 고무된 집단 의식이 나를 구성하는 정신적인 영역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단이라는 것은 확실히 어떤, 환영을 만들어낸다. 집단 안에서 대담해진 자기 모습을 실제의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 소심하고 자의식이 희박한 인간에게 집단이 주는 매력이란 어쩌면 그런 환영에서 오는 도취감이 아닐까.

 

오로지 집단 안에서만 용맹하고 집단 안에서만 잔인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치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경험으로 미루어 나는 그들의 용맹성이 상당 부분 허구임을 확신한다. 그들의 결속력은 기실 나약하고 별볼일 없는 개별자들의 부실한 연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실로 용맹한 사람은 오롯이 홀로 존재할 때 가장 담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연대만이 비로소 웅숭깊은 울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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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결혼은 안 해도 집은 사라 - 여자의 인생을 책임지는 똑똑한 내집마련 다이어리
천명 지음 / 다산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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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내집마련이 인생에서 평생 재태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큰 쇼핑이니만큼 집에 대한 공부와 투자 가치 분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갈아타기'를 하면서 이사로 인한 부대비용을 허비하지 말고, 대출이 부담되더라도 한 번에 알짜배기 주택을 질러버리는 게 낫다고. 한 번 둥지를 튼 동네는 여간해선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얘기도 하면서, 한 번 지를 때 과욕을 부려서라도 좋은 동네, 전망 있는 동네로 가라고 한다.  

이 책을 읽어보니 집마련 할 때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사항이 이렇게나 많다: 입지, 지형, 안전성, 병원과 문화시설 및 쇼핑센터, 운동시설, 전철역 등과의 인접성, 용적률, 건폐율, 로열동, 로열층, 층간 소음, 세대수, 동간 간격과 동 배치, 개발호재, 난방방식, 조망권, 향(남향보다 남동향이 좋다고), 출퇴근시간, 건축년도, 대단지인지의 여부, 아파트 브랜드, 유해환경이 있는지의 여부, 교육수준, 생활수준, 녹지공간, 편의시설, 개수대 등 내부 인테리어 시설, 이웃의 인상, 아파트 주변의 분위기, 매도자의 매도 이유, 매도자의 주택 만족도, 중개사의 견해 등등.  

이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따진 후 나에게 맞는 최적의 아파트(이 책에서는 하방경직성 때문에 내집마련을 반드시 '아파트'로 하라고 못을 박고 있다)를 골라내어 전세를 끼든 대출(가진 돈의 40%정도까지가 적당)을 끼든 깜냥껏 궁리해서 과감히 질러버리라는 게 이 책의 요지라면 요지다. 이 책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집 계약과 이사 및 인테리어 시공과 관련한 유의사항은 실전(?)에 돌입했을 때 다시 한번 정독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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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시작하는 내 집 마련 프로젝트
이국헌 지음 / 팜파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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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했던 조언 몇 가지를 적어둔다: 차를 사지 말고 카드와 주식을 멀리할 것, 경제기사와 친숙해질 것(이건 나로서는 좀 불가능할 것 같지만), 무주택자의 특혜를 최대한 활용할 것, 월급을 10-30-30-30으로 쪼개어 장기주택마련저축과 청약부금을 넣을 것(상호저축은행 추천), 그렇게 하여 종잣돈을 모을 것, 은행 거래는 한 두 군데에 집중하여 나중에 아파트 당첨시 중도금대출 및 잔금(모기지론)대출 받을 때 유리한 조건이 되도록 할 것, 단순히 주거문제만 해결할 것이 아니라 장래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구입할 것, 즉 투자 가치가 있는 분양평수 25평 이하(실평수 60제곱미터 전후) 아파트로 내집마련과 투자의 이중효과를 얻고 아파트를 키우는 전략을 마련할 것, 전문직 종사자는 자금의 여유는 있으나 정보에 어두우므로 부동산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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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사람들과 동동주를 마시면서, 직업적 자질 부족으로 여겨질 만큼 나는 지나치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최소한의 수준이라도 갖춰야 할, 연출되고 각색된 사랑조차도 나에게는 전적으로 부재한 듯하다. 아무래도 나는 나에게 너무나 사로잡혀 있고,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나의 가장 큰 문제이자 결함인지 모르겠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데, 내가 이제까지 이성애이라고 할 만한 감정을 느꼈던 상대 역시 언제나 자신에게 단단히 매몰되어 있는 유형의 인간-그들은 부인할지라도-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끼리의 연애 감정이라는 것은, 애당초 헌신이나 희생이나 베풂 등의 숭고함과는 거리가 먼, 그저 자신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타인에게까지 일시적으로 확산된 형태로서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본질적으로는 자기애에 불과한, 지극히 유아적이고 미성숙한 수준의 감정밖에 발휘할 수 없는 탓에,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끼리의 연애란 필연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동주를 마셨던 밤에는 이름도 성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과 급격한 속도로 친해져서 죽마고우처럼 어울렸다. 일요일 오후에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훌륭한 열람실을 갖춘 구립도서관을 발견했고, 필름 두 롤은 여전히 현상하지 못했다. 이제는 제법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좋다. 부끄럽고 우습고 곤란했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미안했던 또 한 주말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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