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가 만년에 쓴 작품을 읽던 중에, '가스카르'라는 낯선 작가의 이름을 발견했다. 가스카르는 오에가 '첫' 작품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스카르의 원서와 번역문을 대조해서 읽는 동안, 어느덧 소설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 아래의 내용은 네이버에서 검색한 것이다. 가스카르의 작품은 아직 국내에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다. (나의 언어권역에서는)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책.

 가스카르 [Pierre Gascar, 1916~1997]

+++ 본명은 피에르 푸르니에이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남서 프랑스에서 보낸 다음,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친 후에 중후한 장편소설 《가구(家具) Les meubles》(1949) 《닫혀진 얼굴 Le visage clos》(1951)로 데뷔하여, 《짐승들 Les bêtes》(1953) 《사자(死者)의 시간 Les temps des morts》(1953)으로 콩쿠르상을 수상하였다. 《짐승들》에서는 동물과 인간의 교섭을, 그리고 《사자의 시간》에서는 포로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체험을 묘사하고 있는데, 고뇌로 얼룩진 형상(形象)의 세계에 대한 응시가 조금도 과장된 냄새를 풍기지 않고 시적인 환시(幻視)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점이 그 후 그의 작품에서 큰 특징이 되고 있다. 《여인네들 Les femmes》(1955) 《종자(種子) Le graine》(1955) 《태양 Soleils》(1960) 《도망자 Le fugitif》(1961) 《매혹》(1965) 등의 소설 이외에도 《개방된 중국》(1955) 등의 기행문과 르포르타주가 있으며, 문예평론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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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군신위 - [초특가판]
박철수 감독, 방은진 외 출연 / 플래닛 엔터테인먼트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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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간다, 안 간다 하면서 간더더니 이제 k선배도 혼기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올 설에 잠깐 만난 k선배는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결혼 예식의 청사진을 이렇게 그리고 있었다. 1.부조를 받지 않는다. 2. 뷔페 음식 대신 정성스레 준비한 국수를 대접한다. 3.주례는 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자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 낭송한다.

 혼례, 장례, 돌잔치 등, 대부분의 예식들을 마뜩잖아하는 내게 이런 이야기들은 신선한 감흥을 준다. 매뉴얼대로 잘 하는 것도 어렵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일도 어려운 일일진대 나는 팔짱만 끼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위에서 말한 1.2.3은 소위 현대화된 ‘웨딩 패키지’라는 틀에서 뛰쳐나가려는 노력이지, 혼례 문화 자체를 재조직하려는 시도까지는 아니다. 사실, 조상들의 전통 혼례를 잘 들여다보면, 번거롭기는 하여도 ‘분리-전이-통합’의 단계를 착실히 밟으며 의미와 내용을 잘 조직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각종 예식에 대한 나의 마뜩잖음은 전통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시시하게 ‘패키지-화’되어버린,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패키지-화’는 장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얼마씩 적립하면, 장례지도사가 기본 절차에 따라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례 상품’이 유행하고 있지 않은가. 울긋불긋한 상여 대신 링컨콘티넨탈 리무진을 타고 가는 세상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절이기에,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는 전통 장례에 대한 기록 영화처럼 느껴진다. 초혼과 반함, 빈상여놀이 등 현대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의식들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다. 상복 입은 여인네들이 그렇게 목 메게 우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도 ‘코미디’다. 흐벅진 허벅지가 어둠 속에서 경련을 하고, 기다란 장총이 푸른 하늘을 가르고, 로타리 다방 레지 아가씨들이 남행열차를 부른다. 씨가 불분명한 어린 자식이 병나발을 불고, 흑돼지는 잡혀죽기 싫어 꽥꽥거리며 뛰어다니고, 보험 신청서가 부지런히 왔다갔다한다. 여당과 야당의 국회의원이 각기 문상을 와서 주먹질을 하고, 염불과 찬양이 서로 소리를 드높인다.

 이 시끌벅쩍한 와중에 때로 뜨뜻한 눈물 방울도 얼룩진다. 자전거포 주인은 진작 자전거 페달을 고쳐주지 않아서 사고가 난 거라며 자기 탓을 하며 울고, 다방 레지 아가씨는 하룻밤만 같이 자줬어도 노인이 십 년은 더 살았을 거라며 울고, 수십 년 전 ‘도라꾸’를 몰고 도망쳤던 윤 기사는 돈가방을 싸들고 와서 잘못했다고 빌며 울고, 머리채를 붙들린 채 쫓겨났던 막내딸은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기면서 운다.

 이처럼 격식 있고, 또한 난장판이며, 애 끊는 눈물이 넘치는 장례 장면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란 사실을 박철수 감독은 예감했던 것일까? 90년대 중반, 경상도 시골의 한 장례 장면이 불과 10여년 만에 이렇게 생경해지고 말았으니. 

하긴, 눈물 자국이 마르기도 전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회사로 출근해야 하고, 허니문의 달콤함을 음미하기도 전에 밀린 서류파일 더미를 해치워야 하는 것이 우리네 조건 아닌가. 그러니 의식은 점점 간소화되고, 그에 따라 우리네 희로애락도 점점 간소화되어갈수 밖에. 어쩌면 우리는 일상과 의례를 깔끔하게 구분해주는 패키지 상품에 고마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도하며 내쉬는 그 한숨 속으로, 질펀하게 감정을 풀어헤쳐놓을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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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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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시장을 지나다가, 과일 행상을 하시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점심식사 후의 인스턴트 커피 같은, 달짝지근한 풍미가 전해져왔다. 나도 그런 한때를 누려 볼까? 그러한 이유로 얼마 후, 나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어떨까? 내게도 달디 단 위로를 줄까? 궁금했다.

 이 책의 맛은 이러했다. 자판기에서 실수로 뽑은 ‘프림 커피’의 맛. ‘밀크 커피’에 길들여진 입은 당장 설탕 맛을 아쉬워했지만,『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는 한 스푼의 설탕도 들어 있지 않았다. 고단함을 하소연하는 나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한 잔의 쌉쌀한 맥주와 등 두드려주는 선배를 기대해선 안 될 것이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호프집의 조명처럼 그저 지친 이들의 추레한 표정을 비추어줄 뿐이기 때문이다.

「의심을 찬양함」이라는 단편을 보면 ‘토끼의 생존술’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토끼는 적을 발견한 순간부터 무조건 뛰기 시작한다고 한다. 아무 규칙 없이 왔다갔다 제멋대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적을 교란시키는 것, 그것이 토끼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러나 ‘좌표’가 없으면 늘 불안한 현대인들은 토끼의 방식을 쉽사리 취할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별자리 운세를 맹신하고, 애니어그램으로 사람들을 분류하며, 매뉴얼에 기대고, 지도 없이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좌표가 없으면 불안하기에, 시시한 좌표에라도 기대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맘 붙이지 못한 이들의 내면은 황폐하기 짝이 없다.「고독의 발견」에 등장하는 만년 고시생은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라는 질문에 이제 곧 지긋지긋한 책들을 쌓아놓고 고시원에 불을 지를 계획이라는 대답을 떠올린다. 마음의 건조주의보가 결국, 방화 직전의 상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궤도에 오르지 못한 인생은 저렇게나 불안하지만, 궤도에 오른 인생도 허탈하긴 마찬가지다.「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에 등장하는 출판사 사장은 한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배우거나 깨닫지 않는 순간이 없는’ 촉촉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점에 이르게 된 그는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라는 건조한 독백을 늘어놓게 되었다.

 궤도에 오르지 않으면 불안하고, 올라도 허탈할 뿐이라면 대체 어찌해야  걸까? 은희경 작가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는 대신,「지도 중독」에 나오는 P선배의 말 속에 메시지를 심어 놓았다.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라는 것이다.

 결국, 저마다의 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속에서 고독이나 의심을 견디는 방법 또한 다양할 것이다. 「의심을 찬양함」의 쌍둥이처럼 “나는 흉내 내는 가짜이거나 그림자이고, 내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고독의 발견」에 등장하는 난쟁이 여인처럼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대목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주인공의 한마디였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
 

 별자리 운세나 애니어그램, 매뉴얼과 지도가 아닌, ‘사람’을 좌표로 삼는 것이 조금은 더 현명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좌표로 삼은 사람 또한 계속 변화해갈 것이니, 그 길 또한 결코 쭉 뻗은 일방통행로일 수 없을 것이다. 방향도 없이 뛰는 토끼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 또한 부지런히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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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8-02-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낳고 휴가 중일 때, 책이 너무나 손에 안 잡히는 와중이었더랬는데요.
은희경의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라는 단편집은 끝까지 읽고, 덮을 수 있더라고요. 정말 읽혔다는 사실 하나로도 위안을 주었던 ㅎㅎ

점심 식사 후의 인스턴트 커피맛의 이 소설집 몹시 궁금하여요!

자일리 2008-02-21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나실 때, 한번 읽어보셔요~
칼로리는 낮고, 카페인은 높답니다^^

2008-03-12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키노 2014-10-1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맛을 모르니 글이 다가 오지 않고 맴도는 ......,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에서 출판하고
편집자로 동명이인인지
아님 본인이 맞으신지 ㅋㅋ
 

 

팜므파탈도, 베르테르도 아닌 사랑


1. ‘팜므파탈’이라는 헛소문 

                        괴테의 나이 25살, 불과 4주 만에 완성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는 ‘자석산’ 일화가 등장한다. 배가 그 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조리 빨려 날아가버린다. 그리하여 결국 배는 허물어지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널빤지에 깔려 모조리 죽고 만다는 것. ‘자석산’은 일화는 짧고, 격렬한 정념을 태우다 결국 산화해버리고 만 사랑의 화신 ‘베르테르’가 내세우는 자기 변명처럼 느껴진다. 베르테르가 자기 정념의 이유를 ‘로테’에게로 돌리고 있기에, 베르테르가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눔과 동시에 로테에게는 팜프파탈의 가면이 씌어진다. 

 18-9세기 명석한 지성들과 교우했던 ‘자석산’, 루 살로메 주변에서도 여러 척의 배가 침몰했다. 무엇이든 파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건설적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난파의 책임을 자석산에게 묻는 모양이다. 루 살로메는 과연 소문대로 강력하게 흡인했다가 매몰차게 뿌리치는 팜므파탈이었던가? 혹시, 루 살로메의 불온한 이미지를 탄생시킨 건 그녀 주변의 성미 급한 ‘베르테르’들 때문은 아니었던가? 

 살로메가 파울 레, 니체와 더불어 시험하려 했던 ‘3각 동거’ 관계는 살로메를 독점하려는 반칙의 각축전이 오가던 끝에 파탄 나고 말았다.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협박’을 연출한 끝에 안드레아스가 살로메의 남편 자리를 차지했고, 후에 만난 릴케는 살로메의 모성을 자극하면서 한없이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졸라대고, 고집부리고, 공갈 협박까지 서슴지 않으며 ‘구애’라는 고전적 책략을 밀어붙였다. 살로메,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고스란히 ‘베르테르’의 후예들이었다. 하지만 로테와 달리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자 했던 살로메는 자기 동력에 따라 멈추지 않는 관계의 실험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완결도 클라이막스도 없는 길을 따라 수많은 ‘안녕’ (만남/헤어짐)을 이어나갔던 행적, 그것이 루 살로메의 정직한 얼굴이었지도 모른다. 그러니 살로메가 ‘팜므파탈/뮤즈’의 무시무시한 자석이라는 소문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팜므파탈’은 어쩌면 (구애에 실패한) 남자들이 지어낸 엄살이요, 헛소문은 아닐까?


2.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

 장미 꽃다발과 각종 선물을 매개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는 순진한 남자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자의 마음을 얻겠다는 당신의 노력은 … 결국 가학적 권력 의지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하고 운운한다면? 남자는 벌겋게 화를 내며 자신은 ‘변태’가 아님을, 순정한 남자의 뜻을 훼손치 말라고 강변할 가능성이 크다.

 
 “그이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 침 튀기며 애인 자랑에 여념이 없는 여자에게 “정말로 행복하십니까? 사랑받는다는 것이 간혹 얼마나 끔찍한 상태인지 아직은 알지 못합니까?”라고 말한다면? 여자 또한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보호자’인 애인한테 모든 걸 일러바치려 할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를 하든, 그들은 가던 길을 그냥 갈 것이다. 기꺼이 구속하고 구속당하면서 자신과 상대를 배신하면서 그렇게 사랑할 것이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돌아온 탕아’를, 애완됨을 견딜 수 없어 길을 떠난, 그리하여 소유가 아닌 사랑을 깨우치게 된 ‘성자’의 모습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탕아는, 상처에 민감했기에 적어도 남에게 상처주지 않으려는 바람직한 체질은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주지 않으려는 탕아의 노력은 결코 단순한 수동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저토록 힘겹다는 사실은 상처를 주는 행위란 무척 ‘쉬운 일’에 속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 사랑할 때마다 그는 상대방의 자유를 제약할까봐 두려워하며 자신의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감정의 빛으로 불태우는 대신, 그 빛으로 속속들이 비추는 법을 그는 서서히 배웠다. (말테의 수기, 267p)

 

 저렇게 예의바른 사랑의 풍경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저처럼 희귀한 사랑은 언제까지고 희소한 것에 머무를 것인가. 함부로 주고 함부로 받는 사디즘 - 마조히즘적 사랑의 유행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도대체 사랑하는데 ‘채찍’이나 ‘촛농’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상처에서 그 무슨 희열이 느껴진단 말인가? 그에 비하지면 김영민 선생이 쓴 <사랑, 그 환상의 물매>의 ‘연하디연한’ 사랑론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말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벌써 굳은살이?

3. ‘내숭’과 ‘새침’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비소유의 의지 또한 보여져서는 안 된다.
 (사랑의 단상, 310p)

구애 또는 성적 결합에의 암시를 받은 이에게는 어떤 선택이 있을 있는가? 수락 또는 거부의 의사표현만이 있을 것인가?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좋아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애매모호한, 때에 따라서는 상대를 화가 나게 할 수도 있는 이 말 속에는 두 가지의 공포가 겹쳐져 드러난다. 즉각적인 결합에  대한 공포와 영영 상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자는 이를 두고 (남자들의) ‘구애’와 짝을 이루어온 여자들의 오래된 고전적 책략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내숭’이나 ‘새침’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하지만 결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결합을 연기시키는 이러한 전략은 구애의 폭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무화시키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구애를 배제하는, 그리고 독점적 ‘결합’을 상정하지 않는 관계를 지향한다면 이러한 전략을 좀더 세련되게 발전시킬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르트가 말한,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그러나 완전히 감추지는 않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지 않겠는가.

 위의 책들을 읽고 난 후, 그려보게 되는 사랑의 풍경이란 이런 것이다. 남녀 모두가 ‘라르바투스 프로데오’ - 가면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바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면서, 또한 비소유의 의지는 숨긴 채로’ 완성 없는 유희의 긴장 속에 머물다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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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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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들의 자전소설, 또는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읽다보면 때때로 어떤 강박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예술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비범성, 천재성, 특이성에 대한 강박이다. 이방인의 정서, 열정의 과잉, 기벽 과 방랑, 자살기도, 남다른 애정편력, 불행한 가족사나 찢어질 듯 가난한 무명 시절, 기타 등등. 그것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나는 너무 정상적이다’ 라는 이상한 열등감을 심어준다. 흔히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 청년들이 폭음이나 가출, 드라마틱한 연애 등 이런저런 기행에 빠져드는 것도 예의 그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개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적인 예술관에는 리비도를 자극하는 ‘진득한 무엇’이 있다.

개성 과시형의 소위 ‘튀는’ 예술가들에게 익숙해져왔던 탓일까. 엘리엇의 ‘몰개성 이론’과도 통하는 모더니즘 미학의 견지에서 쓰여진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낯설고 지루한 느낌마저 준다.

조이스는 자신의 몰개성 미학을 주인공 스테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술가의 개성이란 처음엔 어떤 외침이거나 어떤 운율 또는 어떤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가 이후에는 무언가 유연하고 부드러운 이야기가 되며, 마지막엔 실체의 틀을 벗어나 스스로를 정제하는 말하자면 스스로의 개성을 삭제하여 몰개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거야…예술가란 창조의 신처럼 자신의 수공품 안에, 뒤에, 위에, 또는 그 넘어 보이지 않는 채, 실체에서 벗어나 정화되어, 무관심한 듯, 자신의 손톱만 매만지며 남아 있지.”

예술 창조의 길을 ‘개성화’와 ‘축적’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게 ‘몰개성화’와 ‘벗어나기’는 “이것이 무슨 소린가?”하는 의뭉스러운 물음을 뱉어내게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몰개성화’를 추구한 결과 당도하는 곳은 ‘평범’이 아니라 ‘고유한 개성’이라는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여 얻어지는 ‘개성’과 ‘몰개성’을 추구하여 얻어지는 ‘개성’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좀 단순하게 볼 때, 전자가 뜨겁고 리비도적이며 뭉뚱그려진 것이라면 후자는 서늘하고 지적이며 걸러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산수 식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모든 개성의 플러스의 총합, 후자는 마이너스 결과 남은 잔존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나, 종교, 민족, 국가 등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며, 장차 탄생하게 될 예술작품에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들게 된다. 소설 속 스테판 역시 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확장 내지 축적하지 않고, 단호히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달리 말하면 '개성화' 하지 않고, ‘몰개성화’한다. 그는 착실한 아들, 모범적 학생, 독실한 신자, 사제직에의 소명, 아일랜드의 국민이라는 주어진, 또는 쌓아온 자신의 정체성에 ‘반항’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몰개성’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얻어졌던 ‘개성’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뒤늦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시절부터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성적인 성격, 감각적 예민함, 언어에 대한 감수성, 외부세계와의 거리 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하기 등등. 그것은 그가 장남이고, 카톨릭 신자이고, 아일랜드 국민인 것과 상관없는 ‘고유한’ 영역의 것이다.

물론 스테판의 자아탐구 과정이 비고유한 것과 고유한 것을 뚝 잘라 나눠서, 고유한 것만을 취하는 식은 아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고유한 것을 추출해내는 과정에서의 비고유한 것과의 갈등, 그 긴장의 과정 자체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영혼’이라고 할 만한 정수를 들여다보게 되는데, 개인적인 상징이나 에피파니와 같은 영역은 무척이나 사밀한 부분이라 다가서기 어렵고 또, 불편하기도 하다. 조이스의 작품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제목만 보고 이 소설을 택하는 예술가 지망생들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스테판은 흉내 내어 볼 수 있는 예술가의 전범이라기보다 깊숙이 잠수했다가 솟구쳐 나와보지 않으면 접할 수 없는 까다로운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그를 모방할 수 없다. 하지만 제 자신의 고유함을 찾아 나설 수는 있다.

쉽게 끌리고 자극적이며 선망의 대상이 되는 로맨티시스트 예술가들과 달리, 모더니스트 예술가는 다소 난해하고 따분하며, 어딘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택하기보다는 이런 유형도 있고, 저런 유형도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아무래도 어려운 숙제를 하려면 참고서가 여러 권 있는 편이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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