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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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들의 자전소설, 또는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읽다보면 때때로 어떤 강박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예술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비범성, 천재성, 특이성에 대한 강박이다. 이방인의 정서, 열정의 과잉, 기벽 과 방랑, 자살기도, 남다른 애정편력, 불행한 가족사나 찢어질 듯 가난한 무명 시절, 기타 등등. 그것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나는 너무 정상적이다’ 라는 이상한 열등감을 심어준다. 흔히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 청년들이 폭음이나 가출, 드라마틱한 연애 등 이런저런 기행에 빠져드는 것도 예의 그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개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적인 예술관에는 리비도를 자극하는 ‘진득한 무엇’이 있다.

개성 과시형의 소위 ‘튀는’ 예술가들에게 익숙해져왔던 탓일까. 엘리엇의 ‘몰개성 이론’과도 통하는 모더니즘 미학의 견지에서 쓰여진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낯설고 지루한 느낌마저 준다.

조이스는 자신의 몰개성 미학을 주인공 스테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술가의 개성이란 처음엔 어떤 외침이거나 어떤 운율 또는 어떤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가 이후에는 무언가 유연하고 부드러운 이야기가 되며, 마지막엔 실체의 틀을 벗어나 스스로를 정제하는 말하자면 스스로의 개성을 삭제하여 몰개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거야…예술가란 창조의 신처럼 자신의 수공품 안에, 뒤에, 위에, 또는 그 넘어 보이지 않는 채, 실체에서 벗어나 정화되어, 무관심한 듯, 자신의 손톱만 매만지며 남아 있지.”

예술 창조의 길을 ‘개성화’와 ‘축적’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게 ‘몰개성화’와 ‘벗어나기’는 “이것이 무슨 소린가?”하는 의뭉스러운 물음을 뱉어내게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몰개성화’를 추구한 결과 당도하는 곳은 ‘평범’이 아니라 ‘고유한 개성’이라는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여 얻어지는 ‘개성’과 ‘몰개성’을 추구하여 얻어지는 ‘개성’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좀 단순하게 볼 때, 전자가 뜨겁고 리비도적이며 뭉뚱그려진 것이라면 후자는 서늘하고 지적이며 걸러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산수 식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모든 개성의 플러스의 총합, 후자는 마이너스 결과 남은 잔존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나, 종교, 민족, 국가 등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며, 장차 탄생하게 될 예술작품에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들게 된다. 소설 속 스테판 역시 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확장 내지 축적하지 않고, 단호히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달리 말하면 '개성화' 하지 않고, ‘몰개성화’한다. 그는 착실한 아들, 모범적 학생, 독실한 신자, 사제직에의 소명, 아일랜드의 국민이라는 주어진, 또는 쌓아온 자신의 정체성에 ‘반항’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몰개성’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얻어졌던 ‘개성’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뒤늦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시절부터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성적인 성격, 감각적 예민함, 언어에 대한 감수성, 외부세계와의 거리 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하기 등등. 그것은 그가 장남이고, 카톨릭 신자이고, 아일랜드 국민인 것과 상관없는 ‘고유한’ 영역의 것이다.

물론 스테판의 자아탐구 과정이 비고유한 것과 고유한 것을 뚝 잘라 나눠서, 고유한 것만을 취하는 식은 아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고유한 것을 추출해내는 과정에서의 비고유한 것과의 갈등, 그 긴장의 과정 자체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영혼’이라고 할 만한 정수를 들여다보게 되는데, 개인적인 상징이나 에피파니와 같은 영역은 무척이나 사밀한 부분이라 다가서기 어렵고 또, 불편하기도 하다. 조이스의 작품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제목만 보고 이 소설을 택하는 예술가 지망생들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스테판은 흉내 내어 볼 수 있는 예술가의 전범이라기보다 깊숙이 잠수했다가 솟구쳐 나와보지 않으면 접할 수 없는 까다로운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그를 모방할 수 없다. 하지만 제 자신의 고유함을 찾아 나설 수는 있다.

쉽게 끌리고 자극적이며 선망의 대상이 되는 로맨티시스트 예술가들과 달리, 모더니스트 예술가는 다소 난해하고 따분하며, 어딘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택하기보다는 이런 유형도 있고, 저런 유형도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아무래도 어려운 숙제를 하려면 참고서가 여러 권 있는 편이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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