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동네 시장을 지나다가, 과일 행상을 하시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점심식사 후의 인스턴트 커피 같은, 달짝지근한 풍미가 전해져왔다. 나도 그런 한때를 누려 볼까? 그러한 이유로 얼마 후, 나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어떨까? 내게도 달디 단 위로를 줄까? 궁금했다.

 이 책의 맛은 이러했다. 자판기에서 실수로 뽑은 ‘프림 커피’의 맛. ‘밀크 커피’에 길들여진 입은 당장 설탕 맛을 아쉬워했지만,『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는 한 스푼의 설탕도 들어 있지 않았다. 고단함을 하소연하는 나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한 잔의 쌉쌀한 맥주와 등 두드려주는 선배를 기대해선 안 될 것이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호프집의 조명처럼 그저 지친 이들의 추레한 표정을 비추어줄 뿐이기 때문이다.

「의심을 찬양함」이라는 단편을 보면 ‘토끼의 생존술’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토끼는 적을 발견한 순간부터 무조건 뛰기 시작한다고 한다. 아무 규칙 없이 왔다갔다 제멋대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적을 교란시키는 것, 그것이 토끼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러나 ‘좌표’가 없으면 늘 불안한 현대인들은 토끼의 방식을 쉽사리 취할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별자리 운세를 맹신하고, 애니어그램으로 사람들을 분류하며, 매뉴얼에 기대고, 지도 없이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좌표가 없으면 불안하기에, 시시한 좌표에라도 기대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맘 붙이지 못한 이들의 내면은 황폐하기 짝이 없다.「고독의 발견」에 등장하는 만년 고시생은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라는 질문에 이제 곧 지긋지긋한 책들을 쌓아놓고 고시원에 불을 지를 계획이라는 대답을 떠올린다. 마음의 건조주의보가 결국, 방화 직전의 상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궤도에 오르지 못한 인생은 저렇게나 불안하지만, 궤도에 오른 인생도 허탈하긴 마찬가지다.「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에 등장하는 출판사 사장은 한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배우거나 깨닫지 않는 순간이 없는’ 촉촉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점에 이르게 된 그는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라는 건조한 독백을 늘어놓게 되었다.

 궤도에 오르지 않으면 불안하고, 올라도 허탈할 뿐이라면 대체 어찌해야  걸까? 은희경 작가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는 대신,「지도 중독」에 나오는 P선배의 말 속에 메시지를 심어 놓았다.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라는 것이다.

 결국, 저마다의 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속에서 고독이나 의심을 견디는 방법 또한 다양할 것이다. 「의심을 찬양함」의 쌍둥이처럼 “나는 흉내 내는 가짜이거나 그림자이고, 내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고독의 발견」에 등장하는 난쟁이 여인처럼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대목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주인공의 한마디였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
 

 별자리 운세나 애니어그램, 매뉴얼과 지도가 아닌, ‘사람’을 좌표로 삼는 것이 조금은 더 현명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좌표로 삼은 사람 또한 계속 변화해갈 것이니, 그 길 또한 결코 쭉 뻗은 일방통행로일 수 없을 것이다. 방향도 없이 뛰는 토끼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 또한 부지런히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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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8-02-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낳고 휴가 중일 때, 책이 너무나 손에 안 잡히는 와중이었더랬는데요.
은희경의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라는 단편집은 끝까지 읽고, 덮을 수 있더라고요. 정말 읽혔다는 사실 하나로도 위안을 주었던 ㅎㅎ

점심 식사 후의 인스턴트 커피맛의 이 소설집 몹시 궁금하여요!

자일리 2008-02-21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나실 때, 한번 읽어보셔요~
칼로리는 낮고, 카페인은 높답니다^^

2008-03-12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키노 2014-10-1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맛을 모르니 글이 다가 오지 않고 맴도는 ......,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에서 출판하고
편집자로 동명이인인지
아님 본인이 맞으신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