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토끼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남자아이들이 백보드를 나사로 박아놓은 전신주 주변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다리들, 외침들. 케즈 운동화가 골목에 느슨하게 박힌 자갈들을 긁고 튀기며 아이들의 목소리를 전깃줄들 위로 파랗게 보이는 축축한 3월의 하늘로 쏘아 올리는 것 같다."(9)



어느 순간인가, 내가 읽어야 할 작가 중에 '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 치버, 존 버거, 존 업다이크. 그 이름들이 떠오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시간이 있었다. 시작은 레이먼드 카버였을 것이다. <대성당>을 제대로 읽은 후 카트에 존 치버, 존 버거, 존 업다이크를 차례로 담았다. 셋 중에 아직 존 버거만은 읽지 못했다(일이 없을 때 부지런히 읽으려 하지만 읽는 속도 자체도 느려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존 치버를 읽을 때는 그것이 이제 미국식 고전이 되어버린 소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케묵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면서 써내려간 <팔코너>는 궁금했다(단편에서 보여주는 해석적 기질이 어떻게 광기에 사로잡히는지). 애초에 <달려라, 토끼>는 재정상태가 제한적인 내 카트 안에서 <팔코너>에게 밀려날 뻔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존 치버는 읽었으니 존 업다이크를 읽어야겠다는 순차적인 마음이 <달려라, 토끼>를 카트로 복귀시켰다. 그렇게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 나에게 온 토끼는, 봄이 시작될 무렵에서야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그것이 지난 밤의 일이었다).



<달려라, 토끼>는 제목이 스포일러인 소설이지만,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소설의 의미가 반감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 소설에서 주인공 래빗 앵스트롬이 하는 일이라곤 여기저기로 달려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탈주하는 사람이다. 탈주에 관한 그의 의도가, 의도치 않은 상황들과 얽혀 래빗 앵스트롬은 어디서건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심지어 그가 죽이지 않은 아이까지도 '제정신이 아닌 아내를 두고 집을 (몇 시간 정도)떠난 남편'이라는 죄명으로 그를 살인자로 몰고 간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사건들 때문에 여러 인물들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는데, 아내인 재니스와 내연녀인 루스, 그를 감화시키려는 잭 에클스 목사와 그의 부인, 은사인 토세로 등이 그를 둘러 싸고 있다. 그 외에 래빗의 아이들, 양가 부모들이 있다. 이 인물들이 모두 결정적인 까닭은, 래빗이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래빗은 그들로부터 원하는 것이 없다. 그의 욕구는 탈주와 섹스 뿐인데, 주변은 래빗에게 그 두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원한다. 래빗을 동정하는 입장에서라면, 탈주와 섹스에 대한 욕구는 타인의 강요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래빗식의 해결로 보이기도 한다(하지만 도덕적인 문제를 동정의 시선으로 감당하기에는 래빗의 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또 다른 시작인 듯, 독자는 또 하나의 탈주를 목격하게 된다. 그 때 래빗은, 방향은 없고 동작만 남은 사람의 초상으로, 소설 밖을 횡단하는 것 같다. 그 탈주가 성공적이라면, 그것이 소설(세상) 밖이라는 지점을 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소설의 시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이것은 내러티브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이기에), 소설은 3인칭으로 전개되지만 시종일관 래빗의 시선을 따라간다는 느낌을 준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래빗 전지적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보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을 보려 하는지 문장을 통해 지겹도록 깨닫게 한다. 



  "스프링어가 식료품실에서 오레오 쿠키 두 개를 꺼내자, 갑자기 넬슨이 달려가 그를 껴안으려 한다. 스프링어는 포옹을 받아들이려고 허리를 굽힌다. 시들어버린 멋쟁이 얼굴이 아이의 뺨에 닿자 표정이 텅 비어버린다. 두 팔이 아이를 꼭 끌어안자, 얇은 테를 두르고 금으로 스프링어의 S를 새겨놓은 크고 검은 네모난 커프스단추가 상의 소매에서 기어나온다."(390)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도 모든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처음에 50여 페이지는 읽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는데, 지나친 묘사로 독자의 시선을 계속 미끄러지게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설에서 이루는 불균형은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존 업다이크는 부러 긴 문장을 통해, 볼 수 있는 곳까지 보려는 노력을 통과하는 작가이다. 그런 작가를 세련미가 있다는 정도로 말하면, 말하는 쪽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감히 말할 수 없는, 쉽지 않은 소설이다. 



아주 천천히 지난 겨울을 함께 보낸 소설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나는 존 업다이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길어질 수도 없고, 길어지지도 않으려 해야겠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토끼 4부작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이 <달려라, 토끼>뿐이라는 것이다(번역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하지만, 기다리는 독자는 늘 이런 식이다). 30세가 되기 전 전업작가로 들어서 일흔 여섯으로 사망할 때까지 주 6일을 글만 쓴 이 부지런한 작가에 대한 국내 번역이 너무 없다. 그것이 아쉽지 않다면, 뭐가 아쉬우려나. 앞으로는 좀 더 많은 존 업다이크와 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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