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에 대한 서평 하나 올립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릴 글인데, 아직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니까  

혹시 인용하시거나 논평하실 분은 [창작과비평] 가을호 원문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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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보다 더 플라톤주의적인 예술론

 

알랭 바디우는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곧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에서 체계적인 철학자다. 유럽철학과 영미철학을 막론하고 오늘날 저술 활동을 하는 철학자 중에서 알랭 바디우만큼 체계성을 철학의 핵심으로, 철학이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이자 의무로 간주하는 철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비미학}은 그의 철학의 체계성이 두드러지는 책들 중 하나다.

이 책에서는 ‘비미학’이라는 특이한 제목이 먼저 관심을 끈다. 바디우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비미학은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관계에서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도 예술을 철학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5면) 어떤 의미에서 이 책 전체는 이 정의에 대한 부연 설명이자, 이 정의의 예시 또는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의 첫 부분은 이 책의 관심이 철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재정립에 있음을 시사한다. 바디우는 이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전통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지도적(플라톤적) 도식의 테제는 예술은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것 또는 모든 진리는 예술 밖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가장하는 직접적인 진리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고 철학이 예술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 낭만적(또는 해석학적) 도식에 따르면 예술만이 진리를 담을 수 있으며, 예술은 참의 현실체다. 세 번째 고전적(아리스토텔레스적) 도식에서도 예술은 진리를 담을 수 없지만,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술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카타르시스이며, 예술의 규범은 영혼의 감정을 다스리는 유용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 세 가지 도식은 각각 예술에 대한 맑스주의적(지도적), 정신분석적(고전적), 해석학적(낭만적) 관점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 바디우의 핵심 테제는, 이 세 가지 도식이 오늘날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제 “새로운 도식, 철학과 예술을 맺는 네 번째 도식을 제안”(22면)해 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네 번째 도식, 곧 비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예술은 철학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바디우는 이것을 내재성과 독특성이라는 범주로 규정한다. 곧 진리는 예술 작품의 예술적 효과 안에 있지 외부에 있는 어떤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술과 진리의 관계는 내재적이다. 또한 예술이 말하는 진리는 절대적으로 예술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다. 따라서 비미학은 매우 역설적인 또는 매우 기묘한 철학적 과제가 된다.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지만, 그러한 진리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게 될 것 같다. 왜 예술이 이러한 진리를 필요로 할까, 그것은 철학의 관심사가 아닐까? 또는 바디우 자신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그것은 철학에 의한 예술의 통제 내지 포섭의 시도, 예술에게 진리 생산의 권리를 전적으로 부여하는 만큼 더욱 더 교묘한 포섭의 시도가 아닐까? 이것은 비미학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해명되어야 할 의혹이다.

따라서 2장 이하에서 시와 산문, 연극, 춤, 영화 같은 예술 분야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책에서 특히 부각되는 것은 말라르메와 베케트이며,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말라르메의 시다. 바디우는 말라르메의 시와 베케트의 산문 사이에는 (거의) 완전한 대응이 존재하지만(222면), 그럼에도 유일한 차이가 남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설가가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잠을 허용하지 않는” 데 반해, “말라르메의 경우에는 시적인 작업 이후에도 물음의 중지, 즉 구원적인 중단을 통해 그림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223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이 책을 비롯한 바디우의 여러 텍스트에서 말라르메의 시가 예술의 전범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라르메야말로 “사유로서의 예술”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시인이며, 시 “자신의 정체성이 사유”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라르메로 대표되는 현대시가 “언어의 살 속에서 선사된 어떤 사유의 실제적 존재”가 아니라 “이 사유가 스스로를 사유하는 데 쓰이는 모든 작용의 집합체”(43면—번역은 수정)라는 점을 의미한다. 곧 현대시는 세계를 모방(또는 반영)하거나 기술하지 않고 어떤 의미를 표현하지도 않으며, 철학적인 설명이나 해석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채, “언어의 한계에서 도래하는 현전으로서의 다수에 관한 진리를 만들어낸다.”(46면) 시는 “있음il y a”의 순수 관념을 현재화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바디우의 비미학이란 플라톤주의적 예술론, 따라서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 반(反)리얼리즘적인 예술론임을 말해준다. 시 또는 예술을 세계의 모방이나 반영과 무관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현전 그 자체의 구현이 아니라 “사라지려는 것을 붙잡아놓음을 통해 사건을 명명하는 모든 행위”(55면)를 시적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러한 예술의 과제, 이러한 활동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진리의 능력이 없는, 따라서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플라톤이 진리의 이름으로 예술을 추방하려 했던 것에 비해 바디우는 오히려 진리의 이름으로 예술을 복권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론은 플라톤보다 더 플라톤적인 예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미학은 예술 일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어떤 예술, 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예술들, 또는 그것에 속할 만한 몇몇 작품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절차 및 짜임에 관한 이론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의 비미학은, 그의 철학 자체와 마찬가지로 매우 폭력적이다. 그는 독자들을 무관심하게 놓아두지 않으며, 선택을 강제한다. 예수가, 루소가 자유를 강제했듯이, 그는 진리를 강제한다. {비미학}은 그 강압의 힘과 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물론 아쉽게도 그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의 비미학 역시 많은 추종자를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을 필연화하는 것이 또 다른 사유의 의무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공들인 번역이고 가독성도 무난한 편이지만, 간혹 몇몇 개념들을 너무 풀어쓰는 바람에 그 개념의 소통 가능성이 제약 받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예술의 철학적 정체성 찾기”(23면)에서 “정체성 찾기”는 “identification”의 번역인데, 이런 번역은 개념만이 아니라 문장의 의미 전달까지도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identification’은 ‘정체성 부여’로 고치고, 해당 구절은 “예술에 대한 철학의 정체성 부여는”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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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효과-사망 20주년, 알튀세르를 다시 생각한다]는 제목으로 알튀세르 심포지엄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짧은 글을 하나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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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에게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라는 이름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제가 약 1년 전에 알튀세르에 관한 공동 논문집을 기획하고 또 이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계속 품고 있었던 질문입니다.

아마도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철학자 중에서, 또 프랑스 철학자 중에서도 세대에 따라 가장 인지도 편차가 큰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40대 이상의 독자에게 그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른바 ‘한국사회성격논쟁’과 ‘맑스주의 위기론’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당시 웬만한 인문사회과학도라면 누구나 그의 책을 한 권쯤 소장하고 있었고, ‘과잉결정’(또는 중층결정)이나 ‘호명’ 같은 그의 주요 개념들은 가장 널리 운위되던 지적 담론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오늘날 20대 독자에게 그는 에티엔 발리바르나 슬라보예 지젝 또는 자크 랑시에르나 알랭 바디우의 이름과 함께 간혹 거명되는 이름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

나머지 내용은 아래 주소를 방문하시면 읽을 수 있습니다. :) 

 http://althusser.greenbee.co.kr/categor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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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올해가 알튀세르가 사망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조촐하게' 알튀세르에 관한 심포지엄을 하나 기획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뜻을 같이 해준 분들이 많고 그린비 출판사에서 열심히 노력해주셔서  

준비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아래는 심포지엄 웹자보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된 주소에 가시면  다른 관련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직 자료들이 많이 올라와 있지는 않은데, 조만간 여러 자료들이 올라올 테니  

자주 가보세요.^^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블로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althusser.greenbee.co.kr/categor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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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신문]에 실은 글 하나 올립니다.

 제가 얼마 전에 번역, 출간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역자가 직접 자신이 번역한 책을 소개한다는 게 약간 낯설긴 한데,  

어쨌든 [교수신문]에서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줘서 발리바르의 책을 간략하게 소개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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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종언 속에서 ‘시빌리테’ 정치 제안
[책을 말하다]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우리, 유럽의 시민들?』(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2010년 06월 14일 (월) 13:41:08 진태원 고려대 HK연구교수·철학 editor@kyosu.net
 

현재 파리 10대학(낭테르) 명예교수이자 미국 캘리포니아대(어바인) 특훈교수로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는 지난 1980년대 한국 사회성격논쟁 당시 이른바 ‘PD’파의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해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비롯한 최근 발리바르의 저작들은 매우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론하지 않고 잉여가치론이나 사회계급에 대해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 대신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의 정치, 국민국가, 反폭력, 국경 등을 주요 연구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발리바르가 사회민주주의자가 됐다, 자유주의자가 됐다는 식의 평가가 국내외에서 제기되기도 한다. 그가 정말로 ‘변절’을 한 것인지 여부를 여기서 따질 생각은 없다. 그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비롯해 앞으로 번역ㆍ소개될 발리바르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직접 판단하면 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그가 이 책 및 다른 저작들에서 지식인들과 활동가들 및 대중들을 위해 아주 시의적절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더 나아가 매우 설득력 있는 답변들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점이 아닐까.

좌파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진단


지난 1990년대 이래 발리바르는 세계화와 유럽 건설이라는 이중적인 정세에서 좌파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공공 영역이 잠식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거의 상식이 됐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 반세계화 투쟁이 전개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다양한 분석과 진단을 내놓고 있지만, 좀처럼 좌파 정치의 재개를 위한 실마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왜 그럴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발리바르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답변은 좌파 정치를 비롯한 근대 정치가 근본적인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근대 정치의 모순, 곧 한편으로 보편적 인권 및 시민권의 확립과 다른 한편으로 국적에 의한 시민권의 한정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통해 해명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이래로 민주주의 국가의 헌정은 보편적 인권 및 시민권을 기초로 제정되고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舊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근대 국가는 국민 국가로, 또는 발리바르의 개념에 따르면 ‘국민사회국가’로 존재해 왔다. 국민사회국가는 사회권을 시민권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각각의 개인이 물질적으로 자립하고 안정된 삶을 꾸릴 수 있는 조건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보편적 시민권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권리를 국민에게만 한정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그는 ‘시민권=국적’의 등식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은 세계화가 전개되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해준다는 장점을 지닌다. 우선 이것은 사회권이 축소되고 사회적 시민권이 약화되면서 노동자 계급 중 다수가 ‘재프롤레타리아화’되고 빈곤이 확대되는 경향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것은 세계화와 동시에 유럽 각국에서 극우 민족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이주자가 배제 및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사회권 축소의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하층 계급들이 자신들의 피해의 원인을 이주자에게서 발견하고, 극우 정당들은 이러한 증오에 편승해 세력을 확장해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의 설명은 근대 시민권 헌정의 기본 한계를 밝혀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근대 시민권 헌정의 한계는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을 구현한다는 그 자신의 주장과 달리 근본적인 배제(시민권=국적)를 기반으로 구성됐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유럽 연합이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배제의 체계로서의 근대 시민권 헌정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가 관건이 된다. 이것은 비단 유럽 연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각각의 국가 또는 각각의 정치체의 탈-근대적 과제가 된다.

근대 시민권 헌정의 기본 한계 밝혀내


발리바르의 두 번째 답변은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시빌리테의 정치란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폭력, 특히 극단적 폭력의 퇴치 및 감축을 목표로 삼는 반폭력의 정치를 의미한다. 그는 시빌리테의 정치를 고전적인 해방의 정치 및 마르크스와 푸코가 이론화한 변혁의 정치와 함께 정치의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를 이룬다고 간주한다.


그가 이처럼 시빌리테의 정치를 중시하는 것은 종래의 정치가 폭력의 문제에 맹목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해방과 변혁의 정치의 경우 이러한 맹목은 좀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정치는 자신이 피억압자들의 관점에서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 폭력을 타파하고 해방을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활동의 해방적인 성격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이 산출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더욱 더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또 그만큼 그것이 주장하는 해방의 정치는 억압과 배제의 정치로 전도되기 쉽다. 실제로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해방과 변혁의 정치사상에 내재한 이러한 맹목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종언을 맞이하게 된 근본 원인 중 하나를 여기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해방 및 변혁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폭력을 정치하게 분석하고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조건과 수단을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전언 중 하나다. 


이러한 두 가지 답변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독창성을 인정받을 만하지만, 이 책에는 그밖에도 ‘국민 형태’와 민족주의에 대한 정교한 분석, 시민권 및 주권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 고찰, ‘민주주의의 反 민주적 조건’으로서 국경에 대한 탐구 등이 담겨 있다. 정치철학자로서 발리바르의 탁월한 장점은 현실의 정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심한 분석에 기반해 정치 사상사의 주요 주제들을 새롭게 개념화하는 능력에 있는데, 이 책은 그의 이러한 장점이 뚜렷하게 잘 드러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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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ffany jewelry 2010-07-0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라 다 괜찮을거야
 

 

 

 

 

 

 

 

 

5월 31일자, 어제 날짜로 출간이 됐네요. 그동안 원고 교정 보고 책 만드느라 수고하신 후마니타스  

편집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책의 출간을 기다리면서 성원해주신  

여러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한국에서 의미 있는 흔적들을 남기기를 기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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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철 2010-06-0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태원 선생님의 노고에 그야 말로 감사드립니다. ^^; 게다가, 보도자료에 필요한 질문까지 너무 충실히 답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번역작업을 거치며, 많은 부분들을 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다행히, 오늘 연합에 나름 비중있게 다뤄졌네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306609

이잘코군 2010-06-0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새 책 출간 축하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6-02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balmas 2010-06-02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선생님/별 말씀을요.^^ 원고를 너무 늦게 드리고 게다가 계속 원고 기한을 넘겨서 넘 죄송했습니다.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빨리 드릴게요.^^;
아프락사스님/ 책이 나올 때마다 늘 제일 먼저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그레이효과님/ 예 고맙습니다.^^

Kitty 2010-06-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나 축하드려요!!!!
두툼한 책 분량을 보니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셨을지 짐작만 해보네요.
대박나시길!!!!!!!!

... 2010-06-0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군대 가기 전에 나오는군요 ㅎ

아직 선거 결과는 안나왔지만 아무래도 최악의 결과는 아닌 것 같은데, 더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balmas 2010-06-03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 고맙습니다.^^ 대박은 기대도 안합니다. ㅋ
... 님/ 군대 가시는군요. 건강하게 다녀오시길. 글쎄 말입니다. 그동안 언론에서 크게 부각시키던 여론조사 결과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네요.^^

thomas sabo 2010-07-0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프락사스님/ 책이 나올 때마다 늘 제일 먼저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그레이효과 님/ 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