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한국의 출판기획자>(5)시인 최승호

출판코너를 채우기 위해 그간 나름대로 찾다보니 "문화일보"에서 괜찮은 기획을 진행했었더군요. 기획 제목은 "한국의 출판기획자를 찾아서"인데, 출판에 있어 기획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겁니다. 책을 구해 읽다보면 작게는 단행본 한 권의 기획, 크게는 총서나 전집과 같은 시리즈 기획물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편집을 "선택과 배제"의 원칙에 따른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자는 직접 글을 써서 자신의 의중을 전할 때도 있지만 이렇듯 "선택과 배제"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의중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현대 출판 100여년의 역사에서 '기획'은 가장 뒤늦게 발견된 분야이기도 합니다. 70년대말에야 비로소 기획자란 이들이 등장한 셈이니까요.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기획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기획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 시리즈를 읽다보면 저절로 문리가 트이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하면서 새로운 시리즈의 퍼 나르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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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출판기획자>(5)시인 최승호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kr 
 
“편집자는 인연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경우 어떤 기획을 할때 옆에서 도움을 준 좋은 인연이 참 많았어요. 내가 한 것은 시점의 선택 정도라고 할까요.”

시인 최승호(47)씨는 출판기획자로서 자신의 모든 공로를 함께 일한 선·후배 등 주변의 동료들에게 돌렸다. 출판계에서 이미 그의 기획으로 소문난 작품들에 대해서도 동료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자신이 이들에게서 받은 도움에 감사해할 뿐이었다. 반면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듣고(이재룡 숭실대교수) 후배 편집자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켜준 ‘큰 스님’ 같은 분(함정임 전 세계사 편집장)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편집자 최승호는 대단히 낯설게 보일 수 있다. 이는 최승호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가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은 혼자 있는 명상의 시간과 시를 쓰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불안과 갈등 때문이었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편집자로서의 정체성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그러나 “시인보다 기획자쪽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출판기획자로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겼다”(정홍수 문학동네 편집장)는 평가를 받을 만큼 시대를 앞서간 탁월한 기획물을 많이 내놓았던 것이 또한 바로 그였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편집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와 함께 일했던 후배 편집자들이 지금 우리 출판계를 이끌고 있는 전문편집자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최승호씨가 출판기획자로서 가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영준 전 민음사 주간, 박상순 민음사 주간,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정홍수 문학동네 편집장, 함정임 전 세계사 편집장, 이상희 전 고려원 편집장 등 이른바 ‘최승호 사단’으로 불리는 면면을 보면 그로부터 비로소 현대적인 의미의 편집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출판계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춘천교대를 졸업하고 강원도 정선과 사북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던 최씨는 82년 4월19일 민음사가 공모한 제6회 ‘오늘의 작가상’에 ‘대설주의보’외 49편의 시를 응모한 뒤, 교직 의무연한이 끝나는 4월30일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올라온다. 그때부터 ‘전업 시인’인 동시에 출판기획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해 5월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씨가 직장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박맹호 민음사 사장과 심사위원이었던 김우창·유종호·최인훈 씨 등이 상의 끝에 홍성사에 소개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금성출판사에서 몇달간 아동학습백과 만드는 일을 하다가 춘천으로 내려갔던 그는 다시 서울에 올라와 1년 정도 KBS 출판부에서 단행본 교정을 맡기도 했다.

최씨가 기획편집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85년부터 3년반 남짓 고려원에서 편집주간을 맡으면서부터. 잡지 창간을 유달리 많이 했다는 그의 경력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춘천교대 시절 은사였던 이승훈 한양대교수와 함께 창간한 계간 ‘현대시사상’을 통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의 작품과 외국 시론 등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현대시사상’외에 세계사의 계간 ‘작가세계’와 민음사의 ‘민음동화’, 현재 일하고 있는 환경운동연합의 계간 ‘함께 사는 길’ 등이 그가 참여해 만든 대표적인 잡지들이다.

이중에서 88년 최씨가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만든 세계사에서 89년 창간한 ‘작가세계’는 매호 선정된 국내작가 1명을 특집으로 집중조명하는 방식을 통해 화제가 됐던 기획이다. 현재 거의 모든 문예지들이 이같은 포맷을 흉내내고 있을 정도다. 세계사의 경영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90년을 전후해 1년 정도 머물렀던 민음사에서 창간한 ‘민음동화’는 비록 단명에 그쳤지만 민음사의 자회사로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인 비룡소가 만들어진 배경이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와 선(禪)의 대중화에 기여한 고려원의 ‘다르마 총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리즈로 평가받았다. 나중에 세계사의 ‘마음글방’시리즈로도 연결된 데서 알 수 있듯 시세계나 출판기획자로서의 최씨의 경우 불교를 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외모나 행동거지, 말투를 보면 가사만 안입었을 뿐 구도의 길을 걷는 선승(禪僧)을 생각나게 할 정도다.

75년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할 당시부터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여러 출판사에서 불교 관련 총서를 출간하고 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신도가 아닌 일반대중의 욕구까지 충족시켜주는 기획물이란 전무했던 점에서 ‘마조어록’‘임제록’‘조론’‘장자’ 등 선사어록과 경전류를 한글세대가 친숙하게 읽을 수 있게 풀어낸 ‘다르마 총서’는 해인사 장경각에서 나온 ‘선림고경총서’등 이후 출간된 유사한 시리즈들의 전범이 됐다.

최씨는 당시 해인사 성철스님의 문도에게 불교책 출판의 중흥을 위해 종파를 초월한 큰 출판사를 만들어 같이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할 정도로 이 분야에 애정이 컸다.

최씨의 기획은 당시 출판기업을 지향하고 있었던 고려원이 문학적 향기를 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작가 박영한·조성기·이윤기씨등의 작품이 최씨의 기획으로 고려원에서 활발하게 출간되었다. 기업적 풍토에 잘 적응못한다는 평가도 있으나 고려원 시절 홍성유의 장편소설 ‘인생극장’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않자 ‘장군의 아들’로 제목을 바꿔 베스트셀러로 만든 일화가 출판계에서 회자될 정도로 대중적인 출판감각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출판기획의 본령은 세계사 시절 ‘세계사시인선’이나 프랑스·독일의 외국문학 번역을 통해 보여준 안목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100권을 돌파한 ‘세계사시인선’은 최씨가 기획을 맡았던 초창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의 작품을 출간하면서 창작과비평사·민음사·문학과지성사의 시인선들과 비교될 정도의 성가를 얻었다. 이연주·김언희·이수명·성미정·박상순 등이 ‘세계사시인선’을 통해 발굴된 대표적인 시인들이다. 불문학자인 이재룡 숭실대교수와 함께 르 클레지오, 장 필립 투생 등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프랑스 소설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것도 우리 문학계를 풍요롭게 한 기획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승호 사단으로 분류되는 후배 편집자들 가운데서도 박상순·정은숙씨는 최씨가 발굴하고 키운 대표적인 사람에 속한다.출판인으로서 양식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최씨는 작품이 좋으면 책이 안팔려도 출판해야 한다는 소신을 보여줬다. 박상순씨에게 북디자이너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데서 알 수 있듯 최씨는 작가나 작품을 보는 안목뿐 아니라 책의 디자인이나 장정, 광고카피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후배 편집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출판기획자로서 선·후배 작가를 예우하고 후배 편집자들을 격려하는데 언제나 한결같고 빈틈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현재 환경운동연합에서 스스로 자기 월급을 깎아가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선승(禪僧) 같은 그의 몸가짐이다.


출처: 문화일보 200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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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마립간님께 - 2

마립간님,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
어제 오후는 다른 일로 차분히 글을 읽거나 쓸 수가 없어서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1. 우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저는 토론이라는 것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방과 생각을 교류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거나 상대를 나의 생각과 같게 교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나 수학의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진위를 밝혀낸다는 것이 무척 어렵고, 그 주제가 ‘가치’와 관계될 때에는 하나의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생각을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구요.

2. 제가 지난 번 마립간님의 글에 답글을 단 이유는 ‘이타적인 행위’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이타적인 행위는, 즉 좀더 큰 ‘우리’를 위한 행위의 필요성에 의해 우리 본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2.1 사회생물학

사회생물학 논쟁을 촉발시킨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보면, 윌슨은 ‘이타주의’에 책의 한 chapter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타적인 행위는 한 개체에는 불리하지만 인간이라는 공동체에는 이익이 되고, 이 때문에 실재로는 이타적인 것도 이기적인 본성의 발로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장과 주부가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 국가가 위기에 놓였을 때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한 개체의 희생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확대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2.2 종교와 본성.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볼 때, 그 가르침에서 이른바 ‘원시 종교’와 다른 주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그것도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입니다.

악의 퇴치와 기복의 차원을 넘어선,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들과 나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류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이타적인 메시지는 작은 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인 인류 차원의 포용을 가르치는데, 이것이 인류 역사에 뿌리내렸다는 것은 이런 메시지에 공명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설사, 제국의 성립시기에 부족적인 기복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에 의해 선택된 종교라 하더라도, 그 메시지에는 분명 보편성이 있고, 우리에게는 그 메시지에 공명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3.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른 문명을 이루게 된 주요 요인으로 - 불의 발견 이외에 - 농경의 시작과, 레비 스트로스가 지적했듯이 ‘근친결혼 금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공통된 특징이 미래를 위해 당장의 이익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립간님께서 예로 들으신 모아새 뿐 아니라 많은 생물들을 멸종하게 한 우를 범한 반면, 농경과 가축을 발명해 냈습니다. 즉, 식량이 되는 식물과 동물을 지금 베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을때까지 기다리는 것, 당장의 식량이 부족하더라도 내년의 농사를 위해 열매의 일부를 남겨 겨울을 나는 것은 인간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사회에 성적 도덕이 문란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우자 이외의 대상에 대한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특히 가까운 친족간의 결혼을 금기로 하는 것은 어떤 미개한 부족사회를 가더라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사회의 특징입니다. 이 역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당장의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회와 종족의 보존에 더 유리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숙제나 공부 같은것, 물론 밀리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현재의 노동력을 공부에 투자함으로써 미래의 더 큰 생산성을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미래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욕망 혹은 이익을 보류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독특한 행위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두고 농경을 발전시킨 면을 볼 것인지, 동물들을 멸종시킨 면을 볼 것인지,
교육이라는 문화를 볼 것인지, 아니면 숙제와 공부를 미루는 심리를 볼 것인지,
결혼과 근친결혼 금기를 볼 것인지, 아니면 문란한 성도덕과 범죄행위를 볼것인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중도덕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 새치기 하는 사람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에는 각자의 시각차가 있겠습니다.

단, 앞부분의 특성을 무시했을 때, 인간이 인간으로서 현재와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 인간의 도덕성은 더 강하게 진화가 될 것인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인간들이 현재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현재의 시스템으로 얼마나 더 문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고 봅니다.

4.1 의사 결정 과정의 문제

인간은 인간 역사의 90% 이상을 부족사회로 지내왔습니다. 부족 단위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의사 결정 과정이 비교적 공정하고, 빈부격차도 크지 않습니다. 집단 내의 동질성도 큽니다. 그런데 인류가 점점 큰 단위의 공동체와 국가를 이루어 살게 되면서 집단 내의 동질성도 떨어지고, 의사결정 과정이 상층부의 권력계층에 집중되게 됩니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 의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사람들은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대의제니, 대표 소환제, 지방자치제, 이익집단의 등장 등, 점차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고안해 왔습니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개인이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대중’으로서의 의사결정이 매우 미숙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이끌 지도자는 키워지지 않고, 그때그때의 여론에 정치가 휩쓸리는, 그리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편, 의사 결정의 문제에서, 한 지역의 현안울 결정할 때 그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배재한 채, 중앙정부에서 밀어붙이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새만금 간척사업, 부안의 원전폐기물 저장소 건설 문제, 천성산 공사 문제 등은 그 사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당사자의 의견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부작용이 컸습니다. 필요한 일은 진행하되, NIMBY 현상을 배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아직 우리는 고안해내지 못했습니다.

4.2 인간의 얼굴을 한 시스템

부족시대에는 부족원들의 친족관계도 동질성이 있었고, 사회의 빈부격차가 있어도 한 공동체 내에서 소외되어 죽어가는데 한쪽에서는 그런 계층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채, 혹은 알더라도 무시한 채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했다고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없도록 시스템을 복원해야 합니다. 최소한 인간적인 삶과 죽음을 영유할 수 있는 사회는 그 수혜자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갈등과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도 줄일 수 있습니다.

계층간의 언어와 세계관과 가치관이 요즘처럼 갈라지고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한다는데 이런 일이 오히려 심화되는 것은 시스템이 거대화 되어가면서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기 때문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보지 않고 ‘자본가’와 ‘노동자'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사람으로, ’빨갱이‘와 ’보수 꼴통‘으로 보면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는 겁니다.

이제는 ‘발전’이라는 단어의 뜻을 ‘인간의 얼굴’을 찾아가는 것과 동의어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4.3 자본주의, 그 경쟁력!

이런 사회와 시스템의 물적 바탕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입니다.

금년 초(2월 9일)에 올린 페이퍼 “발자국 - 북방계와 남방계 - 오늘날은?” 에 설명한 대로, 현재의 경제사회체제는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체제라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가장 경쟁력이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분명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장경제가 인류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한 바가 크고,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객이 전도된 듯 합니다. 인간의 생명보다도 자본의 이익과 특허권이 존중되고 있고, 수백 수천년 한 곳에서 살아온 부족이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기업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납니다. 분명히 재생가능한 에너지체제가 실현 가능한데도, 석유/자동차 산업계와 원자력 산업의 로비가 더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체제를 이루면서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삼켜지지 않을 대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실천으로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 개인이나 집단, 심지어 몇몇 국가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국제연합이나 WTO 등의 초국적 시스템을 만들었던 인류이니만큼, 초국적 대안운동도 가능하기를 희망합니다.

5. 그간의 마립간님의 글에서 보수적 - 아버지의 원리 - 사고가 지배하는 것은 익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종교적으로 개신교이신 것과 일맥 상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신교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분들도 많습니다만.... )

분석적 사고는 타고난 것일 것이고, 종교는 어려서 주어진 것이든지, 본인의 선택이겠지요.

개신교에 따라 보수적 원리를 따른다기보다는 마립간님의 보수적인 성향이 개신교를 선택하게 했고, 개신교의 성향이 그 보수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선택해 주셨다’고 하시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립간님의 과학적, 분석적 사고의 틀과 개신교는 어쩐지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아직 종교 - 개신교 - 가 마립간님의 분석적 사고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의외입니다.

6. 자발적 가난과 녹색당..... ^^ 먼 길을 돌고돌아 의외로 또 일치점이 생기는군요.

저도 지속가능한 인류의 문명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치관과 사회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정치적 성향도 - 원래 회색분자라 자처하지만 - 굳이 정당을 선택하자면 녹색당에 가깝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서늘한 밤입니다. 평안하세요.


가을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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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프랑스 책을 싸게 구하는 노하우를 질문하셨는데, ㅎㅎ
이렇게 좋은 정보를 공짜로 얻으려고 하시다니요???^^

제가 프랑스 책을 구입할 때 자주 이용하던 서점은
"Furet du Nord"라는 프랑스 릴(Lille)시의 서점에서 개설한 인터넷 서점으로,
주소는 www.furet.lalibrairie.com입니다.
이 서점은 다른 프랑스 인터넷 서점들과 달리 배송료가 10유로(원화로 하면 14,000원 가량)로 정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권을 주문하든 백권을 주문하든 똑같이 10유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저같이 책을 매달 여러권씩 사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리하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이제는 이 서점을 이용하기가 좀 어려울 듯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존 같은 데 책을 주문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다른 인터넷 서점들은 주문과정 및 결제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서점의 주문시스템, 특히 결제 시스템은 문제가 많아서 에러가 자주 발생합니다. 특히 문제는 국가를 입력할 때 아무리 "남한Coree du Sud"라고 입력해도, 서점측에서 받아볼 때는 "France"라고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국가주소가 잘못 나오게 되면, 주문한 책이 무사히 모두 입고되어 결제를 마치고 발송을 해도, 당연히 결국 서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주문은 취소가 됩니다.

그러면 원래 주문했던 금액은 이미 카드결제가 다 끝난 상태여서, 최상의 경우 다음달에 카드로 다시 상환되거나, 아니면 나쁜 경우에는 프랑스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가 집으로 날아옵니다. 이렇게 수표가 오면 현금으로 바꾸는 절차도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은행 수수료를 별도로 물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손해지요. 제가 이 서점과 거래한지가 벌써 5년 정도 되는데, 이전에 몇번 이런 문제가 있어서 석달만에 주문한 책이 도착하는 경우들도 있었고, 수표를 받은 적도 몇번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점에 대해 벌써 이메일로 여러번 지적을 했고, 전화도 한번 한 적이 있는데, 전혀 시정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얼마전에는 그 서점에서 저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제는 이 서점과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서점에서 몇 번 주문해보려고 했던 다른 후배들은 위에서 말한 국가입력의 문제점 때문에 계속 주문취소가 돼서, 결국 책을 주문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책을 구입하는 최선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듯합니다. 첫째는 영우무역(http://www.book24.co.kr)이라는 회사를 통해 구입하는 방법입니다. 이 회사는 프랑스와 독일 서적을 전문 수입해서 판매하는 회사인데, 개인 주문도 수시로 받고 있습니다. 한 권이든 열권이든 원하는 대로 주문할 수 있는데, 다만 1유로당 환율을 정상적인 경우보다 10-20% 정도 더 받는 것으로 알고 있고, 배송료는 3천원 정도 되는 것 같더군요. 기간은 4-6주 정도 걸리고, 구하기 힘든 책은 2달 정도 지나야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고판 책 같은 경우는 이 회사를 통해 구입하는 게 아마존 프랑스 등을 통해 구입하는 것보다 더 싼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아마존 프랑스를 통해 구입하는 방법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마존 프랑스는 기본 배송료 외에 권당 배송료를 받지만, 대신 모든 책을 10% 할인해주지요. 그래서 좀 가격이 비싼 책들은 아마존 프랑스를 통해 구입하면, 상대적으로 배송료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몇 군데 서점들이 더 있는데, 다 비슷비슷한 배송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프랑스인들의 불친절 때문에 불쾌감을 덜 가질 수 있는 아마존 프랑스를 선택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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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보안법 폐지는 '보수'의 과제다

[손석춘 칼럼] 진보-보수 대결로 호도말라

 

국가보안법. 보수와 진보의 '한 판'이란다. 부자신문의 부추김이다. 심지어 학자라는 자들까지 거든다. 폐지 주장을 빨갛게 물들이는 작태를 서슴지 않는다. 윤똑똑이들은 부르댄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정반대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없애야 옳다. 누가 뭐래도 민주주의란 사회 구성원들의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밑절미를 둔 까닭이다. 표현의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조차 없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에서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진보의 과제가 아니다. 보수세력이 나서야 마땅한 숙제이다.

더러는 남북대치 상황을 든다. 하지만 그 또한 억지다.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다. 한국의 보수적 법조인들이 존경하는 초대 대법원장이 있다. 누구인가. 가인 김병로. 그는 한민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한 만큼 누구도 그를 진보로 분류하지 않는다. 가인은 1953년 4월에 형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초안을 내놓으며 말했다.

"특수한 법률로 국가보안법 혹은 비상조치법, 이러한 것이 국회에서 임시로 제정하신 줄 안다. 지금 와서는 그러한 다기다난 한 것을 다 없애고 이 형법만 가지고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 또는 장래를 전망하면서 능히 우리 형벌법의 목적을 달할 수가 있겠다는 고려를 해보았다. 지금 국가보안법이 제일 중요한 대상인데, 이 형법과 대조해 검토해 볼 때 형에 가서 다소 경중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이 형법 가지고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지 않는가 하는 그 정도까지 생각했다."

가인의 생각은 분명했다. 실제로 형법 여러 조문에 내란죄와 외환죄, 공안을 해하는 죄를 포괄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살아남았다. 그 명분도 차라리 순진했다. "전시의 치안 상태 및 국민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었다.

그랬다. 보수주의자 가인 김병로의 발언이 나온 것은 '전쟁 상황'(1953년 4월)에서다. 자칭 보수주의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도 이 지점이다. 가인. 그가 진보인가. 더구나 지금이 과연 '전시'인가. 가인이 살았던 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은가.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마치 나라가 결딴날 듯 떠드는 자들이 있다. 저들이 반세기 넘도록 초·중등 교육에 신문과 방송으로 '세뇌'한 결과 적잖은 구성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여론 조작'에 나선 부라퀴들에게 찬찬히 들려주자. 그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이요, 민주시민에 대한 모욕이다.

더러는 '민주주의론'으로 밀리는 탓인지 '시장 경제론'까지 들먹인다. 이 또한 희극이다. 시장경제의 논리를 존중한다면, 당연히 사상도 시장에 맡겨야 하지 않은가. 국가보안법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법만이 아니다. '사상의 시장'을 제한하는 법이다. 그래서다. 과연 이 땅에 참다운 보수는 있는가. 거듭 묻고 싶은 까닭은.

물론 이 땅의 보수세력을 애도하며 이미 장송가('한국보수주의의 장송곡' 2004년 1월 14일)를 불렀기에 부질없는 질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회' 아닌가. 가인 김병로에서 끊어진 보수세력이 부활을 선언할 수 있는.

그래서다. 저질연극판을 벌이는 수구정당의 정치모리배들이나 수구언론인, 그리고 그들에 부닐고 있는 '먹물'들은 그렇다고 치자. 열린우리당 안에서도 개정론과 대체입법론 따위가 흘러나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들이 국가보안법 논쟁을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몰아가는 깜냥은 무엇일까. 케케묵은 악령을 내세워 기득권을 '사수'하고 싶어서다. 국가보안법 폐지론에 빨갛게 색깔을 덧칠할 속셈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국가보안법은 더더욱 폐지해야 옳다. 정권은 물론이고 국회에 과반의석을 지니고도 그 '보수의 숙제'조차 풀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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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노무현 퇴진 논쟁'의 진실을 왜곡말라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의 '김태경 반론'에 대한 재반론]

  2004-08-30 오후 12:04:48

 

파병반대국민행동 정책사업담당 기획위원인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이 24일 프레시안에 오마이뉴스 김태경기자가 최근 <월간 인물과 사상> 9월호에 기고한 글 '노정권과 시민단체들, 유착 혹은 상생?'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이를 전제했었다.

  30일 이같은 이태호 실장의 반론에 대해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이자 파병반대국민행동의 운영위원인 박준도 처장이 재반박문을 보내왔다. 이태호 실장이 당시 치열하게 전개됐던 논쟁과정을 자의적으로 잘못 전달하고 있다는 반론이었다.
  
  이에 본지는 박준도 처장의 반론을 실으며, 이에 대해 참여연대 등의 재반론이 있을 경우 이를 실을 것을 약속한다. 편집자주.
  


  '노무현 퇴진 논쟁'의 진실을 왜곡말라
  

  김태경 기자의 글을 “Pressian"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난 그가 상황을 상당히 예리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자로서 의문을 품을 만한 것들, 그러니까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시민단체의 이중적인 태도를 문제 삼았고, 이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응이 어떨지 몹시 궁금했었다. 그러던 차에 “Pressian"과 “OhmyNews”에 실려 있는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이하 이태호 실장)의 반박 글을 보았다. 그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난 너무도 실망했다. 그는 김태경 기자의 논지가 무엇인지, 핵심 주장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반박해놓고는 되려 김태경 기자에게 ‘근거있는 비판’을 요구했다.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독자들을 상대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주장마저 임의대로 재구성해서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뭐가 그의 논거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이 글에서 유일한 근거라고는 다른 민중운동단체들도 노무현 퇴진 주장에 반대했다는 사실이고, 따라서 비판하려거든 그들도 같이 해야 한다는 주장뿐이다.
  
  그런데, 내 보기에는 이마저도 반론으로 쳐주기에는 한심스럽다. 이는 김태경 기자는 시민단체를 비판한 것이지 파병반대 국민행동을 비판한 것도 아니고, 몇몇 ‘민중운동진영 단체’를 비판하려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김태경 기자가 무엇을 썼는지조차 모르고 반론을 쓴 셈이다. 따라서, ‘근거있는’ 반론 요구는 내 보기에 오히려 김태경 기자의 몫이고, 글쓰기를 가르쳐야 할 선생 역시 김태경 기자의 몫이다. 김태경 기자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박 글이 유효하려면, 적어도 다음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이번 파병반대운동에서 자신의 주장이 노무현 비판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적절하고 핵심적이었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현 시기 노무현 비판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논증하는 것, 이 둘 중 하나 말이다.
  
  나는 이태호 실장의 글이 시민단체의 입장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노무현 퇴진’에 대한 모두의 입장을 애매하게 서술하거나 뭉뚱그려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서로 입장차이가 무엇인지, 무엇을 가지고 논쟁을 했는지를 애매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훼손해 놓은 것은 둘째치더라도 이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논쟁을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논쟁해야 하는지 서로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나는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정확히 알고 있다.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은 매우 소모적이었고 쓸모없었다는 것, 이것이다. 이태호 실장이 정확히 이 효과를 노리고 썼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나는 파병반대운동에서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의 성과가 이렇게 유실되는 것은 불가하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파병반대운동이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맞서는 유력한 운동으로, 전 세계 민중의 평화를 향한 의지를 스스로 담으려는 운동으로 성장하려거든 이 논쟁의 의미를 정확히 재확인해야 한다. 분명히 전개된 논쟁은 운동 자체를 정치적으로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민단체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우리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상세히 남겨 보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의 노무현 비판이 파병반대운동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좀더 정확히 주장하고자 한다.
  
  1.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노무현 규탄’을 둘러싼 논쟁
  
  이태호 실장은 어떻게 기억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김태경 기자 말대로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대통령 책임’ 기조를 잡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김선일 사망 직후 추모제를 앞두고 진행된 첫 운영위에서 민중운동의 상당수 단체들이 대중의 분노가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참여연대의 참석자는 ‘추모기조’를 강조했고, 민언련 참석자는 노무현 지지자들을 참석하게 하기 위해라도 아예 ‘노무현 비판’을 자제하고 문제의 근원인 ‘미국’에만 비판의 초점을 맞추자고 주장했다. 6월 26일 대회기조는 ‘이라크파병철회, 피랍상황은폐 진상규명, 미국 파병압력 규탄’이자 동시에 추모기조로 치르기로 했다.
  
  잘 아는 것처럼 이날 집회에 대한 평가는 서로 극단을 달렸다. 한 극단에는 "추모와 읍소로 될 일이 아니며 노무현이 이 사태에 대해 정치적으로 책임을 져야 그제야 파병이 철회된다"는 주장이 있었다면, 또 다른 한 극단에는 "한나라당·열린우리당 국회의원에 대한 야유는 불공평한 것이며 노무현을 향한 정치적 비판이 너무 극단적이거나 노골적이면 평화적 감수성에도 어긋나고, 일부 참석자들의 경우 그 말에 놀라 파병철회 집회에 동참할 수 없게 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파병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퇴진당할 것"이라는 경고성 발언을 한 청소년과 노무현 퇴진을 주장한 인쇄 노동자의 발언을 놓고 "민중운동진영이 사전에 조직한 것 아니냐"며 그 자리에서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은 참여연대 관계자였고, 앞서 의견은 운영위 회의에서 여성단체연합의 참석자가 제기한 것이다.
  
  공개된 비상시국회의 자리에서 노무현 퇴진론자로 알려진 한 참석자가 현 시기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정치적 목표에 대해 토론하자고 할 때, "이 자리는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주요 방침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이를 제지한 것도 참여연대 관계자였고, 노무현의 정치적 책임에 대한 언급이 교묘히 빠져있는 ‘대국민호소문’에 격분한 참가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을 때도, 참여연대 관계자는 "채택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만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이태호 실장은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수정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제안하였지만, 격앙된 상황에서 아무도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 문제없는 훌륭한 호소문"이라는 참여연대 대표의 압박이 있었음에도 끝내 이 호소문은 채택되지 않았다.
  
  당일 열린 운영위에서 민중운동 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은 대중의 분노가 있고, 분노의 대상이 노무현을 향하고 있는 만큼 정치적 기조는 적어도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분명히 하자는 의견을 강하게 제기하였다. 그에 따라 “파병철회. 진상규명, 대통령사죄(대통령책임), 미국규탄, 점령반대”라는 5개 기조가 확정되었다. 또, 이제까지 집회와 달리 7월 3일 집회만큼은 대중의 분노를 모으고 노무현과 미국을 규탄하는 집회로 진행하자고 결정하였다.
  
  하지만,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제출한 기획안은 여전히 변함없는 추모대회 안이었다. (이 기획안에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퇴진’입장에 가까운 만큼 OOO 신부의 정치발언 섭외는 재론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모양은 ‘추모대회’ 였지만, 정치적 의도만큼은 분명히 반영된 기획안인 셈이다. ) 급하게 기조를 바꾸어 보려했지만 시간제약이 있었다. 이 와중에 장소조차 긴급하게 변경되고 행진 계획마저 재론되는 등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비마저 내려 더더욱 초라해진 7월 3일 집회는 집회참석자들과 진행자들 사이의 불신과 대립이 극단적으로까지 전개되고 말았는데 전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라고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7월 14일 운영위에서 참여연대 관계자는 "집회참석자들이 ‘노무현 퇴진’ 집회에 나왔는지, ‘파병철회’ 집회에 나왔는지 혼란스러워 한다"며 "파병반대운동은 열린 우리당 지지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만큼 파병반대운동의 다수화를 위해서는 파병철회만을 주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다시 제기했다. 또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투쟁 기조 자체를 문제 삼고는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노무현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미국문제는 부차화되고 있으며, 민중운동의 고착화된 집회운영이 대중의 집회참석을 가로막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제 더 이상 광범위한 대중이 운집하는 집회는 곤란할 것이고, 결사투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라고 주장한 뒤, "김선일 피랍 은폐 의혹에 대한 국회 청문회와 국정감사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이를 소홀히 하면 국회의원 소환운동(노무현이 아니라 국회의원 소환)을 전개하자"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역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대중들이 폭넓게 파병반대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노무현의 ‘보복’ 선동에 밀렸기 때문이지 반대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파병을 강행한 실질적 주체는 미국도 한나라당도 아니라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라는 주장,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공동전선"이라는 주장들이 반론으로 제기되었다.
  
  '노무현 퇴진’ 주장이 자꾸 나오는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의견을 주고받으면서부터는 더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시민단체과 민중단체 사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중운동 단체들 사이에서도 격렬했다. 일체의 ‘퇴진’ 주장은 불가하다는 의견에서 완전히 가능하다는 의견까지 이견은 좁혀질 여지가 없었다. 참여연대 회의 참석자는 "‘퇴진’ 주장을 외치고 선전선동하는 사람들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며, "집회가 계속 이렇게 진행될 경우 결국에는 파병반대국민행동 명의의 집회 개최 자체가 제한하게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기도 했다. 이 날 이후 관련 논쟁은 상반기 파병반대투쟁 평가토론에서 서로의 의견을 조금씩 주고받은 것 말고는 더 이상 전개되지 않았다.
  
  나 역시 대통령 사죄와 대통령 책임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이상에서 보듯 김태경 기자의 글에 인용되어 있는 오창익 사무국장 말대로 ‘대통령 사죄(책임)’, '규탄‘기조를 확정하는 데만도, 그리고 그 기조에 따라 집행을 하는데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한 모든 정치적 책임을 ‘노무현’이 져야 한다는 주장 자체였고, 이 목소리를 가장 높인 것은 ‘퇴진’이라는 구호로 자신의 주장을 요약하려 했던 이들이었다. 또, 보는 바와 같이 여기에 이러 저런 이유로 끊임없이 이견을 제시했던 그룹은 이른바 ‘이름 있는’ 시민단체였다. 그럼 시민단체의 노무현 비판 혹은 노무현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진실로 어떠했는가?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었는가? 이를 좀 더 살펴보자.
  
  2. 시민단체의 노무현 비판?
  
  노무현 비판에 머뭇거렸다는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단체는 민언련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민언련은 회의 자리에서 "(전술적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노무현 비판은 자제하고, 모든 것의 원흉인 미국을 규탄함으로써 아예 우회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고, 최민희 사무총장은 인터뷰에서 김선일 사망 이후 피랍과정에 대한 의혹이 한참 막 제기되던 시절에 당당히 노무현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집회 발언 취지를 뒷받침하는 인터뷰(『시민의 신문』, 6월 29일자)에서 최민희 사무총장은 "노무현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근거도 없고 몰랐었던 것 같다"며 외교부와 개혁세력의 갈등문제를 제기하면서 "(노무현과 개혁세력도 일부 책임이 있긴 하지만) 도리어 수구친미세력의 무능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AP통신과 미국이 사전에 인지하고도, 동양인이라고 우습게보았거나 김선일의 반미발언 때문에 고의로 안 알려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AP통신과 미국책임론을 강하게 부각했다.
  
  최민희 총장은 또한 자신이 한나라당보다 열린우리당을 많이 비판한 것은 사실 열린우리당이 파병철회나 미국문제, 국가적 자존심 문제에 무엇인가 노력할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라며, 열린 우리당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노무현 퇴진 주장이 잘못된 것은 파병철회 집회에 참석하는 다수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상처를 받게 되고, 노무현 퇴진 이후 ‘로드맵’도 안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파병철회집회에 200~300만이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며 그러기 위해서는 파병철회 여론의 다수로 추측되는 노무현 지지자들을 여기에 참석하게 해야 한다는 전제에서다.
  
  7월16일 운영위에서 여성단체연합 회의 참석자는 "오늘 노무현 정부가 보이는 모습은 노무현 정부 내 우파(특히, 국방외교통상 라인)들의 입김이 강해서 나타난 결과"고, 따라서 "노무현 정부 내 좌파가 주도하는 개혁에 힘을 실으면서 파병반대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참석자 또한 노무현 퇴진 이후 ‘로드맵’을 걱정하였는데, 1987년 당시에는 그래도 진보야당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퇴진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며 ‘퇴진’주장에 강한 의문을 표명했다.
  
  그럼, 참여연대는 어땠을까? 노무현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참여연대가 당당히 내놓는 근거가 있는데, 바로, “정부의 조직적 은폐의혹이 밝혀질 경우, 노무현 정권의 진퇴문제를 거론할 것”이라는 참여연대 관계자의 한겨레신문 인터뷰다. 이 인터뷰 하나로 참여연대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외교적 언변에 능숙한 참여연대가 이 말의 진의를 모를 리 없는데, 이 말은 하나마나 한 소리기 때문이다.
  
  조직적 은폐의혹이 밝혀지면 제아무리 ‘노사모’인들 등 돌릴 수밖에 없다. 친 노무현 경향의 언론이라 할지라도 게이트 사건이 터졌다며 난리를 칠 것이고, 지배세력은 이를 수습하기위해서라도 노무현에게 스스로 하야할 것을 권고할 것이다. 이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아무 말도 안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동시에 이 말은 김선일의 죽음에도 파병을 강행하는 노무현 정권의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김선일의 사망 자체에 대한 노무현의 책임도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은폐의혹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고, 김선일을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한 노무현의 가장 핵심적인 과오 즉, 피랍에도 불구하고 파병강행방침 자체는 문제 삼으며 진퇴를 거론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선일 사망 직후 참여연대가 제출한 성명서는 파병반대국민행동을 제안한 단체라는 명성에 걸맞게 썼는지 의문이 들만큼 점잖게 썼다. 이 성명서는 김선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은 파병 전면 ‘재검토’라는 결단을 내려야한다고 했다. ‘파병 철회’도 아니고 ‘파병 재검토’다(파병반대 국민행동의 공식입장은 무조건 ‘파병 철회’다. 단, 대 국회사업에 한해서 예외적으로 ‘재검토’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내의 미묘한 갈등을 강조하며, 당면목표(파병철회) 달성을 위한 상당한 정치 테크닉을 강조하는 단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김선일씨 피랍 직후 상황도 아니고, 주검이 되어 돌아오게 된 마당에 대국회사업에서나 구사해야 할 세련된 언사를 구사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자이툰 선발대가 떠난 직후 홍성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은 ‘안국동의 창’이라는 코너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정녕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이 도착적 수구세력과 한 패가 되고 말 것이냐며 개탄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끝끝내 그는 제 국민 안위 하나 못 지키면서도 파병을 강행하는 노무현 정부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이라곤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역으로 파병을 강행한 대통령이 이회창이라고 가정하자. 참여연대가 개탄의 목소리나 내며 이런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을까? 아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있듯 아마 정면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에 대한 참여연대의 정치적 태도고 이중 잣대다.
  
  이 모든 것 역시 시민단체의 노무현 비판이며, 시민단체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태도와 입장을 분명히 견지하고 있다고 강변한다면,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비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정면 비판이 있고, 애정 어린 비판이 있다. 자, 시민단체의 노무현 비판은 이중 무엇인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우연의 일치겠지만, 노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데 머뭇거렸다고 알려진 곳은 ‘주류’ 또는 ‘이름 있는’ 시민단체가 많았다”는 김태경 기자의 주장은 여전히 근거 없는 주장인가? 김태경 기자가 가장 문제 삼은 대목은 시민단체가 퇴진주장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속에서 드러난 시민단체의 입장에 비추어봤을 때 시민단체가 노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데 머뭇거렸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초점은 이것이다.
  
  3. 노무현 퇴진 주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의 진실
  
  김선일의 죽음은 이라크 파병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언제든지 전쟁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오늘날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폭력의 연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 마저 일깨워주었다. 김선일이 억류된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파병강행한 것을 보며, 우리는 노무현이 마지못해 파병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사활을 걸고 파병을 강행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바로 노무현이 이 참혹한 전쟁터에 우리를 내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퇴진 주장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의 배출이건, 선전 슬로에 불과하건, 전술·전략적 주장이건 간에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구호 자체, 이런 주장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인가? 굉장히 다양한 정치적 입장의 단체와 개인들이 모여 있는 연대체내에서 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매번 논란이 되는가?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노무현 ‘퇴진’ 주장 자체를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매번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한대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 대부분이 시민단체 관계자였고, 노무현 비판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이들로서는 이런 주장 자체가 집회장에서 오고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관계자 중 몇몇은 열린 우리당 국회의원에 대한 대중의 즉석 야유를 민주노동당 관계자가 선동한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고, 자유발언대에서 터져 나온 퇴진주장을 보면서는 지금 촛불집회 자유발언은 자유발언을 가장한 특정정치집단의 정치발언이라며 (내 보기에 촛불집회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자유발언 자체를 도매 급으로 매도했다. 대중은 다 안다며 선동하고 가르치려 들지 말라며 강변하는 이들이 대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파병을 철회해주세요’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중이고, 열린 우리당·한나라당·민주당 국회의원에게 야유하고, ‘몽둥이로 때려 청와대에서 내쫒아 버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중이 아니라는 말뜻인가? 아니면, 대중이 열린 우리당에 야유하고 노무현 퇴진과 같은 고강도 정치발언을 할 리가 없다는 뜻인가? 왜 대중과 활동가들을 무 가르듯 확실히 나누려 하는가? 집회 참석 대중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앞서 본 대로 실상은 대중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던 것이다.
  
  이 때 벌어진 논쟁의 축은 다음과 같다. 시민단체는 ‘파병반대운동은 열린 우리당 지지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수화 전략을 위해서 파병철회만을 주장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되풀이해서 제기해 왔고,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힘, 다함께, 인권단체연석회의, 전국학생연대회의 등은 ‘파병강행의 모든 정치적 책임은 노무현이 져야 하며, 노무현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대중의 직접적인 행동이 파병반대운동의 숨통을 틔게 할 것’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방향에 대한 분명한 ‘입장 차이’이기도 하다. 이것이 ‘퇴진’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의 진실이다. 따라서, ‘퇴진’ 주장을 둘러싼 토론의 가장 기본적인 배경은 무엇보다도 김태경 기자가 지적한 대로 “이라크 파병의 이유, 노 정권의 성격, 시민단체와 현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시각차”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논의가 격렬했던 것은 시각차가 얼마나 큰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여기서 잠깐 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본대로 ‘퇴진’ 주장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일 때마다 이 주장과 슬로에 대해 시비를 가리자며 논쟁을 제기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시민단체 관계자였다. 여기에 맞서서 ‘노무현 퇴진’ 주장과 목소리를 옹호하려 했던 이들은 (김태경 기자의 표현을 따르면) 이른바 ‘좌파’ 진영이다. 한편, 이 토론이 전개될 때 온전한 형태로 이와 관련되어서만 진행된 적은 없었는데, ‘지도부 비판’, ‘집회 문화’, ‘연대의 기술과 원칙’, ‘발언/토론과 선전의 자유’, ‘행동의 통일’ 등등이 혼재되면서 진행되었고, 그러다보니 논의 자체가 쉽게 격렬해졌다. 이러다보니, ‘구호와 행동의 통일’을 요구하는 한편으로는 ‘노무현 퇴진’ 슬로의 선전/주장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때마다 ‘노무현 퇴진’ 입장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단호히 이를 비판해 왔다. 그것이 대중의 발언을 옹호하는 차원이든, 행동의 통일과 토론/선전의 자유를 옹호하는 차원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제기했던 유일한 단체인 사회진보연대가 노무현 퇴진이 공통의 구호가 될 수 없는 조건과 정세에 공감했다”며 사회진보연대가 노무현 퇴진 입장을 철회하거나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에서 자신의 입장을 후퇴했다는 듯, 혹은 참여연대와 입장을 같이했다는 듯 기술한 것은 사회진보연대의 의견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물론이거니와 퇴진입장에 동의하는 다른 단체들은 ‘퇴진’주장이 제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쳐왔음에도 “회의장에서 동의해놓고는 집회장에서는 잘 지켜 지지 않았다”면서 노무현 퇴진 주장을 하는 단체들과 개인이 신의가 없는 정치세력처럼 서술한 것이라든지, 참여연대 스스로 노무현 퇴진 주장에 관한한 늘 논쟁과 견제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면서도 “해프닝성 사건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토론으로 노무현 퇴진을 채택하지 않기로 했다” 며 논쟁 자체를 폄하하려 한 것, 그것도 모자라 “이 논쟁은 주로 민중연대 소속단체들 간에 이루어졌다”며 참여연대는 물론이거니와 시민단체는 논쟁의 구도에서 제외해 버린 것, 거기에 더해 ‘그래서 해프닝’이라고 친절하게 해설까지 첨가한 것은 맥락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노무현 ‘퇴진’ 주장을 둘러싸고 참여연대가 취했던 입장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퇴진’ 주장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자신과 유사한 입장이건 다른 입장이건 적당히 물타기해서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흐리게 하면 서로 오해만 증폭될 뿐이다. 논쟁을 하건 토론을 하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서로 오해도 없이 정확히 토론을 할 수 있고, 힘을 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태호 실장의 전언대로 상당수 민중운동 단체들이 ‘퇴진’ 주장에 대해서 반대하긴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의견은 내가 결론에서 주장할 ‘지금 파병반대운동에 필요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지도부 비판’, ‘집회 문화’, ‘연대의 기술과 원칙’, ‘발언·토론과 선전의 자유’, ‘행동의 통일’ 들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제기된 만큼 이에 대한 서술도 필요하겠지만, 이 문제는 이 글이 다루어야 할 범위를 넘는다.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퇴진’ 주장에 반대한 상당수 민중운동 단체들이 이태호 실장에게는 글의 논지와 관계없이 매번 함께 걸고 넘어갈 수 있는 손쉽게 물타기 할 대상으로 밖에 안 보이는지, 이 점 몹시 못마땅했다는 점만큼은 밝혀 두고자 한다. 동지에 대한 비판을 냉혹하게 수행할 지언 정, 자신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남에게도 돌리며 자신도 무마하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4. 지금 파병반대운동에 필요한 것
  
  참여연대를 위시하여 시민단체들이 기반을 두고 있는 파병반대운동의 다수화 전략 즉, 노무현과 열린 우리당 지지자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상식적인 이야기부터 꺼내야 한다. 상식적인 이야기라도 필요하면 반복해야 한다. 파병을 강행하고 파병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데 총력을 기울인 인물과 정당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다. 김선일 사망 이후 ‘테러행위를 규탄하며, 국제사회와 함께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며, 파병을 철회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보복’을 선동한 사람은 노무현이었고, 파병강행을 주장하며 테러방지법을 운운하기 시작한 의원이 속한 정당도 열린우리당이었다. 당내 파병을 철회시켜야겠다는 의견을 관철시키기는커녕 당 지도부 비판에도 소극적이고, 긴급할 때는 파병강행입장으로 바뀌는 국회의원들이 속한 정당도 열린우리당이다.
  
  노무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김선일 피살 이후 파병결정과정에서 노무현이 감내해야 했을 ‘고충’을 이해하자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이때, 그들은 파병철회보다는 노무현 지지를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들에 기반을 두어야 200~300만의 시위대가 모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수도행정 이전에 대한 반대마저 자신에 대한 퇴진요구라 강변하는 노무현대통령을 두고, 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200~300만의 숫자를 헤아리는 거리의 군중이 되어 파병철회를 주장할 것이라고 보는가? 단언컨대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200~300만이 모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중에게 실망감만 안겨줄 뿐이다. 대중에게 패배감만을 안겨줄 뿐이다. 거짓말이고, 불가능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200~300만의 시위대는 노무현 지지자 몇 십만과 민주노동당 지지자 몇 십만이 합해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 조합원 몇 십만과 전농 농민회원 몇 십만이 합해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대중의 자발적인 대규모 군중 시위는 이 집단과 저 집단을 단순히 더해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대중의 정치적 각성에 따른 결과다. 열린우리당 지지자인 너도 나오고 민주노동당 지지자인 나도 나와서 200~300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에 투표를 했건, 민주노동당에 투표를 했건, 심지어 한나라당에 투표를 했건 아예 관계없이) 너도 각성하고, 나도 각성해서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원하는 시위 군중 200~300만이 되는 것이다. 너도 정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정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때, 200~300만이 되는 것이다. 200~300만이 벌이는 파병철회 시위를 꿈꾸고자 한다면 그 길은 하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가 파병을 철회해줄 것이라는 미련을 떨쳐버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가 정치의 주인이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에 분노하여 노무현에게 파병철회를 요구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 오직 그 길 뿐이다. 노무현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이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민중들의 연대의식과 함께 터져 나와야 그제야 가능하단 뜻이다.
  
  그렇다면, 왜 ‘정치적 각성’인가? 나는 다른 글 {박준도, 「노무현도 '엄호'하고, 파병도 '철회'시키겠다? - 불행한 비극? 불가능한 희극!」, 『사회진보연대』(47호,2004.7~8) 혹은 『사회화와노동』(230호,2004.7.9)}에서 “국가의 기본적 기능은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서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든 강제적인 수준에서든 대중의 명확한 인식과 정치적 단결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이에는 변함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파병반대운동의 단결과 대중적 확장은 … 우리들의 정치적 단결과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는 [이 같은] 장애를 제거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시기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단결과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는 무엇인가? 노무현과 그의 행정수반들의 파병/전쟁 참여선동, 정치토론의 장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고 대중의 분노가 폭발되는 것을 막는 경찰의 저지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의 저 더러운 입놀림과 언론의 기만적인 펜대 들이 장애다.
  
  그밖에도 우리에게 장애는 곳곳에 있다. 정치의 주인으로 단결하고자 하는 노동자·농민·여성을 중산층이라 칭하며 상품의 소비자로서만 살아가게끔 하는 것,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으로 분할하여 성별 분업화된 삶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 국가 행정 관료들과 국회 정치인들에게 의존토록 하는 것. 개별화되어 모든 연대의 손길을 스스로 외면토록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장애다. 이 장애를 물리쳐야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대중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 장애를 물리쳤다면, 어제 우리의 삶과 오늘 우리의 삶이 바뀌었을 것이다. 어제는 내 한 몸 살아남기 바쁘고, 정부가 노무현이 미국이 한일인데 어쩌겠냐며 수동적으로 살아갔다면, 오늘은 거리에서 ‘파병철회’를 외치고, 일상에서 ‘전쟁반대’를 주장하며 토론하고 조직하며 능동적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다른 삶, 이것이 ‘정치적 각성’이다. 정치적 각성은 남이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요, 남이 시켜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대중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스스로 능동적인 대중이 되는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대중의 거리 시위로 이라크 파병을 중단하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전 세계 민중의 평화 애호 노력을 스스로 대표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가 능동적인 대중이 될 수 있도록, 이것이 더더욱 촉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무현 퇴진’ 슬로는 노무현 정권의 성격,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입장과 태도의 문제를 표현한 것이다. 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정권, 신자유주의 세계화(국익)와 이를 무장한 군사력으로 엄호(한미동맹)하려는 정권 - 바로 그 노무현 정권에 일체 협력할 수 없으며, 민중은 이를 거부한다는 뜻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 ‘노무현 퇴진’ 슬로다. 시민단체들이 예의 그 관행처럼 또다시 노무현정권의 행정부 관료들 사이의 갈등관계를 활용하는 테크닉이나 구사하며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로비하는 것에-만(!) 치중하려 든다면, 자신과 연계가 깊은 여러 행정 관료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노무현을 향한 정면(!) 비판을 꺼린다면, 파병철회-만(!)이 목적이라며 자신의 목적 달성에만 급급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운동과 연대하는 것을 외면한다면, 파병반대운동은 노무현 정권이 스스로 자멸해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퇴진’ 슬로는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단결과 대중적 확대를 가로막는 장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한다. 장애를 보았다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물리치고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계획하고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노무현 퇴진’ 슬로가 가지는 중요성이다.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가 남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정치적 입장에 관한 한 광범위한 대중의 토론을 보장하고 조직하는 것이 파병반대운동에 진실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스스로 돕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실천을 조직하는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토론은 오늘 우리를 참혹한 전쟁터로 밀어 넣는 이가 누구인지, 오늘 우리를 비참한 빈곤으로 내모는 이가 누구인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닫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토론은 오늘날 파병반대운동의 오류가 우리의 오류가 무엇인지, 민중의 자기통치, 민중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진실로 깨닫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기반이 되어야 튼튼하고 광범위한 대중행동과 거리 시위가 가능하다. 노무현 퇴진주장과 이를 둘러싼 토론을 막으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장애를 만드는 것이다. 노무현 퇴진주장과 이를 둘러싼 토론 그리고 광범위한 의견개진, 이을 충분히 보증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우리 스스로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대중적으로 확장하는 길을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백만 시민 결집됐을 때 파병철회 가능”하다는 주장이 그냥 한번 해본 말솜씨가 아니고 진실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제까지와 다르게 파병반대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국가와 행정 관료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우리의 운동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침략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앞장서는 노무현 정권을 냉혹한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 민중이 그 죄상을 엄히 다스리는데 앞장서는 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짓눌려 자신의 생존권을 되찾으려는 민중들의 투쟁에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 민중들과 함께 진정으로 평화로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힘껏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연대운동은 합의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정치의식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요 서로의 힘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연대운동은 너와 나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찾아 너와 나만의 이익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고 나아가 민중의 보편적인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하는 것이다. 파병반대운동이 두고두고 재고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박준도/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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