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낡을 수 없는 '순간들'
사진비평_최민식 사진집| 최민식 사진, 조은 글| 샘터 刊| 2004| 221쪽

2004년 11월 08일   김명인 문학평론가 이메일 보내기

한동안 최민식 선생의 사진을 잊어 왔었다.


오랫동안 좋은 사진의 기준이었던 그의 사진들을 잊었던 건 언제부턴가 그의 사진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듯한 상투형의 기미를 읽었기 때문이다. 낡았다는 느낌, 그건 그가 근년에 찍은 해외취재 사진들을 보면서 더욱 짙어졌었다. 1950~1970년대에 이르는 이 땅의 가난한 얼굴과 남루한 몸짓들을 찍던 그가 1980년대를 지나면서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한 그 얼굴, 그 몸짓들을 가령 인도 같은 곳에서 다시 찾아내어 찍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 여기까지가 최민식의 한계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를 테면 자연주의 소설들의 한계와 같은 것을 그의 근년의 사진들에서 봤던 것이다. 세상은 30년 전까지와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고 그가 30년 이전에 봤던 보편적 가난과 남루는 이제 보편적 풍요와 화려함의 뒤안으로 숨어버렸다. 대신 다른 가난과 남루와 불행들이 세상을 떠돌았지만 최민식 선생의 카메라는 그 새로운 불행들을 찾아내서 포착해 내기에는 낡고 힘겨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오랜만에 다시 그의 옛 사진들을 대하자 다시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낡고 힘겨워진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였구나’하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그만큼 그의 옛 사진들엔 지금도 여전히 슬픔과 분노가, 연민과 공감이 결코 낡아질 수 없다는 듯이 생생하게 파동치고 있었다.


최민식 선생의 사진들에 조은 시인이 짤막한 아포리즘들을 붙인 새로운 최민식 사진선집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가 나왔다. 사진은 시와 가장 닮은 장르일지도 모른다. 생의 한 순간을 빛으로 인화지 위에 고정시킨다는 사진의 예술적 행동은 역시 생의 한 순간을 말로 종이 위에 고정시킨다는 시의 예술적 행동과 매우 닮아 있다. 그 절대의 순간 안에 생 전체를 담을 수도 있다는 것, 그 순간 사진도 시도 영원과 잇닿게 된다는 것, 사용된 빛이나 언어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며 그럴수록 더욱 뛰어난 예술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과 시는 유사하다. 따라서 사진에 시 혹은 시적인 아포리즘을 덧붙이는 것은 시를 두고 시를 덧붙여 쓰는 일처럼 잘못하면 한 장의 사진이 지닌 풍부한 세계를 옹색하게 가두어두는 구속이 되거나, 쓸데없는 췌언이 되거나 기껏해야 동어반복에 머무르고 말 것이란 게 내 생각이다. 차라리 좋은 시 해설을 쓰듯, 좋은 산문을 덧붙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의 아흔 여덟 개의 사진에 붙여진 조은 시인의 아포리즘들은 정확히 시라고 할 수는 없어도 시적 절제를 여과한 짧은 줄글들이지만 바로 이런 사진 장르의 시적 특성 때문에 좋은 의도와 분명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낳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이 책의 107쪽에 있는 극단적 노출기법으로 시멘트벽에 기댄 채 울고 있는 남루한 아이를 찍은 사진에 대한 “태어날 때부터 배경이 어둠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라는 아포리즘, 111쪽에 있는 쭈그리고 있는 중년 가장과 그 옆에 선 두 아이의 시선을 포착한 사진에 대한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합니다. 저 가족도 망망대해의 땟목처럼 흔들리고 있군요”라는 아포리즘, 그리고 179쪽의 기도하는 노파 사진에 대한 “구불구불한 길에 뒤덮인 저 육체! 산다는 것은 제 몸속에 길을 내는 것입니다”라는 아포리즘 등은 사진이 말하고 있는 것을 거의 적확하게 언어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좋은 또 하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테면 37쪽에 있는 삼줄 칭칭 감긴 커다란 야적용 천막 옆에서 리어카를 세워두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무언가 열심히 책을 읽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더한 고독 속으로 자신을 옮겨가는 사람들도 있지요”라고 쓰는 경우에 나는 그 아포리즘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아마도 최민식 선생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면 그 사진은 프레임의 전체를 칭칭 감긴 삼줄이 차지하고 있고 책 읽는 노동자는 불안정하게도 왼쪽 하단에 내몰려 있음으로 해서 이 노동자의 지혜를 향한 나름의 열망이 얼마나 무력하고 불안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를 웅변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76쪽에 있는 떠나는 조각배를 여인네들이 배웅하고 있는, 최민식 선생 사진 중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시정 물씬 풍기는 사진들 두고 단지 “힘들게 일하며 떠나보내는 시간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해 버리는 건 너무 상투적이고 반시적이다. 이 사진은 보내는 이들의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떠나는 남루한 조각돛배의 실루엣이라는 소실점을 향해 집중돼 있는 모습을 포착함으로써 그 자체로 단지 풍어의 기원이라는 말로는 절대로 형언할 수 없는 엄숙하고도 웅숭깊은 시적 정경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런 사진과 아포리즘의 본질적 버성김은 이 외에도 적잖이 발견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버성김에도 불구하고 이 독특한 사진집은 최민식의 사진세계를 요령있게 축약해 한 자리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의 의의를 갖는다. 가난과 슬픔, 남루와 분노, 노동과 힘, 절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최민식의 인간애 가득한 앵글과 그를 뒷받침하는 절정의 셔터 감각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또 그에게도 가끔은 유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다른 가난한 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바로 이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깊은 연민과 통찰로 고통받는 존재들을 부감해 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훌륭하다.

김명인 / 국민대 문학평론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구두 2004-11-1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국민대로 나왔넹. 흐흐.

balmas 2004-11-1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좀 의아했습니다.
 
 전출처 : 딸기 > 번역에 대해.

발마스님께서 교수신문에 실린 전문번역가에 대한 기사를 퍼놓으신걸 보고 리플 달다가, 아예 페이퍼로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아(다른 분들한테 정보가 될 수도 있으니) 정리해 다시 올린다.

나는 번역자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특별히 번역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책 보면서 영어식 일어식 문장을 만나면 한번씩 씨발거리지 않고서는 넘어가질 못하는 못된 버릇 탓이다. 어색하기 짝이없는, 문장도 아닌 문장들이 넘쳐난다는 느낌. 책들도 그렇고, 신문 기사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신문 보면서 기사에 쓰인 희한한 문장들을 나혼자 머리속으로 '우리말'로 번역해보곤 하는데, 그정도로 '말글오염'이 심각하다고나 할까. 번역돼나온 책들을 보면서 문제가 많다고 느낄 때도 한두번이 아니다. 번역된 책들의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몇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 특정한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잘못쓰거나 문장을 아예 잘못 번역하는 경우. 이건 진짜 심각한 문제다. 책의 내용 자체가 다르게 전달되어 버리니깐 말이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내가 지금까지 봤던 책들 중에서 '최악의 번역' 혹은 '추악한 번역'으로 지목할 수 있는 책인 '추악한 전쟁'(존 쿨리). 성전(holy war)를 비꼬기 위해 'unholy war'라고 제목을 붙인 것을, 웃기는 번역자(라기보다는 독서방해자)가 '추악한 전쟁'이라고 해놨다. '추악한 전쟁'이라고 하면, 명백히 다른 개념인 '더러운 전쟁' 즉 dirty war를 연상케하는데, 번역자가 과연 그런 정도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었는지는 회의적이다. 이 책 읽다가 너무 열받아서 무려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하기까지 했다. 내가 책 읽다가 출판사에 전화한 유일한 케이스였다... 

이 책 못잖게 황당했던 것은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 이거 번역하신 분은 실은 내가 개인적으로 뵌 적이 있는 분인데 참 좋은 분이다. 친절하시고, 소박하시고. 그런데 문제는... '성격'으로 번역의 오점을 만회할 수는 없다는 것. (당연한 얘기지만). 여러 복잡다단한 지역이 포함돼있긴 하지만 통틀어 '중동학계'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하는데, 이 동네에서 저 책 번역자가 거의 매장될 분위기였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출판사는 이 책의 절판&재번역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 책은 어떤 정도였냐면, 비문도 비문이지만, 글 맥락상 충분히 알 수 있는 반어법을 곧이곧대로 해석해놓은 부분마저 있었다. 예를 들면 촘스키가 '미국, 참 잘 하는 짓이다'라고 비꼰 것을 '미국은 잘했다'로 번역해놓는 식. 알려질대로 알려진 촘스키 저술을 저따위로 번역하는 것은 범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촘스키 책 중에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인 저 책이, 9.11 직후에 붐을 타고 꽤나 팔렸다는 사실.(실상 이 책은 1982-83 레바논 내전 백서 형식이기 때문에 중동 사태에 대해서 아주아주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읽어볼 필요는 없다)

사족을 달자면 촘스키 책 번역본 중에서는 '507 정복은 계속된다' 번역이 아주 훌륭했다. 이 책을 번역한 오애리님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는 분인데, 당초 이 책을 읽어보기 전에 ('트라이앵글' 번역에 대해 나와 함께 공분했던) 친구로부터 질문을 받았었다. 대체 오애리님은 누구이관대 그렇게 번역을 잘 했냐고... 덕택에 '507'을 읽어보게 됐는데, 역시나 훌륭한 번역이었다. 나중에 번역자로부터, 번역료 액수를 듣고 기절하긴 했지만(거의 염가 노동력착취 수준). 하워드진 책들을 번역한 유강은씨 솜씨도 괜찮다.

두번째로 열받는 번역- 짜깁기 번역. 고유명사가 페이지마다 다르게 나온다. 역시나 '추악한 전쟁'이 이런 번역의 극단을 보여줬다. 아프간의 대표적인 반소련 무자헤딘 장군이었던 마수드를 '마수드' '마소드' '마소우드'로 뒤죽박죽 표기한 것은 애교에 속한다. masoud가 어떻게 '마오우'까지 될 수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다 -_- 책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고유명사 표기가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에 다르게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짜깁기를 하려면 제대로 된 인간들끼리라도 번역을 할 일이지, 누구나 '체첸공화국'으로 쓰는 것을 군데군데 '체첸야'로 해놓거나(아예 현지 발음을 되살려 보시든지) 소련의 '프라우다'도 몰라서 무려 '프라다'라고 해놨다. 이 정도면 철저한 로우코미디 수준 아닌가.

세번째, 영어식 일어식 이른바 '번역체' 문장으로 독자를 질리게/열받게/궁금하게 만드는 책들. 누가 번역한 것인지는 까먹었는데, 예전에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보다가 중도포기한 적이 있다. 아빠가 딸더러 "오빠한테 편지 좀 쓰지 그러니?" 라고 묻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작자는, 따옴표 안의 저 대사를 문자 그대로 직역하여 "나는 네가 그에게 편지를 쓰기를 원한다"라는 심오한 문장으로 만들어놨었다. 쿵야...

얼마전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이랑, 일본의 비판적 지성으로 꼽히는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을 읽었다. 재미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체 일어체 번역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저런 학자들이 쓴 책을 번역한 책에서는, 일본어의 독특한 표현을 제외하면, 목에 걸리는 어색한 문장들이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것은 전반적인 우리나라와 일본의 학문 수준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루야마 마사오도 그렇고 가라타니 고진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서양 학자들 글 인용해서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자연스럽고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간다. '완전히 소화해서' 얘기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번역돼 나오는 서양 책들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책 내용이 독창적이어서라기보다는 우리말로 적절한 개념을 찾지 못해서 이상하게 꼬아놨기 때문인 듯하다. 얼마전 엘레건트 유니버스에서 읽은 러더포드의 말이다. "무언가를 전문용어 없이 일상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의 번역책들 혹은 번역체에 버금가는 사회과학/철학책들에는 저런 증거들이 너무 많다.

앞서 말한 치명적인 번역들 말고,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번역에 아쉬움을 느꼈던 적도 있기는 하다. 이윤기선생이 번역한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을 때였다. 이윤기 선생은 누가 뭐래도 훌륭한 번역자이지만, 본인이 내용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터인지, 글에서 캠벨보다 번역자가 더 부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번역자의 독특한 글투(이미 낯익어진 '이윤기체')가 너무 많이 묻어난다는 것. 책은 굉장히 훌륭했고 번역도 그정도면 100점에 가깝지만 캠벨에 앞서 이윤기 냄새가 난다는 것은 좀 아쉬웠다.

지금껏 번역에 대해 불평만 했으니 이제는 칭찬도 해야겠다. 훌륭한 번역자님들도 많으니깐.

훌륭한 번역자들을 유독 많이 만나게 된 것은 의외로 과학분야였다(다른 분야에 훌륭한 번역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관심사가 이 쪽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과학책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주로 90년대 후반 이후) 과학전문 번역가 풀이 형성됐고, 독자층도 형성됐고, 출판사군이 형성되면서 문학도 못잖은 문장력을 자랑하는 번역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이 좁은 시장 잡아먹겠다고 지금은 과학서적 분야에서도 출판업계 경쟁이 치열한 것 같지만). 

'엘레건트 유니버스'를 번역한 박병철 선생(만나뵌 적은 없지만) 번역은 물리학 쪽에선 최고봉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는 김희봉 선생님도 아주 탁월하다. 김희봉선생님 번역이라면 언제라도 오케이일 정도. 파인만 시리즈 중에서 물리학 강의 말고 에세이 부문 많이 번역하셨고, 특히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같은 책들은 역자의 설명글이 압권이다. '물리가 물렁물렁' 시리즈를 번역하신 이충호선생님도 끝내주는 번역가이시고... 반면에 생명과학 쪽 주로 번역하는 이한음씨 번역은, 관련분야 전문가다운 솜씨는 인정하지만 문장이 가끔 목에 걸린다. (여담이지만 이한음씨는 신문사 국제부 기자들이 제멋대로 번역해서 퍼뜨려놓은 '줄기세포'라는 말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

일본어 소설 쪽에선 김난주씨가 워낙 탁월하니깐... 자기책 외국어번역본에 까다롭다는 요시모토 바나나도 만족스러워하고 있다고 들었다(김난주씨 본인한테 들은 거니까 신빙성이 떨어지나?) 김난주씨랑 양억관씨는 부부 번역가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김난주씨 쪽의 명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의 번역본을 모두 읽어봤는데(워낙 번역량이 많은 관계로... 이들의 번역본을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난주씨의 섬세한 번역은 진짜 대단하다. '창가의 토토'에서는 일본어 7언시의 운율을 살려, 번역문도 7언시로 해놓은 것을 보고 거의 감동했었다.

최근 읽었던 책들 중에서 아주 맘에 들었던 것은,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번역이었다. 국내에 몹시 진귀한 히브리어 전공자이자 손꼽을만한 이스라엘 전문가인 최창모 교수님이 옮기셨는데,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최교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정확히 말하면 아주 좋아하는 분이고 친하기까지 하다 ^^;;) '문학적인 분'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말 수준으로 치면 완벽에 가까운 번역이어서 새삼 놀랐었다.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늘상 거론되는 작가이지만 국내에는 의외로 팬들이 별로 없다. 그나마 국내에 오즈 작품이 번역돼 들어온 것은 순전히 최교수님 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숨은아이 > 청각장애인 노동자를 만나다

청각장애인 노동자를 만나다2004/11/04 15:51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사람들이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라고 생각해서일 게다.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는 모를 게다. 

 

작년에도, 올해도 받아야 할 임금의 절반도 못받았단다.

 

그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자기 말을 계속했고, 나는 이면지에 글을 써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대표이사는 에쿠스를 몰고 다니면서, 대여섯명 정도 되는 노동자의 임금은 제때 주지 않았단다. 그러고도 별로 해결할 노력도 보여주지 않은 모양이다.

 

회사 재산이 없는 경우를 예로 들어 그에게 때에 따라서는 전액을 다 받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개인회사가 아니라 법인체인 경우, 대표이사의 개인 재산에 대해서까지 책임이 확장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개인회사처럼 운영하면서도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고, 그럴 경우 법인격 남용이라는 주장과 입증으로 개인 재산까지 책임을 확장해 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므로, 따라서, 회사 재산이 없으면 밀린 임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개인회사라고 하더라도 개인재산의 명의를 타인으로 변경해 두는 경우도 많아 어려운 점이 많다. 그걸 원상태로 돌리려면, 사해행위 취소 소송도 해야 하고, 강제집행을 피할 의도를 찾아내어 형사처벌 요구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긴 시간 동안 맘대로 휘갈긴 내 글씨를 잘 알아 보는 그와 나의 대화는, 20여장 종이만을 흔적으로 남기고 끝났다.

 

경험으로 보면, 사용자들은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을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거래처에서 대금 결제를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노동자가 제때 임금을 달라고 하면 어찌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럴 수가 있냐거나, 기껏 일 시켜주었더니 배은망덕하다거나 하는 말도 곧잘 하는 것을 종종 본다. 특히, 외국인노동자에게는 심하다(미국 등 영어권 노동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임금이 곧 유일한 생활 기반이다. 그 임금은 병원비도 될 수 있고, 등록금도 될 수 있고, 당장 일용할 식량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임금을 제때 주지 않는 것이 왜 큰 문제가 아닐까 ?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 관념적으로 전제하는 민법체계에서야 일반적인 거래관계에서 발생한 채권채무관계를 직접적인 이유로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민법과 노동법은 그 존재 의의 자체가 다르다. 경제적 사회적 예속관계에 있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법'(좋게 말해 보호법이지, 법 자체가 강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기에 노동법 역시 강자의 최대 양보치를 정한 법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게다)에서는 임금을 주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하도록 되어 있지만, 사용자의 배째라는 소리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도 회사를 운영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시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해서 노동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동자들도 주는 대로 받고 무조건 기다리지 말고, 그 이유와 이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도 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정부는 밀린 임금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늘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그 지급 요건도 완화해야 하겠다. 또한 법인을 개인 회사처럼 이용하고, 개인 재산도 다 빼돌리는 파렴치한 짓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여, 엄벌을 해야 하겠다.

 

이랬으면 좋겠고, 저렇게 하면 된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현실적으로는 너무 어려우니, 답답할 때가 많다.

 

더군다나 어제 온 그는 입을 통해 나오는 말에 실린 타인의 감정을 완전히 읽을 수 없으니, 더 힘들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많이 들지만, 모쪼록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좌파’는 노리개가 아니다

‘좌파’는 노리개가 아니다

이광호 <진보정치〉 편집위원장  


보수 정파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사이비 좌파 논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좌파’ 그 자신이다. 피해자는 또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최근 국회 연설을 통해 여권의 개혁 법안들이 좌파적이며 사회주의적이라고 공격했다. 극우와 수구세력들은 현 정권을 그렇게 공격하고 있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 싸움이 처음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발호하는 이 색깔론의 약발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논쟁이 지속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좌파, 사회주의’는 용납될 수 없는 ‘악’이 되어버린다. 이는 특정 정파의 피해를 넘어서 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에서 피해자는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사이비 좌파 논쟁 와중에 급기야 여당 대표는 “우리 안에 좌파가 있다면 고발하라. 고문당해 주겠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준 이하의 발언이다. 좌파는 고발 대상이 아니며 어느 누구도 고문 대상이 될 수 없다.

열린우리당은 스스로 고백하듯 ‘중도우파’ 정당이다. 극우적 색채를 포함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좌파로 몰아세우며 자신들을 보수 세력의 정치적 대표체로 행세하려 한다. 열린우리당의 386세대 의원들이 전경련 간부 앞에서 “우리는 철없는 좌파가 아니다”라며 자신들을 ‘성숙한 우파’로 봐달라고 사정할 때, 한나라당 의원은 그들을 주사파로 몰아친다. 오른쪽으로 심하게 삐딱한 우리 사회의 ‘슬픈 소극(笑劇)’이다.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 위헌 결정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권의 핵심 쟁점이었던 국가보안법 폐지는 민주주의의 지표일 뿐 좌우를 가르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좌파적 가치는 마르크스로부터 나오는 것도, 주체사상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 서민의 편에 서서 정책을 만들고 법을 만드는 데서 나온다. 보수 정당처럼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며 이는 진보정당의 몫이다.

혹자들은 좌우를 따지지 말고 민생과 국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보수 정당 사이에서 민생과 국익에 관한 의미 있는 논쟁은 거의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 부분에 관한 한 그들 사이에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신용불량자 문제 등 민생의 핵심 현안에 대해 그들은 다른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국익’을 위한 이라크 파병에는 한목소리다.

좌파를 제물로 삼는 비겁한 우파들의 허무한 논쟁을 넘어서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좌파적 가치와 그것을 구체화시킨 정책을 가지고 사회적 토론과 논쟁을 진행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그런 것들을 국회에 법안 형태로 내놓고 있다.

부유세 도입을 위한 사전 입법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조세관련법 개정안, 2천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과 그 가족들을 위한 노동관련 법안, 농민들 편에서 농협을 개혁하는 관련법 개정안 등, 그들의 눈으로 보면 정말로 ‘좌파적’인 법안들이 지금 국회 안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전 국토의 기업도시화-경제특구화를 통해서 재벌에 토지수용권까지 헌납하고, 모든 월급쟁이의 비정규직화를 통해서 노동자들을 노예화하는 보수 정당들의 국가 경영 전략을 막아내는 것은 서민과 월급쟁이들의 시급한 당면 과제다.

이번 국회에서 정부 여당은 야당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폭 양산하는 법을 만드는 데 합의할 것이며, 노무현 정권의 ‘뉴딜 정책’은 경기 부양이라는 이름으로 그 핵심적 내용은 보수 정당들의 합의를 기초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막아내기 위해 지금 노동자와 농민들이 힘든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노동자, 민중의 요구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보수 독점 정치구조를 한국민주주의의 중대한 결함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의회에 진출한 좌파정당이 이 결함을 고쳐줘야 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反逆'의 횃불 든 전도사들...비전공자일 경우도 많아


전담번역의 세계

2004년 11월 08일   이은혜 기자 


▲전담번역은 때로 번역가의 한 생애를 건 저자와의 길고 지루한 대화다. 하지만 그런 내밀한 교감 속에서 진실한 번역의 언어가 탄생한다. 번역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나오지 못하는 이들의 면면을 엿본다. © 

전담번역자는 한 저자의 책을 도맡다시피 해서 번역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알베르 까뮈 하면 김화영 교수, 베르나르 베르베르 하면 이세욱 씨 등이 떠오르듯, 전담번역이라는 키워드로 번역서의 세계를 엿볼 경우 우리는 번역문화에 깃든 어떤 새로운 풍경과 열정을 만나게 된다. 학술서의 경우 전공자가 전담번역자가 돼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경우 비전공자가 순수하게 저자에 매혹돼 전담번역자로 깃발을 꽂을 경우도 많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로 나눠 전담번역자들의 면면과 특징, 해외사례 등을 살펴봤다. / 편집자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프랑스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건 시인 보들레르 때문이었다. 파리에 가 온갖 정보를 수집해 번역할 정도로 그는 포에게 심취해 있었다. 앙드레 지드 역시 번역에 정력을 쏟았다. 세익스피어, 괴테, 타고르를 프랑스에 소개했던 게 그였다. 한국에선 ‘알베르 카뮈’ 하면 김화영 고려대 교수를 떠올릴 것이다. 카뮈 전집을 번역했는데, 정확한 미문으로 사랑받아왔다. 미셸 투르니에의 아름다운 지중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것도 그의 덕이다. 이처럼 한 저자의 저서들을 꾸준히 번역하는 이른바 ‘전담번역’이 국내에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전담번역가가 된 사연들


서양철학전공자들 중 ‘전담번역가’의 길을 걷는 이들이 꽤 된다.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하이데거 담당번역자로 꼽힌다. 1987년 ‘실존철학’을 첫 역서로 내놓은 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 이르기까지 10여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기존 번역들이 일본어판을 옮겨 왜곡이 심하다”라는 게 번역착수의 이유였다. 하이데거는 독일 일상용어로 ‘개념놀이’를 잘하는데, 이것을 일본식 한자로 맞바꾸면 하이데거는 반토막이 돼버린다.


이 교수는 하이데거의 핵심용어인 ‘Dasein’을 ‘현존재’가 아닌 ‘거기-있음’으로 옮겼다. 또 ‘본질-존재’는 ‘무엇-임’ 혹은 ‘무엇으로-있음’으로 바꿨다. 학부 때부터 독일에서 공부했기에 그는 독일어 뉘앙스를 살리는 데 좀더 정확할 수 있었다. 



에드문트 후설의 책 역시 까다롭긴 마찬가지다. 후설 전담번역자는 이종훈 춘천교대 교수(철학). 이 교수는 순수 국내파이어서 그런지 더욱 원전에 충실한 공부를 해왔다. 그런데 해외유학파들이 국내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겉핥기식이나 2차 문헌에 의지해 소개하는 걸 보고, 번역을 결심하게 됐다. ‘현상학의 이념,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에서 시작해 ‘시간의식’, ‘경험과 판단’, ‘데카르트적 성찰’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형식논리와 선험논리’ 등 두 권을 번역중이다. 하지만 그의 독주가 두드러지는 후설번역의 뒤를 누가 이어갈진 미지수다.



현대성의 명석한 해석자 장 보드리야르를 알린 건 배영달 경성대 교수(불문학)다. 1994년 ‘생산의 거울’을 내놓은 이래, ‘세계의 폭력’, ‘지옥의 힘’, ‘건축과 철학’, ‘테러리즘의 정신’ 등 보드리야르 후기 저서를 여러 권 소개했다. 보드리야르와 첫 인연을 맺은 건 출판사 의뢰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배 교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라며 앞으로도 ‘Cool memories’ 시리즈 등을 번역할 것이라 한다. 



한편, 한나 아렌트의 전담번역자는 둘이다. 홍원표 한국외대 교수(정치철학), 김선욱 숭실대 교수(윤리학)가 아렌트 연구자면서 번역자다. 홍원표 교수가 ‘정신의 삶 1’과 ‘혁명론’을, 김선욱 박사가 ‘칸트정치철학강의’를 각각 옮겼다. 두 사람은 현재 아렌트 전기와 저서를 번역중에 있다. 두 사람의 번역은 차이가 좀 있다. 예컨대 ‘공공영역’, ‘공론장’ 등 핵심단어가 달리 번역된다. “중요한 건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홍원표 교수는 말한다. 어쨌든 역설과 반어법들이 많고, 또 서양철학 전반을 다루는 난해한 아렌트 사상의 전담번역자로 훗날 누가 꼽힐지는 두고 볼 일이다.


최근 빛보는 동양사상과 과학서



동양사상 쪽 번역도 활발하다. 가라타니 고진,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사상가들. 김석근 연세대 교수(정치사상)는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충성과 반역’, ‘일본의 사상’ 등 마루야마의 책만 다섯 권 소개했다. 첫 번역을 시작한 1995년 당시는 국내 동양사상 연구기반이 매우 약했다. 그렇지만 김 교수가 마사오 책을 보니 연구방법론이나 시각 등 배울 것들이 꽤 있어 시작했다. “일본어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또 문헌들이 많이 나와 번역이 만만찮았다”라고 털어놓는데, 영역본을 참조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해결했다고 한다. 곧 마사오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다’도 내놓을 예정이다.



물리학 쪽에선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박병철 대진대 교수(물리학)가 열심히 번역중이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1’,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이야기’ 등이 그것으로 대우재단번역지원을 받은 게 계속 인연이 됐다. 그가 번역하면서 중점을 둔 건 두 가지다. 첫째, 파이만 책들은 강의를 옮겨놓은 것이라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구어체로 전달했다. 둘째, 파인만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다른 논의들로 점프하곤 하는데, 이런 부분엔 박 교수가 ‘슬쩍슬쩍’ 보충설명을 끼워 넣었다.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공자도 아닌데 전담번역?



전공자가 아닌데도, ‘어쩔 수 없는’ 사연으로 전담번역자가 된 경우도 있다.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번역이 나왔다”라는 홍윤기 동국대 교수의 평을 받은 에른스트 블로흐 전집의 번역자 박설호 한신대 교수(독문학)가 그런 케이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메시아적 희망을 연결시킨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5권을 10여년에 걸쳐 번역해 내놓은 건 ‘대단한’ 일이었다. 번역을 시작했던 건 ‘유토피아 문제’로 학위논문을 쓰던 중 유토피아사상의 ‘권위자’인 블로흐에 매력을 느껴서다. 1990년대 초에 착수해 올해에야 빛을 보게 됐는데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번역했다. 하루 9시간 투자해 고작 1페이지밖에 못 옮긴다”라고 비전공자로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국내에 블로흐 전공자가 없고, 번역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아직도 블로흐의 주저인 ‘주체와 객체’는 번역이 안됐는데, 박 교수는 “전공자가 좀 해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이런 사례는 우리 번역문화의 우울한 현주소다. 예컨대 자끄 라깡의 책도 영문학자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던 게 우리 현실이다. 배영달 교수는 “어문학자들이 철학서를 번역하는 게 특히 안타깝다”라고 지적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11-0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같은 면에 난 같은 기사인데 이상하게 이 부분만 올라가지 않아서,

한글 문서로 옮겼다가 다시 올렸습니다.

릴케 현상 2004-11-09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이정우씨 글을 읽는데, 어느 사회학도가 프랑스철학이 김현류의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처음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 말에 분개한 걸 봤어요. (저 같은)일반인들은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balmas 2004-11-0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분개할 것까지야 ... ^^

프랑스 철학이 그렇게 해서 대중화된 거야 사실이죠, 뭐.

로쟈 2004-11-09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드리야르 '전문가'의 번역이라?! 오늘의 넌센스라 할 만하네요. 그는 보드리야르의 '소설'을 번역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