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에 [알튀세르 효과]에 관한 기사가 실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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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100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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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효과]에 관한 경향신문 기사를 링크해둡니다.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는데, 10매 정도의 기사가 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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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책과 삶]“어떤 지배계급도 매체 독점하려는 순간, 저항 끌어들이게 돼”


어느덧 흘러간 이름이 돼 버린,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를 왜 되새기는가. 이 물음에 최근 900쪽 가까운 분량의 <알튀세르 효과>(그린비)를 엮어낸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45·사진)는 지난 7일 연구실에서 일화 한 토막을 꺼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재판이 진행되는 때였어요. 지하철에서 어떤 노인이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나라를 위하셨는데 감히 구속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서민들이 왜 이 회장을 걱정하는지, 흔히 ‘계급을 배반한다’고 불리는 메커니즘의 작동에 대해 알튀세르가 하나의 대답을 줍니다.”

이렇듯 알튀세르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는 것이 2년6개월간 출간 작업을 해 온 진 교수의 믿음이다.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결국 마르크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실패를 되풀이할 수는 없죠. 알튀세르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복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나머지 내용은 아래 링크로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2092013035&code=9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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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스피노자 관련된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까,

이상한 것 한 가지가 눈에 띄어서 다음과 같이 알라딘 측에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답변이 올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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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였던 스피노자의 이름이 모두 "바뤼흐 스피노자"로 되어 있네요.

왜 이름이 이렇게 표기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것도 국립 국어연구원에서 정한 규칙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바루흐 스피노자"나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로 표기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스피노자가 프랑스 사람도 아니었는데, "Baruch"가 "바뤼흐"라고 표기된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프랑스어식으로 표현한다면 "Benoit"라고 해야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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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4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2-01-14 17:44   좋아요 0 | URL
Bento de Spinoza는 "벤투 데 스피노자"로 옮기면 될 것이고, Baruch de Espinoza는 보통 "Baruch d'Espinoza"라고 모음축약해서 표기하는 것 같던데? 이 경우에는 "바루흐 데스피노자"로 하면 되겠지.

extraneus 2012-01-14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PhEAV 2012-01-2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덜란드어 u는 ㅟ로 표기합니다. ㅜ로 표기되는 건 oe죠. 그래서 바뤼흐로 표기하는 것 같습니다.

balmas 2012-01-21 16:36   좋아요 0 | URL
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Baruch라는 말은 스피노자가 속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부르던 명칭인데 그걸 네덜란드어 표기법으로 부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PhEAV 2012-01-2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 네덜란드식 표기법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글 쓰신 분이 프랑스어가 아닌데 왜 ㅟ를 쓰느냐고 하신데 답이 없어서 썼는데 왠지 이상하게 끼어들어서 아는 척하는 느낌으로 썼네요 크으;;;;;;;;
뜬금 없게(?) 되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논문, 책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balmas 2012-01-21 23:30   좋아요 0 | URL
아니요 별 말씀을요. 사실 알라딘 측으로부터는 이미 답변을 받았는데, 왜 그렇게 쓰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더라구요.^^ 저는 그저 프랑스에서 공부한 분이 혹시 프랑스어 발음의 용례를 따라 "바뤼흐"라고 표기하게 된 건 아닌가 해서 문제제기를 해본 거였습니다.
PhEAV님의 문제제기 감사하구요,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올해는 더 열심히 해서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알튀세르 효과]가 드디어 출간이 됐습니다.  

막판에 편집상의 문제로 인해 원래 계획보다 다소 늦어졌습니다만,  

무사히 책이 나와서 다행입니다.  

필자, 역자분들 수고 많이 하셨고, 그린비 출판사분들도 모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많은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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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07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번역에 참여하셨나 봅니다.
전 감히 엄두도 못낼 것 같습니다만,
수고 많이하셨네요. 축하합니다.^^

balmas 2011-12-07 21:0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오랜만이시네요. 예 저도 한 자리 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suwanee 2011-12-0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은 알튀세르 효과 읽기에 집중하겠습니다.

balmas 2011-12-08 22:41   좋아요 0 | URL
ㅎㅎ 예 알튀세르 효과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이 두꺼워서 한 달은 집중해서 보셔야 할 것 같네요.^^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3
질베르 시몽동 지음, 김재희 옮김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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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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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독창적일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의 생각이 독창적인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은 익히 알려진 통념들이기 십상이다.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생애는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바쳐진 생애이며, 그것도 이른바 대가들이 남긴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주석을 다는 일에 바쳐진 생애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1924-1989)은 경이로운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의 독창성을 칭송하는 뜻에서 그들을 19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야말로 사상가에게는 최고의 호칭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몽동이야말로 마땅히 20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기술에 관한 우리의 두 가지 통념을 완전히 뒤엎으면서 기술에 관한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술에 관해 너무 비관적이거나 너무 낙관적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공상과학영화에서 즐겨 다루듯이, 기술이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인간을 기술의 노예로 만들게 되리라는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 예찬론자들은 기술이 인간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왔으며, 앞으로도 더욱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전자가 기술적 대상은 (자연 및) 인간에 대해 적대적 존재자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기술적 대상을 오직 인간의 유용성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몽동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는 기술적 대상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의 본질은 자동성이라는 믿음이다. 20세기 후반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통해 널리 유포된 이런 믿음은 기술적 대상 또는 간단히 말하면 기계에 대한 세 가지 통념을 함축한다. 하나는 기계가 미리 결정된 작용만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는 결정론적 통념이다. 둘째, 따라서 기계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자라는 생각이다. 셋째, 이 두 가지 통념은 결국 기계는 인간과 전혀 무관한 것이며(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인간적이라는 생각을 낳는다. 기계는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남을 때 유용한 것이지만, 기술적 자동성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몽동은 우선 자동성이 기술적 대상의 본질을 이룬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기술의 본질은 오히려 비결정성에 있다. 곧 기술적 대상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외부 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열린 체계다. 다만 생명체는 완전히 “구체화”되어 있는 데 반해, 기계는 항상 어느 정도의 “추상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쉽게 말하면, 기계는 생명체와 달리 정보를 생산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술적 대상들은 자신의 고유한 진화 과정에 따라 발전하지만, 인간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때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다. “인간은 자기 주위에 있는 기계들의 상설 발명가이자 조정자로 존재하는 기능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과 함께 작용하는 기계들 가운데 존재한다.”(14쪽)

그렇다면 기술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생태운동가들이나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맹목에 젖은 테크노크라트들 모두 기술적 소외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시몽동이 보기에 우리 문명의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기술적 소외를 극복하는 것, 곧 기술공학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인문학 독자들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과학기술자들과 생태 운동가들에게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필자가 알기로 이 책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완역된 적이 없으며, 영역본이 이제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것은 시몽동의 사상이 그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외국만이 아니라 프랑스 국내에서도 그동안 충분히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책을 유려한 한글로 읽게 된 것은 역자의 헌신적인 노고 덕분이다. 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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