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신문]에서 2014년 학술 기획으로 '우리시대의 사상가'라는 연재를 내고 있는데,

 

제게 에티엔 발리바르를 소개해달라는 청탁이 와서 쓴 글입니다.

 

글의 일부는 알리딘 [철학.책-서양철학 편]에 실린 "에티엔 발리바르"와 중복되는데,

 

이런 소개글이 필요한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청탁에 응했고, 신문에 실린 글을 여기에 올려둡니다.

 

글은 2회에 걸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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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 (상)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에티엔 발리바르는 누구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국내의 젊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90년대 대학을 다니고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었던 독자들에게는 꽤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전개된 한국사회성격논쟁에서 이른바 민중민주혁명(PD)파의 이론적 주춧돌이었다. 그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 그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공론장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맹위를 떨치고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세계 도처에서 극우 정치의 온상으로 기능하게 되면서 발리바르는 다시 유령처럼 국내에 되돌아왔다. 왜 대중들은 스스로 예속당하는 것을 욕망하는지, 왜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연대하는 대신 부자들을 위해 서로 증오하는지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는 이가 바로 발리바르이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사상적 이력은 외관상 크게 두 개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려 했던 그의 스승 루이 알튀세르의 이론적 문제설정에 기반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원칙 및 주요 개념들을 쇄신하려는 작업을 수행하던 시기다(1960년대~1970년대 말). 두 번째 시기는 알튀세르가 착란 속에서 부인을 목졸라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유폐된 이후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면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1789)에 대한 재독해에 의거하여 급진 정치철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시기다(198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대 유럽 이론가들 중에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참조하는 드문 이론가이고, 인종과 민족 또는 국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거의 유일한 사상가이며, 알튀세르 사상의 현재성을 고수해온 유일한 인물이다.

 

 

이데올로기론을 개조하기

 

 

  1980년대는 발리바르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을 시도한 시기였다. 우선 발리바르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에서 찾는다(󰡔대중들의 공포󰡕 참조). 곧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 모순을 다른 사회적 모순들이 근거해야 하는 중심적이고, 심지어 유일한 모순으로 간주했으며, 더욱이 이를 진화주의나 종말론적인 역사철학에 따라 사고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고되거나 아니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결정적인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맹목은 곧바로 파시즘과 나치즘의 집권이라는 대가를 낳았으며, 결국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진단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스승인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개념과 호명(interpellation) 개념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을 개조하는 데 핵심적인 진전을 이룩했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여전히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는 역사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역사적으로 전개되고 위기와 전환을 겪는 과정을 충실하게 분석할 수 없었다. 둘째, 그의 이론은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경제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지만, 이데올로기가 다른 물질적 모순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쇄신은 발리바르가 1980년대에 시도했던 마르크스주의 탈구축의 핵심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1988)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맹목점으로 남아 있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국민형태(nation form) 개념을 제안한다. 국민형태라는 개념은 프랑스, 러시아, 독일 같은 국민 공동체를 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공동체로 간주하는 가상에서 벗어나, 국민의 역사적 형성과 재생산, 전환 과정을 계급투쟁과 결부시켜 사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국민형태 개념은 한편으로 국적=시민권 개념과, 다른 한편으로 허구적 민족체(fictive ethnicity)라는 또 다른 개념과 연결된다. 국적=시민권은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국적을 가진 성원에게만 부여해온 근대 국민국가의 경향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표현된 보편적 민주주의 원칙을 제한해온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의 한계를 드러내준다([정치체에 대한 권리] 참조). 또한 허구적 민족체는 국민국가의 배타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국민 공동체가 마치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초역사적 민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제시하는 가상(‘단군의 자손’과 같은)을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 발리바르는 근대 국민국가의 모순과 함께 그 변혁의 방향을 사고하기 위한 이론틀을 마련한다.

 

 

스피노자와 함께 정치를

 

 

  [스피노자와 정치](1985)에 집약되어 있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연구는 계급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대중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탐색하는 데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는 네그리와 더불어, 하지만 또한 네그리와 매우 다른 관점에서 스피노자 다중(multitude) 개념의 독창성에 주목한 최초의 연구자였다. 네그리가 다중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이해한다면, 발리바르에게 다중 개념은 방법론적 개체론과 전체론을 넘어서는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을 사고하기 위한 원천이 되며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관개체성 개념은, 사회적 관계는 원자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지 않고 국가나 국민 같은 초개인적인 전체로 구성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개인이나 국가 같은 추상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개인이나 국가는 스피노자가 다중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갈등 관계 속에서 생성, 재생산, 전환을 거듭한다.


  또한 다중은 민주주의와 관련한 스피노자의 이중적 태도를 집약적으로 드러내주는 개념이다.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가장 완전한 정체”로 규정하며, 모든 국가의 토대를 “다중의 역량”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론] 이곳저곳에서 다중으로의 복귀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위험 또는 파국적 상황으로 묘사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모순적 태도에서 민주주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다.


  첫째, 스피노자에게 다중으로의 복귀는 아나키, 곧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뜻한다. 따라서 이는 폭력과 갈등의 폭발을 의미하며, 개인들에게는 생명과 안전의 위협을 뜻한다. 자연 상태와 유사한 이러한 아나키 상태에서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스피노자가 민주주의 및 정치적 관계 일반을 본질적으로 취약한 것, 또는 선험적인 토대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지만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거부하지 않고 다중을 통제나 억제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다중을 모든 국가의 토대로 제시한다. 이는 스피노자에게 정치란 초월적(가령 신)이거나 자연적인 토대(가령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에 기초를 둘 수 없으며, 오직 대중들의 집합적인 실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뜻한다. 곧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오직 제도들 및 집합적 실천의 결과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발리바르는 민주주의는 법적인 관점에서 규정된(곧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별되는) 하나의 정치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갈등적인 과정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민들의 봉기 운동인 ‘민주주의의 민주화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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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 (하)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진보 정치를 찾아서

 


정치의 세 개념

 

 

 1990년대 이후 에티엔 발리바르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체 작업을 넘어 진보 정치를 쇄신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왔다. 특히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다움」은 19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개념적 모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대중들의 공포]에 수록).


  첫 번째 정치의 개념인 해방(emancipation)은 근대 민주주의 정치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를 갖지 않으며, 피억압자 자신의 해방의 역량을 유일한 기초로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1789년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이하 "선언"으로 약칭)에서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본다.


 

  반면 두 번째 개념인 변혁(transformation)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ㆍ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정치의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 그는 마르크스와 푸코의 사상을 변혁의 정치의 두 가지 경쟁적인 모델로 제시한다.


  세 번째 정치는 시민다움(civility)의 정치로, 이는 정체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세 번째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해방과 변혁의 정치는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전제할 뿐, 지배 구조의 강화로 인해 그러한 주체의 가능성이 잠식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다움의 정치는 극단적 폭력을 퇴치하거나 감축하기 위한 반(反)폭력의 정치다.

 

 

평등자유명제

 

 

  "선언"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발표된 문서로, 근대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텍스트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 헌법은 "선언"을 헌법 전문(前文)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언"을 이중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한편으로 중세의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선언"은 정치적 해방을 선언하고 있지만, "선언"이 말하는 정치적으로 해방된 인간 내지 시민 대부분은 아무런 소유도 없이 자본의 굴레에 예속된 프롤레타리아들이다. 따라서 "선언"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할수록,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의 현실은 은폐되고 만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선언"의 의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해방의 정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장애가 된다. 발리바르는 "선언"의 핵심은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긍정한 데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가 뜻하는 것은,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오직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약간 부연해보자. 근대 이전까지 정치 공동체는 한편으로 신의 율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자연적인 질서(인간 본성이나 혈통과 같은)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선언"이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언하면서, 정치 공동체는 더 이상 신성하거나 자연적인 질서에 기초를 둘 수 없게 되었다. 곧 정치 공동체는 이제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고 보장하기 위해 세운 정치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정치 공동체 안에 억압과 지배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피억압자들과 피지배자들 자신의 단결된 힘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곧 시민들의 평등 없이 시민들의 자유 없고, 또 역으로 시민들의 자유 없이 평등 없으며, 시민들 자신의 연대와 단결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평등자유명제”라고 부르며, "선언"의 핵심에는 바로 이 명제가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이 명제는 1789년 당시에만 유효했던 명제가 아니라, 그 이후 역사적으로 존재한 거의 모든 해방 운동의 근거로 작용했던 명제다. 가령 19세기 후반의 여성운동, 20세기 초반의 식민지 해방운동, 20세기 후반의 흑인인권운동이 모두 이 명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선언󰡕과 그 핵심으로서 평등자유명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보 정치의 주춧돌을 이룬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주장이다.

 

 

시민다움

 

 

  발리바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시민다움의 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에는 극단적인 폭력의 양상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폭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초객체적 폭력(ultra-objective violence)이다. 이것은 가령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거나 고통 받는 아프리카, 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회용 인간’으로서 마약 밀매나 중노동에 시달리는 남아메리카 등에서 나타나는 폭력이다. 곧 사람들을 사물이나 도구로 환원해버리는 폭력이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은 겉보기에는 자연재해나 전염병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다중적인 요인들에서 생겼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초주체적 폭력(ultra-subjective violence)이다. 이 폭력은 어떠한 진보적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테러나 자살 폭탄 등을 포함하는) 같은 현상들을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발생한 이른바 ‘민족 청소’나 대량 학살 등에서 나타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이다. 곧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민족이나 인종의 정체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극단적 폭력을 특수한 지역이나 경우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초객체적 폭력은 사람들이 단순한 사물이나 도구(또는 상품)로 취급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나타나며, 또한 초주체적 폭력은 개인들이 어떤 집단적인 권위나 이상(특히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속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정치의 개념들이나 문제틀로는 이러한 극단적 폭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 문법은 그것이 착취이든 억압이든 폭력이든 간에, 그것에 맞서고 더 나아가 그것을 폐지하거나 철폐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를 자명한 것으로 가정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이 공격하고 잠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집단적 주체의 가능성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공안 정치의 결합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극단적 폭력들에 맞서기 위해 발리바르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 정치를 결합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의 역량을 복원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를 탈본질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시민다움의 정치다. 정치 공동체를 어떤 특정한 정체성(가령 민족)을 지닌 시민들 위에 근거 짓지 않고, 좀더 개방적이고 다원화된 (탈)정체화의 과정 속에서 개조하는 것이 바로 시민다움의 정치의 목표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는 “차이 및 평등의 권리와 동시에 연대와 공동체의 권리를 함께 요구하는 것”([정치체에 대한 권리]), 그리고 그것을 담론과 실천, 제도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 오늘날 진보 정치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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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총서 신간이 하나 더 나왔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이론가인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가 16번째 프리즘 총서로

 

이번 주에 출간되었습니다.

 

피에르 마슈레는 역시 프리즘 총서로 출간된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저자로 국내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철학자입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이 책의 불어 원서가 출간된지 30여 년이 지난 2011년에

 

영역본이 나왔고, 올해 말에 프랑스에서 이 책의 출간 35주년을 기념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제이북스에서 나온 [헤겔 또는 스피노자] 초판 역자 해제는 아래 주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8317

http://blog.aladin.co.kr/balmas/8318

http://blog.aladin.co.kr/balmas/8320

 

그린비 출판사에서 나온 [헤겔 또는 스피노자] 2판 "역자 서문"은 아래 주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3461237)

 

 

하지만 마슈레는 영미권을 비롯한 국제 학계에서는 스피노자 연구가이기 이전에 문학이론가로서 훨씬 더

 

대단한 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영미권에서는 지난 1978년에 A Theory of Literary Production이라는 제목

 

아래 이 책의 영역본이 출간된 이래 가장 독창적인 문학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고 논의되어 왔습니다.

 

 

국내에도 지난 1994년에 이 책의 번역본이 출간된 적이 있지만([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배영달 옮김, 백의), 

 

무수히 많은 오역들 때문에 국내의 논의에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마슈레 문학론의 또 다른 주요 저서인 [문학은 무엇에 관해 사유하는가?](A quoi pense la litterature?)도

 

 지난 2003년에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3)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된 바

 

있지만, 차마 번역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터무니없는 오역들로 인해 역시 국내에 아무런 효과도 낳지 못한 채

 

사장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론에 관해서는 아래의 주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2439755)

 

 

마슈레 문학론의 독창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점이 늘 아쉬워서 이 책을 "프리즘 총서"의 한 권으로

 

수록했는데, 윤진 선생님께서 오랜 노고 끝에 정말 훌륭한 번역을 해주셨습니다. 이 번역본을 통해 아마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마슈레 문학론의 실체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오래 사랑받고 많이 읽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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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획연재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17회차 원고입니다.

 

국내에는 아주 생소한 이탈리아 철학자인 마리오 트론티에 관한 글입니다.

 

신문사에서는 제목을 "노동자가 자본의 일부임을 인식할 때 주체젹 변혁 가능"이라고 잡았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593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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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서 링크해둡니다.

 

한겨레 신문사의 최원형 기자와 미디어스의 인터뷰인데, 학술 출판과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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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근대철학회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하고 조만간 창비에서 출간될 [근대종교철학]에 수록될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저는 니콜라 말브랑슈의 종교철학을 소개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 원고는 최종적인 교열을 거치지 않은 원고이므로, 공적인 매체에서 인용하거나 토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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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브랑슈와 변신론: 지양 불가능한 악

 


I. 서론

 

  우리나라에는 주로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라는 학설의 대변자로 알려진 니꼴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1638~1715)는 데까르뜨 이후 프랑스 철학계의 중심에 있던 철학자였으며,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자신의 철학 체계를 가다듬고 데까르뜨주의가 분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말브랑슈의 사상에서 기회원인론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변신론(theodicy)의 문제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변신론이라는 용어는 라이프니쯔가 처음 고안해냈다. 그는 1710년 출간된 [변신론](Essais de Théodicée)에서 악이라는 문제에 대한 형이상학적ㆍ신학적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의 철학적 신학의 범형을 제시한 바 있다. 라이프니쯔의 [변신론]과 그 저작에서 제시된 체계적인 이론이 워낙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까닭에 동시대에 제시된 다른 이론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특히 말브랑슈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말브랑슈는 [진리탐구에 대하여](1674~75)를 출간한 이후 [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1680)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변신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아르노 및 라이프니쯔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다듬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를 통해 그 이전까지 서양 신학에서 변신론의 주요 패러다임으로 존재해왔던 아우구스티누스 및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과 단절하는 새로운 변신론을 제시하게 되었다. 


  더욱이 말브랑슈의 이론은 라이프니쯔나 헤겔의 이론과도 구별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이론보다 현대 사상에 좀더 부합하는 상당히 급진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 그것은 라이프니쯔에서 헤겔에 이르는 (또는 그 이후 다른 사상가들까지 포함하여) 기독교적인 관점을 고수하는 사상가들과 달리, 말브랑슈는 이 세상에 악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지양 불가능하다는 것, 더욱이 그러한 악의 지양 불가능성은 신의 전능함이나 완전성 또는 선함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말브랑슈의 변신론이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무언가 의미 있는 사유 과제들을 제시해준다면, 그것들 중 하나는 이러한 악의 지양 불가능성에 관한 독특한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변신론에 초점을 맞춰 말브랑슈 종교철학의 주요 논점과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글은 크게 네 단계로 전개될 것이다. 우선 2절에서는 말브랑슈 이전의 서양 기독교 신학에서 변신론의 요체를 제시해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간략히 살펴본 뒤, 3절에서는 말브랑슈의 변신론이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사상과 단절하고 있는지 검토해보겠다. 그리고 4절에서는 말브랑슈에 대한 앙뚜안 아르노(Antoine Arnauld)의 비판과 말브랑슈 자신의 답변을 살펴볼 것이며, 5절에서는 변신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라이프니쯔와의 논쟁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 두 절의 논의를 통해 근대 변신론의 흐름 속에서 말브랑슈가 차지하고 있는 사상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 좀더 정확히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 6절에서는 말브랑슈 변신론의 현대적인 의의에 관해 간략히 지적해볼 것이다.
 

 

II. 서양 기독교 신학의 변신론: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양 기독교 사상 전 분야에 걸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변신론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변신론 문제에 관한 두 사람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악을 결여(privatio)로 정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악을 ‘좋음의 결여’(privatio boni)로 정의하고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악을 ‘좋음의 결여’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좋음의 결여’(privatio boni debiti)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좋은 것이라는 명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곧 악은 사실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좋음)가 없는 것, 따라서 존재론적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두 사람에게 악이란 사실상 무를 뜻한다.


  그런데 만약 악이 좋음의 결여를 뜻하며, 더욱이 존재론적으로는 무에 불과한 것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악들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그림이나 음악 작품과 비교함으로써 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곧 그림이나 음악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의 부분들 자체가 가장 아름답거나 탁월한 것이 아니라,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의 조화의 아름다움이나 탁월함인 것처럼,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최선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부분들 사이의 최선의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이 경우 그 질서를 이루는 부분들 각각은 반드시 최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세계를 이루는 부분들 중 열등하거나 덜 완전한 부분 역시 세계의 최선의 질서를 이루는 한 구성 요소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연적인 악의 기원에 관한 물음은 성립하지 않는 물음이 된다. 신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악의 창조주, 따라서 악의 기원이 아닐뿐더러,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범죄, 불완전성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을 의지의 도착에서 찾는다. 곧 악은 “우리 주 하느님으로부터 의지가 등을 돌리는 것”(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2권 20장)에서 생겨나며, “의지의 도착 이외의 다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신국론] 11권 17절)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모두 이 세상이 완전한 세상이라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악과 범죄, 불완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적인 자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적 설명에서 악은 결국 존재론적으로 무에 불과한 것으로 귀착되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과 불완전성은 세계의 최선의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악의 원인은 의지의 그릇된 사용에서, 곧 윤리적 관점에서만 설명될 뿐, 아무런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III. 말브랑슈의 변신론: 세계의 불완전성, 일반 의지, 단순성

 

 

  말브랑슈에게 변신론의 문제는 그의 기회원인론 때문에 매우 첨예한 쟁점이 된다. 기회원인론에 따르면 유한한 사물들 또는 피조물들 사이에는 진정한 인과 작용이 성립하지 않으며, 오직 무한한 역량을 지닌 신만이 진정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변신론의 문제는 신은 본성상 선하고 자비롭고 완전한 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악과 결함, 불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괴리를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하여 기회원인론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변신론의 문제는 좀더 첨예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회원인론에서는 오직 신만이 진정한 원인이고,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원인 역시 신일 수밖에 없으며, 신은 이 세상의 악과 결함, 불의에 대해 책임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브랑슈는 이 세상에는 불완전성과 악, 불의가 존재한다는 점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악의 존재론적 실재성이나 우주론적 불가피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악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긍정한 가운데, 이를 신의 완전성 및 지혜와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바로 이 점이 그의 변신론의 독창성을 이룬다.

  말브랑슈 변신론의 쟁점은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1688)의 한 대목에서 분명하게 제시된다.

 

떼오도르: 그렇다면 우주는 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인가? 하지만 현실을 보게! 그토록 많은 기형아들과 그토록 많은 무질서, 수많은 불경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완전성에 기여하는 것인가?

아리스뜨: 신은 가능한 가장 완전한 작품을 만들기를 원하네. 왜냐하면 그 작품이 더 완전할수록 그것은 신의 영예를 더 드높이게 될 것이기 때문일세. 이 점은 내게는 명백해 보이네. 하지만 나는 만약 이 작품이 그것을 왜곡시키는 수많은 결함에서 자유로웠다면 더 완성도가 높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네. 바로 이 점이 나를 곧바로 멈추게 만드는 모순일세. 신은 당신의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의 속성들에 가장 걸맞은 계획을 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네.(말브랑슈,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9장 9절)

 

이 대화에 나타나듯이 말브랑슈가 풀고자 하는 변신론의 문제는, 완전하고 전능한 존재인 신은 그가 하려고 하면 이 세상을 지금보다 더 완전하게 창조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는 이처럼 수많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세상을 창조했을까 하는 점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말브랑슈에게 세계의 불완전성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 무질서, 결함의 실재성은 처음부터 주어진 전제로 간주되고 있다. 악, 불완전성, 무질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따라서 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완전성을 해치는 것, 따라서 무보다 더 나쁜 것들이다.


  그렇다면 말브랑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그것은 신의 의도의 완전성과 더불어 신이 행위하는 방식의 단순성과 일반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말브랑슈는 이전의 다른 기독교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은 이 세계를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하게 창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긍정한다. 이 세계의 완전성은 신의 무한한 완전성에 걸맞은 일일 뿐만 아니라, 신의 지고한 선함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이 세계는 가능한 한 최선의 세계, 가장 완전한 세계와는 거리가 있는, 수많은 악과 무질서,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한 존재인가? 이것은 무한하게 완전한 신의 속성 중 하나로 전능함을 들고 있는 말브랑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그게 아니면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과 무질서, 불완전성은 그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완전한 질서를 구성하는 부분들인가? 따라서 이 세계는 부분적인 악과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에서 보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이 세상의 악과 불완전성의 존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변신론의 요점이며, 또한 라이프니쯔나 심지어 헤겔(“이성의 간지”)의 답변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들과 달리 말브랑슈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의도와, 실제로 신이 그러한 창조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 및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는 방식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긍정한다. 다음 대목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신은 그의 모든 피조물이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며, 아이들이 엄마의 자궁 속에서 죽게 되기를 원치 않고 기형아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존재자들이 산출되게 하는 자연법칙들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동등하게 단순한 방식으로 좀 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할 수 있었다면, 그는 그처럼 많은 기형아들이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 있는 법칙들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특수한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그의 의지를 다수화하는 것은 그의 지혜에 걸맞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말브랑슈, [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22절)

 

신은 그가 원했다면 기형아가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의인이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중단시키고, 가뭄에 시달리는 곳에 비를 뿌리고 홍수가 난 곳에서 비를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만약 신이 기형아가 태어나는 것을 막고 수많은 범죄와 죄악을 방지하고, 가뭄이나 홍수 또는 태풍 같은 자연 재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는 수많은 특수한 상황들에 특수한 방식으로, 곧 다수의 특수한 의지(volonté particulière)를 통해 개입해야만 한다. 곧 신은 수많은 특수한 상황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는 신의 “지혜에 걸맞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에게 지속적인 기적을 요구하거나 매순간마다 신에게 기적들을 귀속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21절) 여기서 말브랑슈가 말하는 신의 지혜란 가장 복잡하고 가장 완전한 일을 가장 단순한 법칙에 따라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13절) 따라서 신의 세계 창조 및 보존이 신의 지혜에 걸맞은 일이 되기 위해서는 신은 자신이 확립한 가장 단순한 법칙들, 곧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위반하지 않는 가운데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이 창조한 세계는 단순히 이 세계를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세계로 만들려는 신의 의도만이 아니라,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 지닌 단순성과 일반성이 반영되어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선과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한 이는 신이다. 신은 선량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던 악당만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고 하던 의인에게도 집 지붕 위의 기와를 떨어뜨린다.”(말브랑슈, [기독교적ㆍ형이상학적 성찰] 7번째 성찰, 19절) 그러면 신은 자신의 확립한 일반 법칙, 곧 자신의 일반 의지에 걸맞게 행위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선과 악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것인가? 말브랑슈는 여기에서 선과 악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하지만 신은 선을 행하고(fait) 악은 허용하는데(permet), 이는 신이 직접적이고 실정적으로는(positivement) 선을 원하며 악은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다. 나는 신이 악은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신은 결코 기형아들을 산출하도록 자연 법칙들을 제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법칙들이 아주 단순한 까닭에 깜짝 놀랄 만한(admirable) 산물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이처럼 신은 실정적으로는 그의 산물의 완전성을 원하며, 오직 간접적으로만 불완전한 것과 맞닥뜨리기를 원한다. [...] 신이 선을 행하는 것은 그의 산물이 완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신이 악을 행하는 것은 신이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행위 방식이 단순하고 규칙적이고 일양적이며 견고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그의 행동이 그 자신에게 걸맞은 것이 되고 그의 속성들의 특징을 가시적으로 지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말브랑슈, [기독교적ㆍ형이상학적 성찰] 7번째 성찰, 19절)

 

선과 악에 대한 신의 태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신은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선을 원하며, 반대로 악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허용한다. 악을 원하지 않음에도 허용하는 이유는 신이 제정한 자연법칙, 곧 신이 행위하는 방식이 아주 단순해서 그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불가피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신의 행위 방식의 단순성은 다른 말로 하면 신이 제정한 자연 법칙이 우주에서 “단순하고 규칙적이고 일양적이며 견고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자연 법칙은 선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그리하여 선한 사람이 우연히 지붕에서 떨어진 기와에 맞는 일이 발생한다), 메마른 땅이나 비옥한 땅에도 규칙적으로 작용한다(그리하여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브랑슈는 그가 무한하게 완전한 신의 속성들로 제시한 역량(puissance)과 지혜(sagesse) 중에서 후자에 좀더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의 전능함에 따르면 신은 그가 의도한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고 또한 바꿀 수 있음에도, 신은 그가 지닌 무한한 지혜에 따라 항상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행위하기 때문이다.


 

IV. 말브랑슈와 아르노의 논쟁: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

 

 

  이처럼 말브랑슈의 변신론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신의 역량보다 신의 지혜를 좀더 강조하고, 그리하여 신의 역량을 제한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처럼 신의 역량을 신의 지혜에 종속시키는 듯한 말브랑슈의 관점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단호한 비판가는 앙뚜안 아르노였다. 아르노의 비판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아르노는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위하는 것’과 ‘일반 의지에 의해 행위하는 것’은 분명 서로 다른 것임에도 말브랑슈는 양자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아르노는 일반 의지를 특수하지 않은 일반적 내용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것들에 대해 직접 작용하지 않는 의지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분명히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위한다. 하지만 신이 법칙에 따라 어떤 것을 실제로 산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일반적일 수 없다. 신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특수하게 하지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다. 신이 하나의 영혼을 창조할 때 신은 특수한 작용을 통해서 그것을 창조한다. 그리고 신에게는 ‘행위하기’와 ‘의지하기’가 하나의 동일한 것인 만큼, 신이 어떤 것을 특수하게 한다면, 그것은 특수한 의지를 수단으로 삼아 하는 것이다.(아르노, [자연과 은총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철학적ㆍ신학적 성찰]) 분명 이 특수 의지들은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사된다. 하지만 이는 의지들 자체가 본성상 일반적이거나 범위상 보편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은 일반 법칙에 일치하기는 하지만, 특수한 것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를 항상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의지한다.(아르노, [자연과 은총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철학적ㆍ신학적 성찰]) 그의 창조의 모든 측면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신에게 다른 행위 양식은 걸맞지 않다. 아르노가 볼 때 말브랑슈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그는 일반 법칙 내지 일반 의지 또는 일반 원인(신에게 이 세 가지는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한다)을 두 종류로 구별한다. 첫 번째 종류의 일반 원인은 그의 관심 내지 활동이 모든 사물들에게 미치되, 각각의 모든 특수한 사물에 대하여 특수한 이해나 관심을 기울이는 것(따라서 특수 의지를 갖는 것)을 수단으로 하여 그렇게 한다는 의미에서 일반 원인일 수 있다. 반면 두 번째 종류의 일반 원인은 국가 신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초연하게 존재하는 왕이 오직 일반 법령(“거리에 거지가 없게 하라.”)을 수단으로 하여, 하지만 이 법령들이 개인 신민들과 어떤 관련이 있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또는 법령들이 실행되는 세부 방식이나 그 법령들의 질에 관해 아무런 이해도 없이 왕국을 통치하는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일반 원인일 수 있다.(아르노, [자연과 은총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철학적ㆍ신학적 성찰]) 아르노가 보기에 말브랑슈의 신은 두 번째 종류의 일반 원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수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오직 일반적인 법령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하지만 여러 현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아르노의 비판은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 및 변신론의 실제 논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진 비판이다. 아르노는 말브랑슈의 신이 특수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일반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신은 항상 특수한 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아르노 자신이 사용하는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라는 개념은 말브랑슈가 사용하는 두 개념의 의미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아르노가 말하는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신은 오히려 말브랑슈가 말하는 일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신에 더 부합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은 말브랑슈가 말하는 일반 의지 또는 일반 원인으로서의 신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 잘 보여준다.

 

아리스뜨: 운동하는 물체란 무엇이겠나? 그것은 신의 행위에 의해 운반되는 물체일세 [...] 이러한 행위, 이러한 운동력은 결코 물체에 속하지 않네. 그것은 물체들을 창조하는 또는 상이한 장소에서 연속적으로 물체들을 보존하는 이의 의지의 작용력일세. [물질은] 능동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사실은 창조주의 지속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 그것들[물체들] 사이의 마주침은 기회 원인에 불과한 것으로, 이러한 원인은 물체들의 침투 불가능성 때문에 원동자(原動者) 또는 창조주가 자신의 행위를 분배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네.”(말브랑슈,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7장 12절)

 

또한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바늘이 나를 찌를 때 신은 영혼과 신체의 연합과 관련된 일반 법칙(신은 이러한 법칙에 일치하여 지속적으로 내 안에서 작용한다)의 결과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아르노의 철학적ㆍ신학적 고찰에 대한 반론])

 

  반면 말브랑슈에게서 신이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은 일반 법칙에서 벗어나서 행위한다는 것, 따라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그의 의지의 작용이 어떤 일반 법칙에 의해 어떤 결과를 산출하도록 전혀 규정되지 않는 경우에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한다.”([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첫 번째 해명") 가령 말브랑슈 자신이 든 사례를 보면, 신이 자연 법칙에 따라 나의 신체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가운데 나에게 찔린 듯한 통증을 불러일으킬 때, 신은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또는 신이 드넓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던 두 기슭 사이에서 갑자기 바다를 가로질러 길을 만들어냈을 때, 신은 일반 의지가 아니라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말브랑슈가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를 구분하고, 특수 의지를 기적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하는 것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불완전성과 악, 불의 등이 소멸 불가능하다는 것, 또는 지양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적인 용어법을 빌려 말하면,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의도(따라서 악의 지양 가능성)는, 신의 무한한 지혜에서 비롯된 신의 의지의 일반성과 그의 행위 방식의 단순성 때문에 결코 온전하게 실현되지 못하며, 항상 불완전성과 악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것을 뜻한다. 말브랑슈는 아르노의 비판에 대한 답변에서도 계속 이 점을 고수한다.

 

확실히 신은 그가 영혼과 신체의 일반 법칙들을 통해 살인자에게 부여한 힘을 살인자가 사악하게 사용하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 자신의 방식들의 단순성과 일양성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 따라서 신은 살인자의 팔을 움직이는데, 왜냐하면 신은 이러한 팔의 운동이 따르는 법칙들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이러한 범죄적인 행동을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영혼과 신체의 법칙들을 확립한 것은 이러한 행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지혜와 선함을 더 가치 있고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효과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허용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가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진실로 이 행동이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해도 그렇다. ([아르노의 철학적ㆍ신학적 고찰에 대한 반론])


 

V. 라이프니쯔와의 논쟁: 최선의 세계 대 행위 방식의 단순성

 

 

  아르노와 말브랑슈가 서로 명백히 대립하는 관점에 입각해서 논쟁을 벌였다면, 라이프니쯔와 말브랑슈 사이의 관계에는 뚜렷한 일치점들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인다. 라이프니쯔는 󰡔변신론󰡕에서 말브랑슈의 변신론의 주요 논점들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는 말브랑슈가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를 구별하고 “보편 법칙들의 실행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은 신의 특수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고 밝힌 점, 신의 행위로부터 “몇몇 무익한 [...] 사건들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신에게는 그 방식이 더 복합적이고 규칙적인 다른 방식보다 선호할 만한”(라이프니쯔, [변신론], 206항) 것일 수 있다는 점 등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감을 전제하면서도 그는 몇 가지 측면에서 말브랑슈와 자신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귀결된다. 첫째, 라이프니쯔는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에 관한 말브랑슈의 구별이 미흡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말브랑슈는 기적을 행하는 신의 의지는 특수 의지라고 규정한 반면, 라이프니쯔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신의 역시 어떤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 역시 일반 의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이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방식으로 사물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브랑슈 신부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멀리 간다. 신은 기적적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근거 없이 행위할 수 없는 바, 개별 사건들에 대한 신의 의지는 진리나 일반 의지의 귀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따라서 나는 신은 결코 말브랑슈가 이해하는 그대로의 특수 의지, 곧 원초적으로 특수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겠다.(라이프니쯔, [변신론], 206항)

 

라이프니쯔가 여기서 시사하고 있는 신의 기적적인 행위의 근거는 “자연의 질서보다 상위의 질서에 속한 이유들”(라이프니쯔, [변신론], 207항), 곧 우리 유한한 인간들로서는 알 수 없지만, 신의 무한한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명백한 어떤 근거들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쯔의 입장에서 보면 신이 기적적인 행위를 수행한다는 이유로 “신의 보편 법칙들을 위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은 더 적절한 다른 법칙을 통해서만 어떤 법칙을 위반하며, 질서가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 법칙에 속하는 질서의 규칙과 일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이프니쯔, [변신론], 207항)


  라이프니쯔는 또한 신이 행위하는 방식이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양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로 인해 신이 최선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의 방식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양적이다. 왜냐하면 신은 서로 가장 덜 제한하는 규칙들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길들은, 길들의 단순성과 관련해 볼 때 가장 풍요로운 것들이다. 이는 같은 예산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선의 집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단순성과 풍요성이라는 두 조건은 가능한 최대의 완전성을 산출한다는 한 가지 장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말브랑슈 신부의 체계는 이러한 점에서 나의 체계로 귀착된다.(라이프니쯔, [변신론], 208항)

 

라이프니쯔에게 신은 가능한 최대의 선함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러한 선함은 세계 그 자체가 지닌 본래적인 특징이다. 따라서 신에게 걸맞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는 그 자체로 최대의 완전성 또는 실재성을 포함하는 세계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쯔에게 신의 지혜는 선에 대한 지혜이며,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최선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신의 지혜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말브랑슈의 체계는 결국 그 자신의 변신론 체계로 귀결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말브랑슈의 어떤 구절을 보면 실제로 말브랑슈 스스로 라이프니쯔와 자신의 입장이 동일한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그의 지혜의 무한한 보고 가운데서 무한하게 가능한 세계를 발견하면서 [...] 이 세계를 창조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 이 세계는 이것을 생산하거나 보존하는 데 필요한 방식들의 단순성과 관련해 볼 때 가장 완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13절) 또한 그는 라이프니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선생께서는 [...] 신이 그의 지혜 속에서 발견한 모든 가능한 작업 계획 가운데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아주 잘 증명하셨습니다.” (라이프니쯔에게 보내는 1711년 12월 14일자 편지)


  하지만 말브랑슈가 “이 세계가 [...] 가장 완전한 것”이라거나 신이 “모든 가능한 작업 계획 가운데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라이프니쯔의 생각과는 꽤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라이프니쯔에게 보내는 같은 편지에서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신의 작품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작품이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이 실행되는 방식들과 비교해볼 때 그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그의 작품의 탁월함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단순성과 풍요성에 의해, 방식들의 지혜에 의해서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앞의 편지) 

 

이는 [변신론] 208항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쯔는 “단순성과 풍요성”이 “가능한 최대의 완전성을 산출한다는 한 가지 장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말브랑슈는 세계의 완전성은 “절대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이 실행되는 방식들과 비교해볼 때 그러한 것”이라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곧 라이프니쯔가 신의 완전성은 무엇보다 그가 창조한 세계의 완전성을 통해 표현된다고 보는 반면, 말브랑슈는 그것은 오직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 더 나아가 신이 행위하는 방식의 “단순성”에 대하여 상대적이라고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차이가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찰스 라모어(Charles Larmore)는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결과론”대 “의무론”의 차이로 표현한 바 있다(찰스 라모어, [근대성과 도덕]) 곧 라이프니쯔가 신이 창조해낸 결과의 최선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말브랑슈는 결과의 완전성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신의 자신의 필수적인 원칙을 준수하느냐 여부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도덕적 관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여러 저술을 감안하면, 두 사람 사이의 입장에 이처럼 확연한 대립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의 차이로 보는 것이 조금 더 적절할 것이다. 곧 라이프니쯔가 신의 도덕적 완전성과 전능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교리와 자연 세계의 불완전성 사이의 괴리에 대하여 이상적인 조화의 가능성을 주장했다면, 말브랑슈는 그러한 괴리가 지양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수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브랑슈에게 신은 오직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위할 뿐, 이 세계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무관심하다. 아르노 같은 교조적인 신학자들이 보기에 이는 신의 도덕적 완전성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처럼 보였지만, 말브랑슈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신의 자유와 완전성을 구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속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입장이 좀더 현실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VI. 맺음말

 

 

  어떤 측면에서 보면 17세기 후반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심신 문제도 실체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도 아니었고, 오히려 변신론 또는 창조된 세계의 명백한 불완전성과 불의에 직면하여 신의 방식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변신론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보면 말브랑슈의 저작은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
 

그것은 첫째,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라이프니쯔는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을 비판하면서, 말브랑슈의 신은 자연 중에 개입하면서 물체와 사유의 법칙을 중단시킨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말브랑슈의 신은 오히려 항상 자신이 제정한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위하며, 그의 기회원인론이 의미하는 것은 신은 그가 제정한 일반 법칙, 곧 자연 법칙에 따라 자연적인 사물 내에서 행위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진정한 원인으로 간주될수록, 자연적인 법칙은 더욱 철저하게 작동하고 일양적으로 준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회원인론과 종종 결부되곤 하는 인격적이고 자의적인 신에 관한 인상이 상당히 그릇된 것임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말브랑슈의 변신론은 악의 문제에 관하여 매우 현실주의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곧 그와 논쟁했던 다른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신의 완전성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불완전성과 악, 불의 등을 부정하거나 완화시키려고 또는 헤겔 식으로 말하면 지양하려고 했지만, 말브랑슈는 다름 아닌 신 자신의 속성에 의거하여, 그리고 그가 제정한 일반 법칙에 의거하여 이 세상의 불완전성과 악은 지양 불가능한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인 도덕철학이나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관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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