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나를 이길 자 누가 있으랴

나를 이길 자 누가 있으랴"

천지왕(2)
부도덕한 인간(人間)과 권위의 신(神) 싸움

천지가 생겨나고 인간들이 일어섰으나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생과 사도 제대로 구분이 안됐으며 짐승과 나무잎들도 말을 했고 귀신이 말을 하면 사람이 대답하고 사람이 불러도 귀신이 대답하던 시절이었다.
땅에는 천하거부로 잘 사는 「쉬멩이」라는 자가 있었다.
욕심많고 방자한 쉬멩이는 하늘을 향하여서도 『나를 이길 자 누가 있으랴』하고 큰소리를 치곤 했다.
쉬멩이는 아버지가 60세를 나는 해부터 하루에 한 끼밖에 대접하지 않았다.
『웬일로 하루에 한 끼밖에 주지 않느냐』
『사람은 한 대가 설흔인데 아버지는 금년으로 예슨 두해째를 사니 너무 많이 살았습니다. 죽어 삼년상에 제사 명절 안 지내도 좋으면 대접을 잘 하겠습니다』
그래서 쉬멩이 아버지는 죽은 후 대접을 안 받기로 하고 산 때 대접을 잘 받고 죽었다.
쉬멩이는 장래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아버지를 바다에 띄워 보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이었다.
명절을 맞은 저승의 귀신들은 제사를 받아먹기 위해 모두 이승으로 올라갔는데 쉬멩이 아버지만 혼자 어둠 속에 앉아 흐느껴 울었다.
『어데서 옥퉁소를 부는 소리가 들리느냐』 괴이하게 여긴 저승대왕이 물었더니 쉬멩이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래도 명절때는 그러는 법이 아니라고 타이르고 올려보냈으나 쉬멩이 아버지는 물한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를 전해 듣고 노한 천지왕은 쉬멩이를 잡아오라고 군졸들을 보냈다.
그러나 군졸들은 쉬멩이의 집을 지키는 개·말·소따위에 쫓겨 문전에도 못 가보고 돌아왔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천지왕은 쉬멩이를 처벌하기 위해 벽력같이 달려 내려왔다.
그러나 집어귀에 당도하자마자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달려들어 물려는 개들이 있는가 하면 말들은 발길질을 하고 소들은 뿔로 받으려 했다.
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천지왕은 올래밖 멀구슬나무 가지 위에 올라 앉아 군사들에게 열두가지 흉험을 내리도록 했다.
쉬멩이집 부엌에는 갑자기 개미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쉬멩이는 놀라지 않았다.
느진덕 정하님[여자 하인]이 『솥앞으로 개미가 기어 다닙니다』하고 말했다.
『거 뭐 대수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집이 폐가가 된 듯 습기가 차고 「용달」버섯이 무수히 생겨났다.
『솥뒤에 용달버섯이 났습니다』
『허허 반찬이 떨어져 가니 초기대신 용달이 나는구나. 반찬으로 볶아라』
쉬멩이 기세가 죽지를 않으니 천지왕은 솥이 걸어다니게 했다.
『큰 솥이 밖에 나가 엉기덩기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부잣집에서 매일 불을 때 놓으니 더위 먹어 식히러 나갔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니 천지왕은 가축들이 미쳐 날뛰게 했다.
『황소가 지붕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부잣집에서 잘 먹이니 힘이 넘치는 모양이구나』
아무리 흉험을 내려봐도 끄덕을 않으니 천지왕은 급기야 쉬멩이의 머리에 쇠철망을 내리 씌워 버렸다.
머리가 깨지도록 아픈 쉬멩이는 아들들에게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감히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종년을 불러 명령을 하니 종년은 차마 주인의 머리를 찍지는 못하고 옆에 있는 대문 지방을 덜커덕 내리찍었다.
도끼를 찍는 서슬에 놀란 천지왕은 엉겁결에 쇠철망을 거두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천지왕은 화덕진군(火德鎭君) 해명이를 불렀다.
해명이는 사람의 모양으로 변장하고 쉬멩이집으로 가서 『곡식과 옷을 준비하여 한 일년 밖에서 생활할 각오로 바람위로 피난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쉬멩이는 『대궐같은 집을 버리고 어데로 나간단 말이요』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칠대도록 쌓은 재산을 모두 거두어 가겠다. 불여막심한 죄를 단 한번에 깨닿게 하겠다』
해명이가 집지붕 네 귀퉁이에서 새 한줌씩을 빼어 천지왕에게로 가니 천지왕은 바람을 일으켜 집에 불을 질렀다.
궁궐같은 집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뒤늦게 후회를 한 쉬멩이는 박우왕의 집에 가서 빈 방을 빌려달라고 애걸을 했으나 박우왕은 『실화(失火)한 사람에게는 방을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한 쉬멩이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우리는 이제 다 살았구나』하고 통곡을 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천지왕이 나타나 『앞으로 부모 제사날이 오면 경건하게 지내시오. 가난한 사람에게 밭을 빌려주면 병작을 하시오. 죽은 곡식을 빌려주고 받을 때는 여문 곡식으로 받지 마시오. 금전을 타인에게 빌려주어도 이자를 너무 많이 받지 마시오. 노인을 존중하고 아들 칠형제를 잘 가르치시오. 일생을 타인게 부드럽게 대하고 마음씨를 곱게 먹으면 후손들도 안락하게 될 것이요. 나는 천지왕이니 잘 기억하시오』하고 말했다.
천지왕은 하늘로 올라가고 쉬멩이는 천지왕이 지시한 말을 잘 따르니 다시 부자가 되어 오래도록 살았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인간에 대한 신(神)들의 권위획득ㆍㆍㆍ 지상(地上)에 도덕률 세워

천지창조의 이야기는 세상에 아직 권위를 못 세운 신들과 비도덕적이고 욕심이 많은 인간과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신들은 자신의 권위를 획득하고 세상에 도덕률을 세우기 위해 패륜아 「쉬멩이(壽命長者)」를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쉬멩이의 죄는 채록본에 따라 세가지로 나타난다.
어떤 본에서는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본에서는 천지왕에게 식사를 대접할 쌀에 모래를 섞어 빌려줬다는 것.
또 다른 본에서는 『이 세상에 날 잡아갈 이 있느냐』고 할 정도의 호언으로 신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것이었다.
쉬멩이의 잘못은 신화의 구도상 신이 인간세계에 개입하기 위한 빌미를 주고 있으며 이를 징치한다는 구실로 신은 인간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은 지상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도덕률이 확립된다.
천지왕은 쉬멩이에게 신의 존제를 인식시키기 위해 열두가지 흉험을 준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부엌에 개미가 꼬인다」는 징조는 제주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나쁜 징조중 하나이다.
두번째의 용달버섯은 습기가 많이 차고 썩은 곳에 자라는 식물로 폐가가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징후에도 불구하고 쉬멩이가 각성을 하지 않자 천지왕은 쉬멩이집에 큰 솥이 걸어다니는 흉험까지 준다.
끝내 쉬멩이가 반성을 하지 않자 파멸시킬수 밖에 없어지는데 바람과 불을 이용하여 처벌한다.
채록본에 따라서는 천지왕이 벼락장군·우뢰장군을 불러서, 즉 벼락을 치고 불을 붙여서 처벌하고 쉬멩이의 가족들은 벌레가 돼 버린다는 얘기도 있다.
또 다른 본에서는 쉬멩이 하인의 기지로 쇠철망이 벗겨져 신이 결국 처벌을 하지 못하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을 연상케 하는 이 사건의 목적은 인간들이 신을 두려워하고 경배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아 여기서는 신의 처벌을 받은 다음 각성하여 순화된다는 내용의 「풍속무음」상의 줄거리를 따랐다.
마음이 착해진 쉬멩이는 그후 3천8백년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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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헌재의 권위는 누가 지켜주는가-다리미

1. 이번 헌법재판소의 인용(위헌)결정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있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유방임주의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적극적인 정부개입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초초초 극보수 성향의 미국 대법원이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정부개입은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헌법재판소가 없고, 대법원이 법률의 위헌심사권을 가집니다.) 이에 당하고 당한 행정부 쪽이 사법부에 대해서 초강경 대책을 준비하자, 화들짝 놀란 사법부가 그때부터 고개를 숙이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1937년인데, 그 이전의 꼴보수 사법적극주의 시절의 법원을 old court라고 부르고, 그 이후의 상대적 진보입장의 사법소극주의 법원을 new court라고 부릅니다.  (진보, 보수의 입장과 사법적극,소극주의는 크게 관련은 없습니다.  서로간에 상대적으로 결정될 문제입니다.)
 
이번 헌재의 인용결정도 대공황시기의 꼴보수 미국 대법원과 꼭 닮아 있습니다.  사법적극주의 중에서도 초초강경 사법적극주의로 기록에 남을 것입니다.  정부 추정 50조 관련예산 100조가 넘고, 시행기간만 20년이 넘을 것이라는 국가정책에 대해서, 국회 3분의 2이상의 동의를 얻어서 통과한.. 그 법률안에 대해서 헌재가 위헌판결을 내리다니...  그것도 관습헌법이라는 전혀 듣도보도 못한 헌법논리를 들고 나와서 말입니다.
 
사법적극주의가 옳으나, 사법소극주의가 옳으냐는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둘다 일장일단이 있고, 서로간에 적절히 보완해서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느쪽 입장을 지지하건 간에,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사법적극주의의 한계는 "권력분립"입니다.  사법부는 특히 입법작용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권력을 남용할 경우, 이는 사법부가 직접 법률을 제정하는 수준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성문법을 우선시하는 해석을 해야 합니다. 법조문만 들고파는 법조인들을 답답하게 여기지만, 함부로 법조문을 무시할 경우 이는 입법권을 침해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깐깐하고 보수적인 태도는 칭찬받을 점도 있습니다.
 
사법소극주의의 한계는 "국민의 기본권"입니다.  명백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률에 대해서 침묵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만 할때, 이는 사법소극주의의 한계일탈입니다.  이제 곧 역사적 산물이 될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면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이를 행사해온 법원은 이런 의미에서 또한 사법소극주의의 한계 일탈로 그 권력적 임무를 방기해 온 것입니다.
 
이번 헌재 판결은, 사법적극주의의 한계일탈 가운데에서도 가장 초극단적 방법으로 입법권을 침해하였습니다.  이번 헌재판결에서 위헌 이유로 제시한 것이 바로, "관습헌법의 존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법원이 법률제정권을 침해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헌법제정권까지 행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헌법재판소에 관습헌법권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습니까?  어느 누가 수도서울이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것이 관습헌법적 사항이라고 규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법률의 위헌판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 할 가치도 아까 제시한 두가지입니다.  바로 권력분립과 기본권 보장입니다.  헌법재판소는 권력분립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하면서 법률의 위헌성을 판단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헌재나 법원이 법률의 위헌판단권이 아닌 법률제정권까지 가지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함 때문입니다.  기본권 보장은 다른 편의 가치기준입니다.  아무리 입법권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명백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판단이 나올 경우, 이를 더이상 존중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그 두가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양쪽에서 한꺼번에 날려 버렸습니다.   입법권 정도가 아니라 헌법개정권력에 대한 무지막지한 침해를 통해서 스스로 관습헌법 제정권을 부여받고, 이로써 존재하지도 않는 국민투표권을 혼자 상정하여 실질적인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처사입니다.  아, 한번의 판결로 두가지 가치를 이렇게 철저히 박살내는 판결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주 오랫동안 역사에서 기록될 것입니다.
 
2. 헌법재판소의 정당성 확보.
 
헌법재판소의 정당성확보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첫째로 헌법재판소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구성은 9인의 재판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9인의 재판관 중 누구도 국민의 투표 등을 통한 직접적인 의사개입이 없습니다.  3인은 행정부(대통령), 3인은 국회, 3인은 대법원에서 지명을 하고, 형식적으로 9인 모두를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이처럼 그 임명방식이 투표를 통한 선거방식을 거치지 않은 경우, 민주적 정당성이 떨어진다고 표현을 합니다.  아무리 헌재의 권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음으로서 간접적으로만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대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선출방식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다른 국가기관(대통령, 국회)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법원이 그 권력적 기반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다른 권력기관의 자발적 동의와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특히 헌법재판소는 집행력이 없습니다. 법원의 경우.  판결문이 나오면, 이걸 가지고 사람을 감옥에 집어 넣을 수도 있고, 집달관을 시켜서 압류를 해버릴 수도 있고, 물건을 경매에 붙여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당장 어떤 법률을 위헌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부가 막무가내로 시행을 한다손 치더라도, 헌재는 이를 막을 실질적인 힘이 없습니다.  (헌재에 군대나 경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달관이 있는 것도 아니까요.) 
그러나, 이런 사태가 정말로 발생한다면 국가의 권력적 기반이 정당성을 몽땅 잃어버리는 사태가 될 것이므로 이는 최대한 자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행력이 없는 헌법재판소가 자기정당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하는 방법에 의해서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위헌판결이 난 법률안을 강행하는 행정부가 있다면 국민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민주주의적 공감대가 있을 때에만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오늘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바로 지난 10여년간 헌법재판소가 쌓아온 자기정당성을 자기손으로 박살내는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헌법재판소에 이러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까?  대통령 선거공약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 국민들이 이를 동의하여서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승인하였고,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하여서 또한 민의를 대변한 바로 이 사안에 대하여, 그 두가지 민주적 정당성을 한방에 깨어버릴 만한 힘이 헌재에 과연 있는 것입니까?   대통령 선거와 국회에서의 승인, 더 나아가 총선에서 다시한번 행정수도 이전을 내건 정당을 원내다수당으로 뽑아준, 이 국민적 의사를 이렇게 개무시할 수 있는 정당성이 헌재에 있는 것입니까?  이는 민주주의 위반입니다.  이제 헌재는 반민주주의적 집단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지난 10여년간 헌재가 스스로 쌓아온 그 민주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수었습니다.
 
이번 헌재결정문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일반국민들이 이를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관습헌법이라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이론을 끌고 들어와서 위헌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에 대해서 누가 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겠습니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는 재판부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헌재의 권위는 법전에다가, 헌재의 권위를 존중해 주세요~ 제발요~ 라고 적어 둔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헌재 스스로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항해 싸워 줄때, 국민들이 이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저부터도 헌재의 판결문에 대해서 싸늘한 냉소를 보낼 터입니다.  이렇게 식어버린 헌재에 대한 기대를 어떻게 회복하실 것입니까? 
 
사법부의 독립은 사법부 혼자 독립하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독립시켜 주는 것입니다.  정파적 이해에 복속되지 않고, 헌법과 법률과 자신의 직무적 양심에 기대어 소신있는 판결을 하고, 이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줄 때, 바로 그 때 주권자인 국민들이 사법부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 권위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판결처럼 그 스스로 헌법제정권자임을 선언하면서 거드름을 떨며, 정파적 이해에 휘말려 헌법을 무시하면서 반민주주의적 판결문을 써 내릴때!!  도대체 누가 어떻게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이렇게 당신들에게 냉소보낸다 할때, 당신은 나의 태도에 대해 또다시 위헌이다~ 하고 호들갑을 떠시겠습니까?  우리는 주권자이며, 헌법제정권자이며, 이나라의 주인입니다.  우리의 기본권을 위해 당신들이 존재하는 것.  우리의 권력을 위해 모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존재하는 것.  이것을 망각하는 국가기관에게 던져줄 동정의 권위는 없습니다.
 
오늘의 냉소는 내일의 분노가 될 것입니다.  주권자가 왜 주권자인가는 역사적 경험이 말하는 것 그대로가 될 것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요.  저 낡은 건물안에 쳐박혀 옹알거리는 헌법재판소 판관 나으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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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숨어계신 님, 이렇게 좋은 자료를 그렇게 살짝 저에게만 보이도록 숨겨놓으시면
제가 미안하죠.^^ 제가 공개적으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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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는 읽었어요~하하하(우쭐, 해도 되는 건가?)
혹시『시네 퐁주』(민음사, 1998)는 번역에 문제가 많나요?(문제가 많으면 좋겠다-_-) 제가 퐁주를 좋아해서 예전에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가 장렬히 전사한 적이 있어서...

에레혼 2004-10-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를 추모할 권리는 하나도 없지만...ㅠㅠ
그래도 데리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오래 전부터 그의 저명한 이름만 알고 정작 그를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과 추모의 마음을 가졌었지요

이 글, 찬찬이 읽고 님이 추천한 입문서부터 하나씩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제 방에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봐도 될까요?

balmas님, 첫인사를 이렇게 드리네요

2004-10-21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10-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퍼가기 미안해서....

3910033

어느새 1만이 넘으셨네요.


biosculp 2004-10-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인데요. 철학을 전공한분인 강유원님의 사이트에서 이런글을 쓰셨더군요.

언젠가 데리다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학생이 있었다.
초록 발표회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데리다를 학적 연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까. 요즘
프랑스에서 나온 것들은 일견 에쎄이 수준 아닌가."

"프랑스가 수필의 전통이 깊지 않습니까"

"하긴 빠스칼부터..."

"에쎄이"를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이들을 보면
꽤 오래 전의 이 대화가 떠오르곤 한다.

이 분은 헤겔로 학위하셨던데 독일과 프랑스의 학풍이 다른것인지. 독일철학자들을 전공하신분들은 요즘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사시눈을 뜨는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balmas 2004-10-2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biosculp님, 제가 그런 말에 대해 굳이 논평을 해야합니까?^^
'철학 동네'에 있다 보면 그 정도 이야기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데,
대개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하는 이야기들이니 거기에 정색 하고 나서서
뭐라고 대꾸한다는 게 그렇죠.
더욱이 제가 직접 듣거나 본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다가
강유원 씨는 이름은 여러번 들어봤지만 글은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가타부타 함부로 말하기가 무엇하군요.
말씀하는 걸 보니 강유원 씨는 헤겔로 박사논문을 쓰고
아마 프랑스 철학사까지 꿰뚫고 계신 분 같은데,
직접 가셔서 궁금한 점을 여쭤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balmas 2004-10-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주인에게만 말씀하신 분께는, 좋은 점을 지적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데리다에게 관한 제 (독자적인) 견해를 물으셨는데, 아직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 할 만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 데리다를 잘 알고 있는 처지도 아닌 데다가,
데리다는 일단 좀더 정확히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그나마 갖고 있는
약간의 견해도 아껴두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우선 읽을 만한 주요 저서들이 네댓 권은 되어야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입니다.
어쨌든 님 덕분에, 앞으로 데리다에 대한 제 견해를 세워봐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네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좀 많이 해주세요.

balmas 2004-10-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자명한 산책님과 라일락와인님, 가을산님께 답글다는 걸 잊어버렸군요.
자명한 산책님, 저도 [시네 퐁주] 번역본은 조금 읽어보다가 말았는데, 번역이 별로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더군요. 이 책 자체가 언어유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워낙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책입니다. 좀 위안이 되셨나요?^^
라일락와인님은 처음 뵙는군요.
퍼가신다면 저야 고마울 따름이죠, 뭐.^^
앞으로 종종 뵙기를 ...
가을산님, 글쎄 어느덧 조회수가 10000회를 넘어버렸네요. 1만회에서 이벤트를 하나 할까
했는데, 요즘 경황이 없다 보니, 좀 미뤄야 될 것 같네요.
어쨌든 캡처도 해주시고 고맙습니다.^^

2004-10-22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나나 2004-10-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글이었지만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balmas님께서 나중에 꼭 좋은 데리다 연구서를 하나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유원 선생님이라는 분의 이야기는 그분의 뛰어난 학식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더 황당하네요. 그분과 대화를 직접 나누어 보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balmas님의 데리다 해설은 초기 저작 부터 후기의 윤리 정치적 저작까지 다 포괄적으로 그 핵심을 설명해주고 있어 앞으로의 balmas님의 작업에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번역 글 부탁드립니다.

2004-10-22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어계신 분이 또 한 분 오셨군요.^^
[글쓰기와 차이](동문선)은 [불량배들]보다는 낫지만 같은 동문선에서 얼마 전에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보다는 못한 수준입니다. 답답하겠지만 원서나 영역본 같은 책을 놓고 같이 읽는다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목소리와 현상]은, 한 달여 전에 [단상들]에서 한번 말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에 유학중인 제 후배가 지금 번역하고 있습니다. 초판 번역은 다 끝나서 지금 교열을 보고 있는 중이니까 내년 중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읽기 쉽게 써놓은 책이지만, 논변이 좀 단순하고 느슨한 편이죠. 그러니 이런 책을 굳이 번역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야 우리도 충분히 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데리다에 관한 해설서를 번역한다면, 그 책보다 훨씬 좋은 책들이 더 많으니까 그런 것들을 번역해야죠. 제 생각에는 Geoffrey Bennington과 Derrida가 공저한 [Jacques Derrida]야말로,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데리다 해설서는 당분간은 지금 나온 몇 권의 책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데리다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먼저 번역되(고 개정되어)야 할 듯합니다.

나나나님은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가쉐 교수에게 배우고 계신다구요? 가쉐 교수에게는 모든 데리다 연구자들이 큰 빚을 지고 있죠. 언젠가 사진으로 봤더니, 백발의 수염이 덥수룩한 게 도인같은 풍모를 풍겨서 좀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가쉐 교수처럼 세련된 글을 쓰는 양반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이야 ...^^
격려의 말씀은, 앞으로 번역을 좀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알겠습니다. 아야!
ㅋㅋ

딸기 2004-10-2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허락도 없이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www.ttalgi21.com)에 퍼갔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데리다의 ㄷ의 한 획도 모르는 제가 '테러시대의 철학'을 서평이랍시고 써서 발마스님께 보인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자판을 두드리는 저의 손을 덜덜거리게 만드는군요.

balmas 2004-10-24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허락도 안받고 옮기시면 안되는데 ...

딸기 2004-10-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안 되는 거였나요?
그럼... 원고료를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엔화 결제도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 카드...
...크리스마스 때 카드 보내드릴께요...

허락없이 퍼가놓고 농담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퍼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얘기해주세요. 지울께요.

balmas 2004-10-2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 퍼가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렇지만, 굳이 원고료를 주시겠다면 사양하진 않습니다. ㅋㅋ
 

 


 

 
 
교수논평-로스쿨 도입, 어떻게 할 것인가

2004년 10월 19일   기자 

▲김세균 / 서울대 정치학과 •전국 민교협 상임대표 ©
지난 10월 5일 사법개혁위원회(이하 사개위)는 그간 사법개혁 차원에서 논의해온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 방안을 최종 확정•발표했다. 그 방안의 골자는 2006년까지 로스쿨로 전환할 법학대학을 선정하고 2008년부터 로스쿨을 설립하며, 매년 1천2백명 선에서 입학생을 뽑아 3년 교육과정을 거쳐 이들을 법률전문가로 양성해 배출한다는 것이다.

사개위의 로스쿨 도입 방안은 법조계의 이해를 졸속으로 봉합하고, 로스쿨 설립이 가능한 대학의 이해만을 반영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오늘날 한국의 고등교육체제와 학문체제가 지닌 문제점들을 새롭게 확대재생산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무엇보다 조건을 갖춘 10개 대학에게만 로스쿨 설치를 인정하는 것은 로스쿨을 유치한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간의 격차를 심화하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주로 수도권의 명문대학들이 로스쿨 설치 자격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경우 지방인재들의 수도권 집중이 심화되고 지방대학의 황폐화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사개위 안대로 로스쿨을 도입할 경우 로스쿨 등록금이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가난한 집안 자제들의 로스쿨 입학을 봉쇄하고 법조인으로서의 활동을 돈벌이를 위한 활동으로 전락시키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게다가 입학생 정원을 1천2백명으로 하는 것은 오늘날 법조인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을 최대한 유지시키려는 방안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로스쿨 도입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른바 ‘고시낭인’을 없애고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간에 상생구조를 창출함으로써 대학이 ‘고시학원’으로 변질하는 것을 막으며, 인문사회과학적 소양을 닦은 법조인을 양성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로스쿨은 거기서 더 나아가 공공성의 확보, 대학서열화의 타파, 지역간 균형발전에의 기여와 같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대학개혁의 다른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도입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로스쿨을 기존의 대학이 아니라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하고, 교육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수익부담원칙을 적용할지라도 로스쿨 학생이 국립대 대학원 학생이 부담하는 수준 이상을 부담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로스쿨 도입이 대학 서열화 해소와 지역간 균형발전에 기여하도록 전국의 대학을 권역별로 나누어 로스쿨을 ‘권역별 국•사립대 통합네트위크’ 소속으로 하고, 입학생 정원의 많은 부분을 해당 네트워크 소속 국•사립대 학생들에게 배정해야 한다. 아울러 학부성적을 로스쿨 입학에 가장 많이 반영하고, 로스쿨에서 배출하는 법조인의 수가 매년 2천명 이상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로스쿨이 법학자 양성이라는 일반대학원 기능도 아울러 맡도록 하고, 로스쿨의 설치와 더불어 전국의 모든 법대를 없애는 동시에 법학전공 교수 전체를 해당 권역의 로스쿨 교수로 이적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 학부과정에서의 법학 관련 기초과목은 이들 교수들이 출강해 강의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로스쿨 도입이 향후 행정대학원,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등을 도입하고 의학대학원을 재편하는 등 대학의 학문•교육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추동하는 진정한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난항을 겪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다시피, 한번 잘못된 법이나 제도를 일단 도입하고나면 그 피해는 실로 막중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로스쿨 도입이 일정에 오른 지금이야말로 그 도입이 올바른 대학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게 하기 위한 대학구성원 모두의 비상한 관심과 적극적인 개입이 요청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가 주관하는 로스쿨 도입방향에 대한 공청회가 오는 26일 개최될 예정이다. 이 공청회가 새로운 대안적 로스쿨 도입 방안을 확정하고 그 방안을 관철하기 위한 본격적인 운동 전개의 시발점이 되도록 많은 교수가 이 공청회에 참석해 적극 의견을 개진하고 뜻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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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6일 (토)
제 2676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논평> '현대판 골품제'의 반 쪽짜리 진실

 

'고교등급제'라는 '유령'이 대학을 배회하고 있다. 고교등급제를 실시한 한 대학의 경우, 강남권 학생은 지원자 87명 중 28명이 합격했지만 비강남권 학생은 53명의 지원자 중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사회가 비강남권 학생들에게 선사한 '절망'이라는 높은 벽이었고, 학생들은 '출신성분'을 원망하며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대변하듯, 소위 '명문대학' 진학을 통한 계층 상승은 모든 가난한 이들의 '꿈'이었다. 하기에 '논 팔고 소 팔아서 공부시킨다'는 말이 빈말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교등급제라는 '현대판 골품제'는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꿈'을 박탈하고 부의 가치만이 사회적 명예와 지위를 보장해준다는 천박한 가치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교육관련 사회단체가 "고교등급제는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서울 강남이 아니면 '명문대학'에 원서조차 쓸 수 없도록 하는 반인권의 극치"라며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고교등급제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단체의 그러한 주장은 반 쪽짜리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고교등급제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그나마 '명문대학'에 원서라도 쓸 수 있는 '우등생'이며, 우등생과 열등생 역시 부모가 가진 경제·문화적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공교육이 '포기한' 학생,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 등록금 문제로 대학의 꿈을 접어야 하는 학생 등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고교등급제 논쟁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그들에게 교육은 빈곤을 재생산하는 처참한 현실을 확인하는 '절망의 벽'일 뿐이다.

다시, 문제는 '교육의 공공성'이다. 누구나 원하는 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류가 개척한 진리의 지평을 확대하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것. 이는 '학교' 현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는 우리에게 소중한 영감을 주는 살아있는 역사다. 벤포스타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 공부를 하는 대가로 오히려 돈을 받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학교 밖에서 '삶을 배운다'.

세계인권선언 역시 '무상교육의 점진적 도입'으로 모든 사람이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 함을 인권의 원칙으로 밝히고 각국 정부가 세부실천계획을 실행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이제 정부와 국민이 결심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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