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님이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 번역이 좋은지 문의해와서 간단히 몇 가지 번역 예문을 검토하면서 답변을 남겼는데,

어제 자크 비데의 [서문]을 읽어보니까 [서문]은 본문보다  상대적으로 오역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자크 비데의 [서문]은

그가 {근대성 이론Theorie de la modernite}(1990)이나 {일반 이론Theorie generale}(1999) 등에서 제시한 그의 이론

체계의 관점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요점을 잘 드러내주는 좋은 글이다.

그런데 막상 책을 산 독자들이 오역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아서 오역 몇 가지를 고쳐봤다. 독자들이 읽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 밖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있으면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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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비데, [서문을 대신하여: 알튀세르 다시 읽기] 번역 검토


9쪽 

“또한 그런 측면은 한편으로 역사에 대한 이런 특이한 비전과, 다른 한편으로 그가 구조의 지성을 위해 자본주의의 사회적 존재에 대해 제안하는 개념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 수정 번역

“이는 또한 역사에 대한 이처럼 특수한 관점과, 자본주의의 구조 및 사회적 존재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가 제안하는 개념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10쪽 9번째 줄 “장소틀topique” → "장소론"

     12번째 줄 “단순하게 이론” → “이론 그 자체”

10쪽 13번째 줄

“겸손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그가 ‘몇몇 제한된 쟁점들’(p. 38)에 대해서 기여하는 것은 ‘여전히 참신한 상세한 설명’뿐이다― ...”

 

→ 수정 번역

 

“겸손한 겉모습을 띠고 있지만―그는 ‘몇 가지 제한된 쟁점들’(p. 38)에 대해 ‘제법 새로운 엄밀한 해명’을 제시할 뿐이라고 말한다― ...”

 

10쪽 아래에서 7번째 줄

“제 1장이 도입하는 주장이 다루는 것은 사회적 갈등과 과학적 작업을 전제하는 형태로서의 철학이고, 새로운 것이 “결정적인 정치-경제적ㆍ과학적 사건들의 결합”(p. 50) 속에서 떠오르는 상황들의 계열로서의 철학사이다.”

 

→ 수정 번역


“제 1장은 사회적 갈등과 과학적 작업을 전제하는 형식으로서 철학이라는 그의 테제, 새로운 어떤 것이 “결정적인 정치ㆍ경제적 사건들과 과학적 사건들”(p. 50)의 결합conjonction에 따라 생성되는 정세들conjonctures의 연속으로서 철학사라는 그의 테제를 도입한다.”

 

11쪽 아래에서 11번째 줄

“변모” → “변혁transformation”

아래에서 10번째 줄

“왜냐하면 그것은―결국은 불변하는 것을 종식시키는―변화가 생산되는 불변적인 조건들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 수정 번역

“왜냐하면 그것[구조의 재생산에 관한 이론]은 변이가 생산되는 불변적인 조건들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이러한 변이는 결국 불변적인 것을 종식시키기 때문이다.”

 

12쪽 아래에서 12번째 줄

“사실 권력은―알튀세르가 뒤에 가서 쓰고 있는 것처럼―”

→ 수정 번역

“사실 권력은―알튀세르가 나중에[1978년에] 쓰고 있는 것처럼―”

 

15쪽 첫 번째 줄 “고위 권력” → “계급 권력”

      8번째 줄 “기여하지 못했다” → “기여했다”

 

15쪽 마지막 줄~6쪽 첫 번째 줄

공적 제도들은 ‘계급 투쟁’의 기관들이고, 계급 투쟁에서 둘 가운데 하나가 인정되며, 계급 투쟁은 이러한 지배의 재생산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 수정 번역

“공적 제도들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계급 투쟁’의 기관들이며 ...”

 

16쪽 마지막 줄

“그 방식을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 속에 구조적으로 포함시킨다.”

→ 수정 번역

“이데올로기를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국가 속에 구조적으로 포함시킨다.”

 

17쪽 11-12번째 줄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주체들을 ‘구성해 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 수정 번역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18쪽 위에서 두 번째 줄

“각자를 ‘자유 평등’한 것으로 정위하는 인권 선언은 주체는 최고(souverain)이고 최고 존재(le souverain)는 주체이며, 나 자신을 최고인 나 자신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 수정 번역

“각자를 ‘자유 평등한’ 사람으로 정립하는 인권 선언은 신민/주체는 주권적이고 주권자는 신민/주체라고 선언하고(déclare le sujet souverain et le souverain sujet), 또 나 자신은 주권자로서 나 자신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자크 비데가 강조하려는 것은 인권 선언이 철학적, 정치적으로 함축하는 전복적인 의의다. 이를 위해 그는 “sujet”라는 단어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와 함께 “souverain”이라는 개념이 내용상으로 전도되는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발리바르가 일련의 연구에서 강조하듯이 sujet라는 말은 원래 정치학에서는 “신민”(臣民), 곧 지고한 권력을 가진 주권자(왕)에게 예속된 백성을 가리켰다. 그런데 인권 선언과 동시대의 철학자들(루소, 칸트 ...)에 의해 sujet는 예속된 백성이 아니라 자율적인 존재자, 곧 주권적인 존재자를 갖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되었다. 따라서 비데의 윗 문장에서 “신민/주체는 주권적이고”이라는 표현은 그 이전까지 서로 확연히 대립하는 존재자들로 간주된 신민 sujet가 주권자가 동일시되는 전복적인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곧 이제 sujet는 더 이상 주권자에게 복종하는 백성이 아니라 그 자신이 주권적인 존재자, 곧 주체가 됐다는 것이다.

 

다른 한 편 “주권자는 신민/주체라고”라는 표현은 이러한 전복의 또 다른 측면을 표현한다. 곧 이제 주권자는 더 이상 이전처럼 신이나 왕 같은 초월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바로 sujet 자신, 백성들 자신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 주권자가 된 것이고, 이 때문에 sujet는 이제 더 이상 신민이 아니라 주체인 것이다.

밑줄 친 부분은 이처럼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번역되어야 하는데, 김웅권 씨의 번역은 이런 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18쪽 9번째 줄 이하

“규약” →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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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우님, 지난 번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 번역이 좋은지 질문했던 적이 있죠?

원래는 서점에서 읽어볼까 했는데, 마침 가까운 서점이 이전 공사 중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문해서 오늘 책을 받아서 조금 읽어봤습니다.

읽어봤더니 역시 예상대로 번역이 아주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더군요. 김웅권 씨의 번역이 대개 그렇습니다. 자기가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책들을 주로 번역하고, 그것도 너무 많은 책을 번역하다 보니까, 사실 수준 높은 좋은 번역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겠죠.

 

{재생산에 대하여} 번역의 사례를 몇 가지 본다면, 이 책의 번역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저곳 몇 군데를 읽어봤는데, 대동소이한 수준에 비슷한 문제점들이 나타납니다.

우선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볼까요? 41쪽 첫 문장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철학이 무엇인지 자연발생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연발생적으로”는 “spontanément”의 번역인데, 이 단어라면 “자생적으로”라고 옮기는 게 좋겠죠. “자연발생적으로”와 “자생적으로”는 뉘앙스의 차이가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야 그리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죠.

그 다음 43쪽까지는 별로 문제가 없는 번역입니다. 그런데 43쪽에서 좀 문제가 나타납니다. 우선 두 번째 문단에 괄호 안에 든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린다”거나 죽음이 갑자기 닥칠 때,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것은 배우는 일이다”―플라톤―에서 보듯이 말이다)” 이 문장은 정확히 보면 비문이고 원문의 내용도 약간 부정확하게 옮기고 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on attend que ça se tasse” ou que la mort survienne : “philosopher c'est apprendre à mourir”―Platon―)”

제가 옮긴다면 이렇게 옮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린다.” 또는 죽음이 닥치기를 기다린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말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세 번째 문단 번역에서도 문제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동일화는 비판적인 가치를 지니는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본의와는 달리 그런 것처럼, 사실상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문장의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Il n'est pas possible de dire que cette identité contienne, en fait, et comme malgré elle, une idée de la philosophie qui possède une valeur critique.”

제가 볼 때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하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철학=체념이라는] 이러한 동일성이, 사실상 그리고 그 자신에 거슬러, 비판적인 가치를 지닌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 문장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철학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에서 엿볼 수 있는 철학 = 체념이라는 표상이, 비판적인 가치를 지닌 철학관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 = 체념이라는 관념과, 비판적인 철학관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44쪽에도 잘못된 번역이 나옵니다.

“현재로선 중요한 것은 민중의 표현에서 문제되고 있는 상식의 철학과 본래 의미의 대문자 철학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후자의 철학은 (플라톤 ...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 등과 마르크스, 레닌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구상된’ 철학이다. 그것은 대중에 보급될 수도 있고 보급되지 않을(a)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보급될(b) 수 있다.”

이 밑줄친 문장을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장의 불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qui peut ou non se diffuser(A), ou plutôt être diffusée(B) dans les masses populaires.”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후자의 철학은 (...) 철학자들이 ‘가다듬은’ 철학으로, 인민 대중 속에 확산되거나 확산되지 않을(a') 수 있다. 또는 오히려 [지식인에 의해] 보급될(b') 수 있다.”

(a), (b)와 (a'), (b')의 차이는 김웅권 씨는 원문의 “se diffuser”(A)와 “être difusée”(B)를 똑같이 “보급될”로 번역한 것에 비해, 제 번역은 (A)는 “확산되다”로 번역했고 (B)는 “[지식인에 의해] 보급되다”로 번역한 것에 있죠. 

불어에서는 수동 표현을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동사 앞에 “se”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être 동사(영어의 be 동사에 해당) + 과거분사를 쓰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A)에서는 se +diffuser라는 형태로 (B)에서는 être 동사 +과거분사라는 형태로 수동 표현이 두 번 쓰이고 있죠. 따라서 이 두 가지 수동 표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하는 게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될 텐데, 김웅권 씨는 그냥 (A)와 (B)를 똑같이 “보급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장 자체나 맥락만을 봐서는 (A)와 (B)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파악해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다만 추측해본다면, 양자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알튀세르가 (A)에서 “se diffuser”라고 말할 때, 이 때의 “diffuser”는 “누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널리 퍼뜨린다, 보급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생적으로, 자연히 퍼져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A)는 “철학자가 가다듬은 철학이 인민 대중 속에 자생적으로, 자연히 확산되거나 확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죠. 곧 이미 대중의 자생적인 표상 속에서 철학자들이 가다듬은 철학의 맹아 같은 게 담겨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바로 뒤에서 “또는 오히려”라는 말을 덧붙인 뒤에 이번에는 (B), 곧 “être difusée”라는 표현으로 (A)를 대체하죠. 이것이 무얼 뜻할까요? 제가 보기에 이는 (A)와 달리 철학자가 가다듬은 철학은 대중들의 생각 속에 자생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입을 통해, 보급을 통해서 비로소 퍼지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A)보다는 (B)가 사태에 더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는 오히려”라는 접속사를 덧붙인 다음에 (A) 대신 (B)라는 표현을 대체한 것이죠.

제가 보기에 이는 이 문장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을 듯합니다.

김웅권 씨의 번역을 먼저 보기로 하죠.

“오늘날 우리가 폭넓은 대중의 민중적 표상에서 철학적 요소들을 만날 때 이러한 보급 속에서 그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 운동의 결합을 통해 대중에 ‘주입된’(레닌ㆍ마오쩌둥) 본래 의미의 대문자 철학적 요소들에 대한 민중의 자연발생적 의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Quand on rencontre aujourd'hui des éléments philosophiques dans la représentation populaire des larges masses, il faut en tenir compte dans cette diffusion, faute de quoi on peut prendre pour la conscience populaire spontanée des éléments philosophiques au sens fort qui ont été "inculqués"(Lénine, Mao) aux masses par l'union de la théorie marxste et du Mouvement ouvrier.

김웅권 씨의 번역은 별로 나쁜 번역은 아닌데, 다만 약간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밑줄 친 부분을 이렇게 바꿔보면 알튀세르의 논점이 좀더 분명히 드러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 운동의 결합을 통해 대중들에 ‘주입된’(레닌ㆍ마오) 강한 의미의 대문자 철학적 요소들을 민중의 자연발생적 의식으로 오해할 수 있다.”

또 이런 식으로 번역해야 (A)와 (B)의 차이도 좀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김웅권 씨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읽을 만한 번역이긴 하지만, 좀 미묘한 논의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이처럼 오역을 범하거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뒤로 가서 125쪽 [국가와 국가장치] 부분을 좀 볼까요? 사소하긴 한데, 첫줄에 약간의 오역이 있네요.

“즉 국가는 {공산당 선언}과 {브뤼메르 18일}에서부터 (그리고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그 이후의 모든 고전 텍스트들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억압 장치로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괄호 속의 내용은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고전 텍스트, 무엇보다도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들 및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로 번역해야죠.

126쪽에서는 1절 제목 번역에 약간 문제가 있네요.

“1. 묘사적 이론에서 단순하게 이론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제목의 원문은 “1. De la théorie descriptive à la théorie tout court”입니다. 여기서 “tout court”라는 표현은 “단순하게”라는 뜻보다는 “자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이 말하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묘사적(또는 기술적) 이론에서 국가에 대한 과학적 이론으로>라는 뜻입니다. “la théorie tout court”는 과학적 이론으로서 이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죠. 

또 중간쯤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건축물의 은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들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들이거나 묘사적 표상들이라고 말할 때, ...”

여기서 밑줄친 부분의 원문은 “des conceptions, ou représentations descriptives de leur objet ...”입니다. 따라서 이는 “자신들의 대상에 대한 묘사적 관념이나 표상들”로 고치는 게 옳겠죠.


결론을 내리면, 김웅권 씨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읽을 만한 번역입니다. 단 읽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나올 텐데, 그건 오역일 가능성이 높지요. 읽다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은

 

따로 질문하시면, 제가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는 답변해드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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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가 국내에 나왔드라
    from 호빗의 새로운 집 2007-12-28 15:54 
    모르고 있었다가 어떻게 저렇게 알게되서 책을 사려고 했는데, 번역에 대한 평이 그닥 좋지 않아서 한동안 고민했었다. 그래도 평소에 종종 가던 진태원씨 서재에 문의해 진태원씨를 괴롭히(?)는 과정을 거쳐 재생산에 대하여의 번역 상태에 대하여 문의할 수 있었다. 아아. 사야할 책이 또 늘어났구나;;
 
 
류우 2007-12-2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불어를 읽지 못하니, 어떻게 책을 구입해서 읽다가 막힐때마다 발마스님께 도움을 부탁드려야 하겠군요^^;
전반적으로 읽을만 하다고는 하니, 그나마 오역과 비문투성이인 글들 보다는 읽을 수(!) 있겠네요 @_@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

류우 2007-12-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기 위에 트랙백이 저렇게 되는 것이었군요;;
제 블로그에 한번 트랙백이 뭔지 몰라서 실험을 하다가 지웠는데 어떻게 지워야 하는지 몰라서;;
(블로그 초보의 한계군요ㅠ_ㅠ)

게시판을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네요ㅠㅠ죄송(_ _);;;

balmas 2007-12-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읽다가 어려운 곳이나 잘 이해가 안되는 곳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

ㅎㅎㅎ 괜찮습니다. 트랙백 하나 있으니 더 보기가 좋은데요.
 
 전출처 : findingyeji님의 "cherishyeji님이 작성하신 방명록입니다."

반갑습니다. cherishyeji님. 간단하게 몇 개만 소개시켜 드릴게요. 혹시 좀더 자세한 소개가 필요하거나 구체적인 조언이 필요하시면 더 말씀해주세요. 우선 구조주의의 전반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데는 [구조주의 혁명]이라는 책이 괜찮습니다. 국내의 학자들이 쓴 책인데, 기호학과 인류학,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해서 구조주의를 소개하고 있으니까 도움이 될 듯합니다. 첨언하자면, 가끔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라는 책을 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책은 별로 좋은 책이 아닙니다. 특히 구조주의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문장이 너무 난삽하고 비문에 가까운 것들이 많은 데다가 인용문의 오역도 많아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라는 책도 마찬가지로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구조주의 이래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보고 싶으시면, 프랑수아 도스가 쓴 [구조주의의 역사 1-4]가 참조할 만합니다. 이 책은 전형적인 저널리즘 저작(다시 말해 사상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의 역사)이고 번역이 썩 만족스러운 편이 아니라는 한계는 있지만, 약 40여년에 걸친 구조주의의 전개과정을 개괄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후기 구조주의의 주요 철학자들, 곧 라캉,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에 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웅진출판에서 나온 How to Read 시리즈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시리즈의 원서는 각 분야의 실력있는 필자들을 모아서 만든 좋은 책들인데, 저는 국역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번역이 잘 돼 있는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서평들을 보면 읽을 만한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나온 데리다나 라캉,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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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9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7-12-30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ㅎㅎㅎ 그렇군요. {How to Read Lacan} 역자 후기에 그런 내용이 있었군요. 그런데 저는 이 책 번역본을 아직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그 책을 보완할 만한 책이라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책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아마 같은 역자가 번역한 것 같은데 ...

2007-12-30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7-12-3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과 관련된 책을 원하신다면, 오질비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라캉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은 아니지만, 지젝이나 이런 사람들이 라캉을 보는 것과는 좀 다른 관점에서 라캉을 소개하는 책이죠. 분량은 적지만, 라캉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가 쓴 글이기는 하지만, {라깡과 알뛰쎄르}라는 글도 한 번 읽어보세요. {라깡의 재탄생}이라는 책에 수록된 글인데, 분량이 좀 많은 편이지만, 얼마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전출처 : 바람구두님의 "'완고한 자주파'와 단절하면 진보는 저절로 재구성되는가?"

바람구두님이 좋은 논평을 달아주셨는데, 이 논평에 대한 답은 사실 이광일 교수가 직접 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 그렇지만 글을 퍼온 사람으로서 몇 마디 촌평을 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선 라인홀트 니버가 스피노자를 대놓고 표절하는 게 인상적이네요.(ㅋㅋ "표절"이라는 건 농반진반의 얘기인데, 그가 스피노자의 주장을 거의 문자 그대로 옮겨오고 있어서 한 마디 해봤습니다.) 바람구두님 이야기는, (1) 이광일 교수의 대선평이 니버식의 의미에서 중산층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지 않느냐, 그 이유는 (2) 그가 자주파와 단절을 통해 민주노동당이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평등파 또는 PD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3) 또 이 후자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현실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자주파와의 "청산"이 "내부의 권력 투쟁이나 스스로의 반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주장을 통해 쉽사리 진행될리도 없고, 그 과정에는 엄청난 자기부정과 반성이 필요한데 그것이 과연 쉽겠느냐는" 의문 때문인 듯합니다. (4) 더 나아가 "평등파의 노선이 과연 자주파에 비해 더 유연하고, 우위를 차지할 만한 것인가란 의문"도 피력하시는군요. 그런데 우선 이 교수가 "평등파"의 입장을 대변하는지(2)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듯합니다. 물론 자주파와의 단절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그게 그거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읽기로 이 교수의 논점은 민노당 내 자주파가 그동안 범했던 과오나 이번 대선에서의 문제점들을 고려해볼 때, 또 결국 대선에서 참패를 했음에도 그들이 어떤 책임이나 쇄신의 자세를 보여줄지 지극히 의문스럽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민노당이 쇄신되기 위해서는 자주파와의 단절이 어떤 식으로든 모색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데 있는 듯합니다. 이건 당내 투쟁에서 어떤 정파를 지지한다는 것과는 좀 다른 입장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 교수가 (3)의 어려움을 모르겠느냐 하는 것도 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교수의 글은 대선 논평으로는 다른 글들에 비해 좀더 균형감이 있고 여러 측면을 적절히 잘 고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제도 정당 바깥의 운동의 문제를 별개로 고려하고 있는 점도 얼마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물론 이 점이 이 글의 주요 논점은 아니긴 합니다만). 따라서 이 교수의 글은 당내의 어떤 특정한 정파를 두둔하거나 하는 것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냐고 추측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봅니다(4). 설사 어떤 정파의 관점을 지지한다고 해도, 이 글 자체는 정세 분석을 위한 토론 자료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바람구두님의 논평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결국 자주파와 어떻게든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냐'(5)고 말이죠. 물론 바람구두님의 생각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겠죠. "자주파만의 단절이 아니라 그간의 운동 관성, 진보의 관성과도 결별하는 완전히 새로운 구성은 불가능한 것이냐는 것"(6)이 바람구두님의 논평의 요체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교수가 지적한 것과 바람구두님의 결론(6)을 대비시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건 니버가 지적한 편향과는 또 다른 편향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대선에서 진보의 참패라는 구체적인 결과에 대한 분석과 그 구체적인 대안에 관해 지적하는 글에 대해 (6)을 또 다른 대안으로 내놓는다면, 그건 결국 (5)같은 불만이나 비판을 초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물론 바람구두님의 의도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바람구두님의 글이 그렇게 읽힐 소지가 여지가 있을 듯합니다. 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바람구두님과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에 이 논평에 공감을 하면서도, 운동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 이런 류의 답답한 고민의 토로가 먹물들의 공리공론으로 비칠까 두렵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문제는 진보적인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제도 정당 내부와 바깥에서 이번 대선의 효과와 교훈을 토론하고 좀더 건설적인 대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될 텐데요, 그러기 위해서 니버의 말은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이 교수의 글이 니버가 말한 중산층의 편견을 노출하고 있다고 보는 건 좀 과도한 평가인 듯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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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maud 2007-12-27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어지러워요. 하튼 NL이 제대로 된 진보 진영을 펼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건 맞는 이야기죠?

grimaud 2007-12-2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조선일보가 조승수 소장과의 인터뷰를 "민주노동당, 친북 세력과 결별해야"라는 기사로 뽑았네요.

balmas 2007-12-28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에 인터뷰가 났군요. 저녁에 MBC 뉴스에서도 기사가 나오던데 ... -_-;;;;;;;;;
 
 전출처 : 바람구두님의 "손문상 화백 - 성탄과 태안"

아, 적절하게 문제제기를 잘 하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 문제는 공론화해서 좀더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바람구두님이 좋은 타이밍에 좋은 기획을 하신 듯합니다. 다음호를 한 번 유심히 읽어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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