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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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팔레스타인 최연소 수감자의 석방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이 낳은 비극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 2008년01월25일 17시13분

이건 소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으로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저 한 사례일 뿐이다. '국제 중동 미디어 센터(IMEMC)'에 실린 팔레스타인 최연소 수감자, 3살 아이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2일 세 살 배기 아기, 최연소 수감자가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아이샤는 아직 하늘색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한 번도 하늘을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이샤에게 감옥이 곧 세상 전체였고, 세상이 곧 감옥이었다.





▲  아이샤와 아이의 엄마 올이안 [출처: http://www.imemc.org]
아이샤의 유일한 죄는 “정치범”인 엄마를 두었다는 것. 아이샤를 낳은 이태프 올이안은 “적대 정당 당원”이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22일 아이샤가 감옥 문을 나설 수 있게 되었지만, 이 건 또 하나의 ‘날벼락’이다. 이제 감옥에 갇혀 있는 엄마를 떠나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완전히 낯선 가족들과 다시 ‘친해지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이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70세의 할머니 움 웰리드. 아이샤의 아빠도 이틀 전 이스라엘 군에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감옥 앞에서 아이샤를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는 “만약 (이스라엘 군인이) 아들을 체포를 며칠만 더 늦게 했더라도 딸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안아보지도 못했어. 한 번 가까이 해보지도 못했어”라며 근심어린 얼굴이다.


그녀는 아이를 넘겨받아 가족에게 전해주도록 지정된 올이안의 변호사의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감옥의 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왔다. “오 아가, 내 손녀. 나에게 오렴.” 그리고 그녀는 세 살 배기 손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할머니가 아이샤에게는 낯설기만하다. 그리고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샤의 변호사는 이스라엘 법에 따라 아이가 세 살이 되면 석방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아이샤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다섯 명의 아이들이 감옥에서 태어났다. 이 중 세 명은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즉시 풀려났으며,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라말라의 집에서 아이샤는 엄마를 찾느라 난리다. 할머니가 할 수 일이라고는 그저 아이를 진정시키는 일 뿐이다.


“난 너무 늙었고 당뇨도 있어. 내가 애를 돌봐야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풀려났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소망이다. “혼자서는 애를 돌볼 수도 없어.”


아이샤가 집에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웨딩사진을 발견한다. 물론 아이샤는 아빠를 알아보지 못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며 아이샤는 말한다. “엄마, 엄마, 엄마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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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와노동
2008.01.25 |378호


 



2008년 노동자운동의 과제



노동자 운동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내부의 우경화 경향을 방어하는 한편 노동조합 내외를 가로지르는 역동적인 운동의 구심을 형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2007년 이랜드-뉴코아 투쟁이 지역연대 속에서 역동적으로 투쟁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민주노총의 상황이 단시간 내에 변화되기 어렵다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운동의 흐름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노동조합 내부를 변화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2008년 예상되는 주요한 투쟁 과제들,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 투쟁, 교육 시장화 저지 투쟁, 비정규직 투쟁을 위한 지역 연대운동 네트워크, 변혁적 노동자 운동 활동가들의 지역 네트워크를 노동조합, 정파를 초월하여 꾸려야 한다.(서울의 소통/연대/변혁 노동운동포럼은 이러한 좋은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전략적 논! 의들이 정체되어 있는 만큼 구체적 투쟁 계기 속에서 여러 혁신의 방향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혁신 논의가 관념적인 혁명적 수사가 아니기 위해서도 대중 투쟁 속에서 검증되고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지난 10년간 연대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 과정과 동반되어야 한다. 통칭 범개혁진영이라 불리는 NGO들과 소수 명망가들에 의한 연대운동에 대한 실천적 단절이 필요하다. 이러한 운동 경향과 명확하게 단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이번 대선에서 민중운동 진영이 개혁세력과 동반 몰락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한국진보연대, NGO 등 상층 중심의 범대위가 운동 진영의 주도권을 잡기 전에 변혁적 노동자 운동 활동가들이 먼저 인권활동가, 환경활동가, 정치단체 활동가들과 공공부문 사유화, 교육시장화, 대운하, 비정규직에 대한 논의틀을 꾸리고 지역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내야 한다.





겨울 사회운동 세미나에 초대합니다


[성명] 이명박 당선자는 농촌진흥청 폐지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







2008 세계사회포럼-1.26 세계행동의 날

오는 1월 23일~28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지배 엘리트들은 “낡은” 방식으로...


이주노동자탄압 중단! 출입국관리법 개악 반대!

이주탄압비대위 농성이 민주노총 1층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탄압과 출입국...





 1.26 세계 행동의 날 조직위원회 토론회-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과 국제연대운동의 전망

 [노동운동포럼 여는토론] 대선이후 정세전망과 노동자운동의 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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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도서출판 길에서 번역되어 나올 {Marx & sons}라는 데리다 책의 일부를 올려봅니다. 이 책은 원래 지난 1999년

미국에서 출간된 Ghostly Demarcations, ed. Michael Sprinker, Verso에 수록된 글의 불어 원본입니다. 이 후자의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나온 뒤 영미권의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피에르 마슈레, 안토니오 네그리, 베르너 하마허 등과

같은 다른 나라의 이론가들이 {유령들}에 대해 쓴 글들을 묶은 책이며, 마지막에는 데리다가 이 글들에 대해

장문의 답변을 싣고 있죠. {Marx & sons}는 데리다의 답변의 불어 원본인 셈입니다. 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책에는

데리다의 답변 외에도 마슈레와 네그리, 아마드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올리는 이 글은 데리다의 답변 중에서 특히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문구를 해명하고 있는

부분이죠.(원서로는 pp. 70-82)  여기서 데리다는 이 문구와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또 종교의 문제에 대해, 이데올로기에 대해 상세히 해명하고 있죠.

 

특히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관심 있게 한번 읽어보시고

번역에 별 문제는 없는지 검토 좀 해주십사 하는 뜻에서 한 번 올려봅니다.

이 번역문은 당연히 아직 교열과 교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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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토피아적인 메시아성에 대한 이러한 사상 또한 벤야민의 전통에 진실로,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며, 제임슨과 하마허가 벤야민의 전통을 환기시킨 것은 분명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나의 화두propos를 이 전통으로 귀착시키거나 환원시키는 것은 아마도 약간 성급한 처사일 것이다(나 자신 역시 주에서 이러한 벤야민의 전통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주에서 공명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차이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공명하는 것 [...]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 왜냐하면 나는, 제임슨과 하마허가 생각하는 것처럼, 벤야민의 모티프와 내가 시도하려는 것 사이의 연속성이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해명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특히 충분하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재인지하고 동일화하려고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 벤야민의 화두가 다른 것과 동일화될 수 있을 만큼 그 자체로 충분히 명료하고 동일화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벤야민과 관련하여 존재할 수도 있는 이러한 간격을 내가 언급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어떤 독창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비적인 방식으로나마 적어도 몇 가지 점들을 정확히 해두기 위해서다.  

  1. 내가 보기에 유대 메시아주의에 대한 준거는 내가 준거로 삼은 벤야민의 텍스트에서 구성적인 것 같다. 그리고 명백히 삭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귀속은 그릇된 것일 수도 있으며, 나는 이 점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메시아적인 힘”에 대한 벤야민의 암시를 모든 유대주의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는, 또는 현재 통용되는 대중적인 의견만이 아니라 때로는 심지어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교리들에서도 군림하고 있는 현재 통용되는 일체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모습이나 표상들로부터 어떤 유대적인 전통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거대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것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 관해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메시아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활용은 결코 이러저러한 메시아주의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정확히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짧은 문구의 문자 그 자체를 강조해도 된다면, 내가 다음과 같이 쓴 것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테제는 메시아주의,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약한 메시아적인 힘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강조는 벤야민)이라고 부른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삽입구는 물론 나의 표현이지 벤야민의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격이나 번역 또는 등가어구가 아니라, 내가 표시해두고 싶은 지향 및 단절이다. 약화에서 무화(無化)로, “약한”에서 “없는”으로 나아가는 경향, 따라서 벤야민의 관념과 내가 제안하고 싶은 관념 사이에 존재 가능한 접근의 점근선, 단지 점근선이 문제인 것이다. “약한”과 “없는” 사이에는 어떤 도약, 아마도 무한한 도약이 존재할 것이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약화된 메시아주의, 감소된 힘을 지닌 메시아적인 기대가 아니다. 이는 내가 종교적인 전통에 준거하기보다는 어떤 가능성들에 준거하여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또 다른 구조, 실존의 구조이며, 나는 예컨대 언어행위이론이나 (후설과 하이데거의 이중 전통 속에 존재하는) 실존의 현상학이 이러한 가능성들에 대해 제시하는 분석을 지속하고 정교화하고 복잡화하면서도 또한 그러한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모든 언어 행위, 다른 모든 수행문 및 심지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전언어적인 경험을 조직하는 약속(하지만 또한 약속의 중심에 놓여 있는 위협)의 수행문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경험에 대한 분석이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위협하는 약속과 교차하는 기대의 지평에 대한 해명이 문제인데, 이러한 기대의 지평은 우리가 시간 및 사건, 도착하는 것, 도착하는 이, 타자와 맺는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기대 없는 어떤 기대, 말하자면 사건(기다려짐 없이 기다려지는)에 의해 그 지평이 파열된 어떤 기대, 곧 사건에 대한 기대, “도착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규정하는 예상을 넘어서고 놀라게 해야 하는 어떤 “도착하는 것/이”에 대한 기대가 문제가 된다. 미래 아닌 미래의 걸음[“미래 아닌 미래의 걸음”의 원어는 “pas de futur”다. 여기서 “pas”는 부정을 의미하는 부사이지만, 또한 “걸음”, “보폭”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pas de futur”는 “미래 아님”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미래의 걸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뒤에 나오는 문구들도 모두 이러한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pas”의 중의적인 용법은 모리스 블랑쇼에서 비롯한 것으로, 데리다는 이 점에 관해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J. Derrida, “Pas”, in Parages, Galilée, 1986 참조―옮긴이], 장래 아닌 장래의 걸음, 다르게 다른 것 아닌 다르게 다른 것의 걸음.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사건 아닌 사건의 걸음, 혁명 아닌 혁명의 걸음. 정의 아닌 정의의 걸음. 이 두 개의 상이한 스타일의 사상(언어행위이론과 시간적이거나 역사적인 실존에 대한 존재-현상학)의 교차에서, 하지만 또한 그것들에 반대하여 내가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제안하는 해석은, 내가 보기에 벤야민의 해석과는 별로 닮지 않은 것 같다(사람들도 아마 동의할 것 같다). 메시아적인 것에 관한 나의 해석은 우리가 메시아주의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곧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과는 아무런 본질적인 관계도 없다. 메시아주의는 한편으로 역사적으로 규정된 계시―유대적인 계시이든 아니면 유대ㆍ기독교적인 계시이든 간에―에 대한 기억,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규정된 메시아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그 구조의 순수성 자체에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배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이러한 조건들을 거부해야 하기 때문도 아니고 필연적으로 메시아주의의 역사적인 모습들을 부정하거나 파괴해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그것들이 “메시아주의 없음”이라는 이 구조의 보편적이고 유사 초월론적인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것은 “없는”이라는 이 짧은 단어의 “논리”와 이 단어에 대한 해석으로―비록 지나치는 김에 짧게 한 마디 해두는 것이긴 하지만―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점에 관해 다른 곳에서, 특히 블랑쇼와 관련하여, 또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길게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블랑쇼가 때때로 두 개의 동음이의어―거의 동의어에 가까운―사이에서, 두 개의 동음이의어, 그것들의 의미작용을 연결하는 유비의 중심 자체에서 그것들이 지닌 동의성이 중단되는 두 개의 동음이의어 사이에서(예컨대 죽음 없는 죽음, 관계 없는 관계 등과 같이) “없는”이라는 이 전치사를 활용하는 외견상 역설적인 용법을 알고 있다. 이 경우 “없는”은 반드시 부정성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만약 이 전치사가 어떤 추상/떼어놓음abstraction을 실행한다면, 이는 또한 추상, 있다의 추상abstraction du il y a, 있다는 것의 추상abstraction qu'il y a이 낳는 필연적인 효과를 해명하기 위해서다. 나는 처음에 내가 이 모든 “답변들”(물론 답변/해답 없는 답변들)을 “없는”에 대한 분석 및 이 저자들 대부분이 “없는”을 사용하는 용법에 대한 분석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단어를 나에게 맞서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태연하게 확신하고 있다(늘 의기양양한 이글턴은 분명히 그의 글의 제목[「마르크스주의 없는 마르크스주의」―옮긴이]에서부터 어떤 “마르크스주의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고발함으로써 군중의 갈채와 조소le rire 또는 분노l'ire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정말로 그렇다! 나는 기꺼이 이 점을 확증하고 또 서명해둔다). 다른 이들의 경우―예컨대 마슈레가 정당하게 그렇게 하듯이―이번에는 호의적인 방식으로, 지적이고 차분한 방식으로 “탈물질화된 마르크스”에 대해 우려한다. “사회 계급 없는, 노동 착취 없는, 잉여가치 없는 마르크스 [...]”(강조는 내가 했다) 그가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는 “그 자신의 환영 이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유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무보다 더 못한 것이라고, 아무런 물질성도 없고 아무런 신체도 없는 순수한 가상적인 외양일 뿐이며, 또 진정한,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든 “유령” 및 모든 유령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경솔한 짓이다. 이는 다시 한 번 이 책에 실린 나의 독자들 중 몇몇 사람들이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간에 몰아내고 푸닥거리하고 부정하고 무시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유령의 논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만약 환영이 환영에 불과하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님일 뿐이라면, 그렇다면 내 책은 당연히 아무런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을 것이다(이는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될 가능성이며, 나 자신은 누구보다 더 이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앞서 말한 유령성과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모든 가능성들(이데올로기, 물신숭배, 가치(교환가치나 사용가치), 언어 및 애도 작업이 생산하는 모든 것, 부정성, 이상화, 추상, 가상화virtualisation 등)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계급 없는”에 대한 암시를 인용할 순간에 이르렀기 때문에, 역시 “계급 없는” 인터내셔널에 대해 우려했고, “결집 없이, 당과 조국 없이 ... 공동 시민권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인 소속 없이”라는 문구에서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인 소속 없이” 부분만 강조하고 있는 루이스에게 내가 이미 제시했던 답변을 한 마디로 환기해두겠다. 문제는 계급적인 소속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시민권이나 당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계급이나 당 또는 시민권을 본질적인 토대나 지주로 삼고 있지 않은 어떤 인터내셔널에 대한 호소다. 이는 계급이나 시민권 또는 당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규정된 맥락에 따라 가능한 한 엄밀하게 이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더욱이 루이스가 “계급 없는”이라는 규정에 대해 우려한다면, 왜 그는 “시민권 없는”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는가? 이는 시민권에 대한 준거 “없이” 인터내셔널이(심지어 예전의 인터내셔널의 경우에도) 실제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없는”이라는 것은 이 점에 관해 부정적인 것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각각의 국가 내에서 시민들이기를 그치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고유한 시민권을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당과 계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으며, 심지어 “당”과 “계급”이 더 이상 주요한 준거 및 결정적인 패러다임이 되지 못하는 경우에도(나는 오늘날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 점에서 나는 루이스 및 몇몇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하지만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니다―과 갈라서게 된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낡은 수사법에 따라 익히 비난하곤 하는 “제 3의 길”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되면 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자신들의 익숙한 광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어떤 우파의 적수, “계급의 적”과 맞서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어떤 친숙한 것chose familière과 관계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또는 그렇다고 믿는 척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루이스가 찬양하는 아마드는 나의 화두를 정의하려고 애쓴다. 알다시피 그건 바로 “제 3의 길”이다! 그들이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가족, 인정된 계보, 가족적인 분위기다. 그들을 안도하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친숙한 것을 재인지하는 것이며, 스스로 안도하면서 자신을 재인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누가 누구고 누가 어떤 가문에 속하고, 어떤 혈통에 속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친숙한 영역 안에 들어서게 된다. 곧 제 3의 길로서 해체가 그것인데, 이는 확실히 우파와는 대립하지만, [데리다가] 앞서 말했듯이,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의미했던 “모든 것”과도 대립한다.”         

  메시아주의의 모습들은 (다소 서둘러 논의를 진행하고 모든 코드들을 얼마간 혼융해서 교차시켜보자면) “종교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또는 물신화하는 형성체들로서 해체되어야 하는 반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해체 불가능한 이유는, 모든 해체의 운동 자체가 이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확실성의 토대로서, (마슈레의 성급한 해석에 따른다면) 코기토의 확고한 지반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양상에 따라 전제되는 것이다.

  “유사 초월론적인” 이 전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일체의 메시아주의를 배제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보편적인 구조(어떤 다른 장래에 대한, 타자 일반의 장래에 대한 기다림 없는 기다림, 역사의 통상적인 경로를 차단하게 될 어떤 혁명적인 정의의 약속 등)를 기술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왜 계속 메시아적인 것에 준거하는 것인가? 왜 메시아적인 것 또는 메시아라는 이 이름이 필요한가? 나는 가장 커다란 난점이 도사리고 있는 세 번째 논점에서 이를 다시 다루어볼 생각이다.

  2. 왜냐하면 나는 벤야민이 이 “약한 메시아적 힘”(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 “weak messianic power”)의 특권화된 순간들을, 규정되어 있는 정치적ㆍ역사적 국면들 및 심지어 위기들과 연결시키고 있는지 자문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날짜 및 정치적 맥락(2차 대전 초기에 이루어진 독일과 소련 간의 [상호 불가침―옮긴이] 조약)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가설은 확언하기에는 충분치 않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벤야민에게는 결정적인 순간들(혁명 이전이나 이후의), 희망이나 절망의 순간들, 메시아주의의 모사물이 알리바이로 사용될 만한 궁지의 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약한”이라는 낯선 형용사가 붙는다. 내가 말하는 메시아성을 하나의 힘(이는 또한 하나의 약함 또는 일종의 절대적 무기력이기도 하다)으로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하나의 힘으로, 어떤 욕망의 운동으로, 예견 불가능한 어떤 장래의(심지어 다시 도래할 어떤 과거의) 거역할 수 없는 이끎 내지 도약이나 긍정으로, 비현재의 경험, 살아 있는/생생한 현재안의 살아 있는/생생한 비현재의(유령적인 것의) 경험으로, 경계에서 살아가기sur-vivant(모든 현시/현존화 내지 재현 가능성 등을 넘어서 있는 절대적인 과거 내지 절대적인 장래)의 경험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이러한 “힘”에 대해 강하거나 약하다고, 다소간 강하거나 약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이고 유사초월론적인 구조는 역사(정치적 역사이든 일반적인 역사이든 간에)의 어떤 특수한 순간과도, 어떤 특수한 문화(아브라함적인 문화이든 아니든 간에)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성은 어떤 메시아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로도 사용되지 않으며 어떤 메시아주의도 모방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주의도 확증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3. 이 도식을 좀더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이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논거로 반론을 펼지도 모르겠는데, 나 역시 가상적으로 나 자신에게 이런 반론을 제기해본 적이 있다. 당신은 “메시아적인 것”이 모든 형태의 “메시아주의”와 독립해 있다(“메시아주의 없는”)고 말하고 있는데, 왜 메시아적인 것을 명명하지 않고서도, 심지어 어떤 메시아, 그처럼 명백하게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 하나의 “계시”에 결부되어 있는 [성경의―옮긴이] 메시아의 모습을 암시하지 않은 가운데 그러한 보편적인 구조를 기술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반론이 정당한 것이고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을 만큼 매우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제시해야 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제시해야 할 답변을 여기 적어보겠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답변으로서,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답변의 계산은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없다.

  a. 한편으로, (메시아적이라는) 이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임의적이거나 외재적인 것 같다. 이 단어는 수사법이나 교육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내가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은 것(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거나 동일시되지는 않고서라고 곧바로 덧붙여 두겠다)을 친숙한 문화적 환경을 참조함으로써 좀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내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언젠가 이해가 될 맥락에서는―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전통적인 메시아주의나 “메시아”에 대한 암시 없이도, 심지어 “없는”이라는 말이 없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낡은 단어들 아래서 모든 이름이 변화했던 게 될 것이다.  

  b.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처럼 임의적인 선택 및 이러한 교육학적 유용성 아래 아마도 좀더 환원 불가능한 어떤 애매성이 숨어 있을 것 같다. (보편적인 구조로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일체의 역사적이고 규정된 메시아주의의 모습에 앞서고 또 그것을 조건 짓는 것인지(이 경우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모든 메시아주의에서 독립적이고 그것에 이질적인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이름 자체는 부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아니면 이러한 독립성에 대한 생각 자체가 메시아를 명명하고 그것에게 규정된 모습을 부여하는 “성서적인” 사건들을 통해 비로소 그 자체로 생산되거나 계시될 수 있었고, 또 가능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인지, 이 양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c. 이 마지막 가설에서(내가 이런 식으로 제기된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 가설은 열려 있고 유예된 것으로 남겨놓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이 제기된 채 남아 있게 하기 위해 당분간 “메시아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유지하겠다)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준거는 교육학적이고 잠정적인 도구로 취급하기는 훨씬 어렵다. 비록 그것이 “메시아주의 없는” 것으로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 적어도 네 가지 이유 때문인데, 이것들을 생략적이고 경제적이고 건조한 방식으로 제시해보겠다.

  1. 첫째,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사건(및 그것이 지닌 모든 구성소와 전제, 결과)이 유럽적이고 유대ㆍ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경험적이고 한정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유럽적이고 유대ㆍ기독교적인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함축하는 모든 쟁점들을, 마르크스로부터 물려받은 담론의 논리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이러한 유럽적ㆍ성서적 계보에 낯선 사회들이나 문화들에 이르기까지 측정해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전체는 “메시아”가 무언가를 의미하는 문화에서 출현했으며, 이 문화는 “국지적인” 문화 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손쉽게 구획될 수 있는 그런 문화로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침전 작용을 다시 드러내는 일은 결코 무익하지 않으며, 이것이 그 침전 작용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정치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2. 둘째,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화는 그 언어의 문자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내가 다른 곳에서 “라틴적인 세계화mondialatinisation”1)라고 불렀던 현상에 참여했던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메시아에 대한  일체의 준거를 말소하는 것은 어려울(그리고 그럴 수 있다 해도 그 경우에는 너무 추상적일) 것이다. 마르크스에 관한 내 저서는―나의 언급이 오만하다면 용서해주기 바란다―마르크스로 한정되지 않는 어떤 [이론적―옮긴이] 장치dispositif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3. 내가 보기에는 종교에 대한, 각각의 규정된 종교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이러한 비판이 아무리 필연적이거나 근원적이라 할지라도―믿음 일반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나는 다른 곳, 특히 「믿음과 지식」에서 약속의 말에 담겨 있는 신앙, 신용, 믿음의 경험(모든 지식 밑 모든 “진술적constative” 가능성을 넘어)은 사회적 유대나 타자와의 관계 일반에, 모든 지식 및 모든 정치적 행위, 특히 모든 혁명에 함축되어 있는 명령, 약속, 수행성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바 있다. 과학적이거나 정치적 과제로 종교 비판 자체는 이러한 “믿음”에 호소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믿음에 대한 모든 준거를 말소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표현은 믿음과 종교 사이의 이러한 차이를 번역하는 데,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적합한 것 같았다. 

  4.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물음”이라는 이 민감한 장소에 이르게 된다.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파괴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생성되는 데서 종교가 수행하는 표본적인 역할, 곧 대체 불가능한 역할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긴급성에 대해, 곧 오늘날 지정학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종교의 물음을 다시 사고하게 만드는 필연성(이 점에 관해 나는 제임슨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에 대해서까지 말할 것은 없고, 여기서는 내가 “메시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 및 유령적인 논리에 준거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해당 지면들을 참조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특히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두 가지 형태의 “환원 불가능성”, 곧 한편으로는 “유령의 환원할 수 없는 종별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구성에서 종교적 모델의 환원 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답변을 준비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 “종교적 세계에 대한 준거만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자율성을 ... 설명해 줄 수 있다.” 또는 좀더 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참조할 수 있다. “종교적인 것은 여느 이데올로기적인 현상이나 여느 환영의 생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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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사 2009-02-0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나 보네요. 특히 번역올려주신 부분은 많이 궁금하던 부분인데, 이렇게 먼저 읽을 수 있게 공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balmas 2009-02-05 01:0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 책은 아마 다음달 안에는 출간될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책이 1993년에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겠죠. 알다시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후 소련이 해체되는 등 1990년대 초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이 일어나던 시기였죠.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마침내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면서, 새로운 세계질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로 알려진 새로운 질서를 전파하는 데 몰두하던 시기도 1990년대 초였습니다. 따라서 누가 보든 이제 마르크스는 죽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끝장났다고 평가할 만한 시기에,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책을 냅니다. 그 이유는, 그래 마르크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운 사회주의 국가들도 몰락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가 남겨준 지적, 정치적 유산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죠.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생물학적으로 죽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회주의 국가들도 몰락했지만, 이제 유령이 된 마르크스는 역설적이게도 유령이 됨으로써 불사의 생명을 얻은 셈이고, 억압과 폭력, 착취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호소하는 목소리에 늘 응답하기 위해 언제든지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불어에서 "되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 "르브낭revenant"이고, 이건 또 "망령"을 뜻한다는 점이죠. 따라서 "망령", "유령" 마르크스는 언제고 "되돌아오는 것"인 셈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이라는 복수 형태로 되어 있죠? 왜 그럴까요? 그건 두 가지를 동시에 뜻하기 위해서랍니다.

 

첫째,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은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 혹시 살아 돌아오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조바심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뜻하고, 또 데리다처럼 마르크스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이나 운동을 말하는 거지요.

 

반대로 이 제목은 또한 “마르크스 자신을 괴롭혔던 유령들”이나 “마르크스 자신이 몰아내려고 했던 유령들”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사상의 한계를 가리키기 위해 이 표현을 쓰고 있는 거지요. 풀이하자면, 마르크스의 사상, 또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피억압자들의 해방을 위해 크게 공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한계와 난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한계와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남긴 유산을 상속하되, 그것의 한계들을 넘어서고 난점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비판적, 선별적으로 상속해야 한다는 뜻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표현하는 중의적인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마르크스를 괴롭힌 유령들은 주제상으로 본다면, 바로 환영, 망령, 유령과 같은 주제지요. 곧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자본}(1867)에 이르기까지 줄곧 생생한 현실과 현실적인 실천을 환영, 망령, 허깨비, 가상, 이데올로기 등과 대립시키죠. 그런데 예를 들어 요즘 사이버스페이스나 가상 현실 등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물질적인 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독특한 종류의 실재가 또 존재하죠. 어떻게 보면 사람의 사고 자체가 이미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런데 데리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늘 비물질적인 현실, 곧 이데올로기, 물신숭배, 환영, 유령, 망령들을 몰아내려고 했고, 공산주의는 이런 비실재적인 가상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투명한 결합이 될 것이라고 믿었죠. 데리다가 보기에는 이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천 운동, 해방의 운동에 대해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이 이미 유령이 된 마당에, 유령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마르크스로서도 유쾌한 일은 못되겠죠. ^^;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비물질적인 것들의 현실성, 실재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해명할 수 있는 관점, 곧 유령론이 부재한다는 데에 곧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의 근원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키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령론을 좀더 발전시키고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상속하는 일의 핵심이자 이제는 그 자신이 유령이 된 데리다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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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8-01-24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오랜만입니다. 괜한 반가움에 그냥 섣부른 질문 하나 여쭙겠습니다. 아마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뭐 그렇게 자신은 없습니다만) "신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한다"라고 얘기할 겁니다. 인간 혹은/그리고 세계 바깥에 존재하면서 이들의 알파와 오메가를 주관하는 객관자로서의 신은 없다 하더라도, 종교가 갖는 실재적인 힘 속에 그 신의 효과로 존재하는, 따라서 수많은 대중의 일요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요...

아마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유한자이기 때문에, 그것의 유령도, 나아가 유령"들"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신은 무한자입니다. 하지만 신의 유령에 대해 우리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신보다도 못한 마르크스이군요. 딱 인간만큼의....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의 근원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과,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상속하는 일과의 거리가 참으로 먼 것 같습니다. 그 근원적 한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를 계승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도 어린 질문이지만, 그냥 용기 내어 여쭙습니다. 마르크스를 잊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나요?

아..
전 그런데 왜 그렇게 못 하나요?

(죄송합니다. 한잔 했습니다.....) 혹시 무례하게 느끼시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balmas 2008-01-24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에로이카님, 오랜만이시네요. 술 한 잔 하신 게 느껴지네요.
기분좋게 하셨는지 울적하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요 ... ^^;
유령이 없는 신보다는 유령이 있는 마르크스가 낫겠죠. 아닙니까? ^^;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 보면 신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신은 결국 원초적인 아버지, 자식들에게 살해당한 원초적인 아버지가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하죠. 신은 그저 공상이라거나 헛것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좀더 나은 설명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무한하다고 하는 신도 결국 유한자, 인간들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일을 다루는 데 마르크스만큼 치밀하고 근원적인 사람도 별로 없죠. 더욱이 마르크스는 지성의 능력으로는 그와 견줄 만한 다른 사람들(니체라 하든, 프로이트라 하든, 아니면 하이데거나 기타 다른 누구라 하든)과 달리, 피억압자, 피착취자들의 편에 서서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를 꿈꾸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마르크스가 귀중하다면, 아마도 이 후자 때문이겠죠.
따라서 마르크스가 왜 그렇게 신이 집요하게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마르크스를 벗어나야 할 이유는 못되겠죠. 이제 마르크스를 버리는 건 바로 피억압자들, 피착취자들, 기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복수의 제목이 달린 책에서 마르크스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상속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건, 제가 보기에는 이런 말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정신과 데리다의 정신이 그리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ㅎㅎ

오늘은 편히 주무세요.:-)

2008-01-24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1-25 02:19   좋아요 0 | URL
속삭이신 님,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니 안타깝네요. 그런데 사실 이 텍스트를 읽을 때, 그것과 관련되는 논의, 가령 청년 마르크스의 작품들의 내용이나 그것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함께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텍스트를 충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제가 볼 때 어떤 텍스트, 특히 철학이나 이론 텍스트를 읽고 그것으로부터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내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 텍스트에서 자기에게 특별히 흥미가 있는 대목이나 논점을 곰곰히 숙고해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는 글,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읽고 논의하고 관심을 갖는 글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글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해도 적어도 그 텍스트의 몇 가지는 이해할 수 있는 법이죠. 그 몇 가지가 다행스럽게도 그 텍스트의 핵심 논점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들로부터 독자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내용과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가 이해가 된다면, 그로부터 다른 것들을 연쇄적으로 더 얻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그와 관련된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 그때까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다른 점들을 새롭게 파악하게 되는 경우도 있죠.

요컨대 당장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나에게, 독자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한두 대목을 잘 이해하고 그것들로부터 쓸모 있고, 가치가 있는 어떤 것들을 이끌어내고 자기 것으로 만들자, 이게 제가 추천하는 독서법입니다. ^^;

2008-01-24 1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1-25 02:20   좋아요 0 | URL
예, 따로 참가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관심을 보여주시니 반갑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음 주에는 피콜로 극단을 계속 읽을 예정이니까 한 번 미리 읽어오시면 좋겠죠. :-)

2008-01-25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토리 2008-02-0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쫄바지님한테 한 질문에 대한 답이 왜 여기에--; 발마스님이 바로 이 책 역자이신가보네염(맞나?)..구래서 물어보라고 한 것 같네여. ^^ 쫄바지님 서재 타고 님 서재 구경하는데 제가 한 질문이 여기 있어서 쩜 놀랬어여*___*
쫄바지님의 강요?에 못이겨 책 샀는데여,ㅋㅋ 앞으로 공부 좀 하고 질문할게염;;;

balmas 2008-02-0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토리님/ 반갑습니다. ㅎㅎㅎ 쫄바지님 서재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댓글이 눈에 띄어서, 개구리 한 마리 구해주는 셈치고(??? ^^;;) 잠깐 페이퍼를 올려봤어염. 앞으로 종종 들르셈.^^
 

 

http://www.nodl.or.kr/htm/board/?jid=notice&file=view&jb_id=602&jb_code=1

 

 

 



어김없이 추운 겨울 노들인의 밤 시즌이 다가옵니다.

다음주 토요일,

1월 26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노들천막야학 앞에서 '제15회 노들인의 밤'

[노들야학 공간마련을 위한 모금공연]이

진행됩니다.


이번 노들인의 밤은

단순히 축제의 자리가 아닌

노들을 살리는, 노들을 구하는

그래서 장애성인의 교육권을 확장시켜나가는

투쟁과 후원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노들과 함께하고, 함께한

여러분들의 연대가 절실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찾고 쟁취하기 위한

그 즐거운 행동의 장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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