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책이 1993년에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겠죠. 알다시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후 소련이 해체되는 등 1990년대 초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이 일어나던 시기였죠.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마침내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면서, 새로운 세계질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로 알려진 새로운 질서를 전파하는 데 몰두하던 시기도 1990년대 초였습니다. 따라서 누가 보든 이제 마르크스는 죽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끝장났다고 평가할 만한 시기에,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책을 냅니다. 그 이유는, 그래 마르크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운 사회주의 국가들도 몰락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가 남겨준 지적, 정치적 유산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죠.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생물학적으로 죽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회주의 국가들도 몰락했지만, 이제 유령이 된 마르크스는 역설적이게도 유령이 됨으로써 불사의 생명을 얻은 셈이고, 억압과 폭력, 착취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호소하는 목소리에 늘 응답하기 위해 언제든지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불어에서 "되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 "르브낭revenant"이고, 이건 또 "망령"을 뜻한다는 점이죠. 따라서 "망령", "유령" 마르크스는 언제고 "되돌아오는 것"인 셈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이라는 복수 형태로 되어 있죠? 왜 그럴까요? 그건 두 가지를 동시에 뜻하기 위해서랍니다.

 

첫째,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은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 혹시 살아 돌아오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조바심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뜻하고, 또 데리다처럼 마르크스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이나 운동을 말하는 거지요.

 

반대로 이 제목은 또한 “마르크스 자신을 괴롭혔던 유령들”이나 “마르크스 자신이 몰아내려고 했던 유령들”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사상의 한계를 가리키기 위해 이 표현을 쓰고 있는 거지요. 풀이하자면, 마르크스의 사상, 또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피억압자들의 해방을 위해 크게 공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한계와 난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한계와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남긴 유산을 상속하되, 그것의 한계들을 넘어서고 난점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비판적, 선별적으로 상속해야 한다는 뜻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표현하는 중의적인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마르크스를 괴롭힌 유령들은 주제상으로 본다면, 바로 환영, 망령, 유령과 같은 주제지요. 곧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자본}(1867)에 이르기까지 줄곧 생생한 현실과 현실적인 실천을 환영, 망령, 허깨비, 가상, 이데올로기 등과 대립시키죠. 그런데 예를 들어 요즘 사이버스페이스나 가상 현실 등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물질적인 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독특한 종류의 실재가 또 존재하죠. 어떻게 보면 사람의 사고 자체가 이미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런데 데리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늘 비물질적인 현실, 곧 이데올로기, 물신숭배, 환영, 유령, 망령들을 몰아내려고 했고, 공산주의는 이런 비실재적인 가상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투명한 결합이 될 것이라고 믿었죠. 데리다가 보기에는 이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천 운동, 해방의 운동에 대해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이 이미 유령이 된 마당에, 유령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마르크스로서도 유쾌한 일은 못되겠죠. ^^;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비물질적인 것들의 현실성, 실재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해명할 수 있는 관점, 곧 유령론이 부재한다는 데에 곧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의 근원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키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령론을 좀더 발전시키고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상속하는 일의 핵심이자 이제는 그 자신이 유령이 된 데리다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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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8-01-24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오랜만입니다. 괜한 반가움에 그냥 섣부른 질문 하나 여쭙겠습니다. 아마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뭐 그렇게 자신은 없습니다만) "신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한다"라고 얘기할 겁니다. 인간 혹은/그리고 세계 바깥에 존재하면서 이들의 알파와 오메가를 주관하는 객관자로서의 신은 없다 하더라도, 종교가 갖는 실재적인 힘 속에 그 신의 효과로 존재하는, 따라서 수많은 대중의 일요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요...

아마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유한자이기 때문에, 그것의 유령도, 나아가 유령"들"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신은 무한자입니다. 하지만 신의 유령에 대해 우리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신보다도 못한 마르크스이군요. 딱 인간만큼의....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의 근원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과,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상속하는 일과의 거리가 참으로 먼 것 같습니다. 그 근원적 한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를 계승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도 어린 질문이지만, 그냥 용기 내어 여쭙습니다. 마르크스를 잊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나요?

아..
전 그런데 왜 그렇게 못 하나요?

(죄송합니다. 한잔 했습니다.....) 혹시 무례하게 느끼시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balmas 2008-01-24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에로이카님, 오랜만이시네요. 술 한 잔 하신 게 느껴지네요.
기분좋게 하셨는지 울적하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요 ... ^^;
유령이 없는 신보다는 유령이 있는 마르크스가 낫겠죠. 아닙니까? ^^;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 보면 신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신은 결국 원초적인 아버지, 자식들에게 살해당한 원초적인 아버지가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하죠. 신은 그저 공상이라거나 헛것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좀더 나은 설명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무한하다고 하는 신도 결국 유한자, 인간들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일을 다루는 데 마르크스만큼 치밀하고 근원적인 사람도 별로 없죠. 더욱이 마르크스는 지성의 능력으로는 그와 견줄 만한 다른 사람들(니체라 하든, 프로이트라 하든, 아니면 하이데거나 기타 다른 누구라 하든)과 달리, 피억압자, 피착취자들의 편에 서서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를 꿈꾸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마르크스가 귀중하다면, 아마도 이 후자 때문이겠죠.
따라서 마르크스가 왜 그렇게 신이 집요하게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마르크스를 벗어나야 할 이유는 못되겠죠. 이제 마르크스를 버리는 건 바로 피억압자들, 피착취자들, 기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복수의 제목이 달린 책에서 마르크스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상속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건, 제가 보기에는 이런 말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정신과 데리다의 정신이 그리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ㅎㅎ

오늘은 편히 주무세요.:-)

2008-01-24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1-25 02:19   좋아요 0 | URL
속삭이신 님,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니 안타깝네요. 그런데 사실 이 텍스트를 읽을 때, 그것과 관련되는 논의, 가령 청년 마르크스의 작품들의 내용이나 그것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함께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텍스트를 충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제가 볼 때 어떤 텍스트, 특히 철학이나 이론 텍스트를 읽고 그것으로부터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내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 텍스트에서 자기에게 특별히 흥미가 있는 대목이나 논점을 곰곰히 숙고해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는 글,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읽고 논의하고 관심을 갖는 글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글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해도 적어도 그 텍스트의 몇 가지는 이해할 수 있는 법이죠. 그 몇 가지가 다행스럽게도 그 텍스트의 핵심 논점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들로부터 독자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내용과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가 이해가 된다면, 그로부터 다른 것들을 연쇄적으로 더 얻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그와 관련된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 그때까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다른 점들을 새롭게 파악하게 되는 경우도 있죠.

요컨대 당장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나에게, 독자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한두 대목을 잘 이해하고 그것들로부터 쓸모 있고, 가치가 있는 어떤 것들을 이끌어내고 자기 것으로 만들자, 이게 제가 추천하는 독서법입니다. ^^;

2008-01-24 1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1-25 02:20   좋아요 0 | URL
예, 따로 참가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관심을 보여주시니 반갑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음 주에는 피콜로 극단을 계속 읽을 예정이니까 한 번 미리 읽어오시면 좋겠죠. :-)

2008-01-25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토리 2008-02-0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쫄바지님한테 한 질문에 대한 답이 왜 여기에--; 발마스님이 바로 이 책 역자이신가보네염(맞나?)..구래서 물어보라고 한 것 같네여. ^^ 쫄바지님 서재 타고 님 서재 구경하는데 제가 한 질문이 여기 있어서 쩜 놀랬어여*___*
쫄바지님의 강요?에 못이겨 책 샀는데여,ㅋㅋ 앞으로 공부 좀 하고 질문할게염;;;

balmas 2008-02-0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토리님/ 반갑습니다. ㅎㅎㅎ 쫄바지님 서재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댓글이 눈에 띄어서, 개구리 한 마리 구해주는 셈치고(??? ^^;;) 잠깐 페이퍼를 올려봤어염. 앞으로 종종 들르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