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대학원신문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에서 기획특집으로 마련한 폭력에 관한 연재 기사의 서론격으로 쓴 글입니다. ^^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처음에는 "반폭력"이라고 했는데, 내용상 "극단적 폭력"으로 하는 게 옳아서 바꿨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첫번째 소제목도 좀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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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폭력은 절대적 악인가?


폭력이라는 문제가 지닌 어려움은 우선, 폭력에 관해 단도직입적인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는 보통 폭력은 나쁜 것, 어떻게든 막아야 하고 제거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폭력은 과연 나쁜 것인가?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피하거나 억제되어야 하는 것인가? 당장 몇 가지 반례가 떠오른다. 가령 군사 독재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폭력은 어떤가?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는 소수 민족 사람들의 투쟁은 어떤가? 또한 부당한 폭력 때문에 심각한 위험에 빠졌을 때 행사되는 폭력, 곧 이른바 정당방위는 어떤가?

이 사례들은, 특별한 종교적 교리와 결부되지 않는 한 순수한 비폭력을 옹호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순수한 비폭력은 최악의 폭력을 낳을 수도 있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해방의 정치의 폭력론―본질주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이 쉽게 정당화되거나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연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또 정당화된다면 어디까지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고전적인 해방의 정치(여기에는 조르주 소렐 등의 무정부주의도 포함된다)는 폭력의 활용 가능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한 관점이다.

해방의 정치의 폭력론은 본질주의적 폭력론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폭력은 지배 계급이나 억압적인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며, 독자적인 기준에 따라 판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준, 예컨대 계급, 식민주의, 성 등과 같은 기준에 종속된다. 곧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폭력은 계급 지배의 틀에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식민지해방운동의 관점에서는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라는 틀 안에서만, 여성해방의 관점에서는 남성 지배라는 틀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문제다. 따라서 이러한 지배와 억압에 맞선 저항의 폭력 내지 대항 폭력은 본질적으로 정당한 것이며,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적인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

본질주의적 관점의 문제점은 폭력적인 수단의 위험에 둔감했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것이 폭력의 애매성에 맹목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곧 고전적인 해방론에는 폭력이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잠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데리다와 폭력의 애매성


마르크스주의가 간과했던 폭력의 애매성을 베버는 정치의 핵심 문제로 제기한 바 있다. 베버는 정치란 “모든 강제력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직업으로서의 정치󰡕)이라고 주장했으며, 정치의 비극은,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반면 혁명은 공포정치로 전도되기 쉽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베버에게 남은 길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막스 베버가 남겨준 불편한 진실과 대결하는 일이 후배 사상가들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하버마스가 소통적 합리성이라는 준초월적 규범 이론에서 베버의 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면, 데리다는 폭력의 아포리아를 좀더 심화하는 길을 택했다.

해체론의 창시자가 보기에 폭력은 인간의 삶에 원초적인 것이어서 억압적인 지배 권력만이 아니라 고결한 해방운동의 주체들도, 또한 비폭력의 옹호자들까지도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폭력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더 나아가 로고스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다.

데리다가 일부 철학자들에게 불신 받고 비난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데리다는 로고스를 원초적 폭력에서 파생된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합리성의 근거, 곧 서양 철학의 기초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체는 허무주의와 상대주의라는 비난이 제기된다. 로고스가 파생적인 것이라면, 로고스의 기원은 폭력, 광기, 정념, 신비 등과 같은 이성의 타자일 수밖에 없고, 이는 정당성(legitimacy)이나 정당화(justification)의 문제를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해체는 로고스 중심주의보다 더 철학적이다. 왜냐하면 해체는 로고스 중심주의 철학이 독단적으로 전제하는 기원, 법, 동일성 자체의 근거에 관한 질문을, 비판적으로(칸트적 의미에서), 또는 유사 초월론적(quasi-transcendental)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기원, 법, 동일성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는 로고스 중심주의 철학이야말로 원초적 폭력(archi-violence)을 은폐하는 2차적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폭력적이다.

그렇다면 보통 생각하듯이 법과 폭력을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법과 폭력 모두 동일한 원초적 폭력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중의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자신을 일체의 폭력성에서 면제시킴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법의 관심(interest)은 사실은 어떤 폭력의 이해관계(interest)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법에 내재한 위선과 불의를 폭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로운 법, 새로운 정의로 제시하려는 대항 폭력의 주장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것 역시 기존의 법과 마찬가지로 폭력과 대항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의란 불가능한가? 법의 역사, 정의의 역사란, 완전히 정당하지도 않고 완전히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과 대항 폭력, 권력과 대항 권력 사이의 상대주의적인 갈등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발리바르와 반폭력의 정치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 및 󰡔불량배들󰡕(2002) 같은 후기 저작에서 이 질문에 대해 메시아적인 것(le messianique)이라는 대담한 범주를 중심으로 독창적이고 세심한 답변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에티엔 발리바르가 제안하는 반폭력(anti-violence)의 정치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발리바르는 일련의 저작에서 고전적인 폭력론의 범주들인 폭력과 대항폭력, 비폭력과 구별되는 반폭력이라는 개념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반폭력은 자칫 비폭력과 혼동되기 쉬운 개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반폭력은 비폭력과 비슷한 것이 아닐뿐더러 그보다 훨씬 넓고 근원적인 쟁점을 제기하는 개념이다.

발리바르는 폭력의 애매성을 긍정하는 점에서도, “폭력 내부에서 폭력을 반대하는 것”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점에서도 데리다와 같은 입장이다. 또한 두 사람은 “극단적 폭력” 내지 “잔혹한 폭력”이 폭력의 문제를 특별히 중대한 정치적 쟁점으로 만든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서로 일치한다. 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저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이러한 쟁점들을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제도들에 대한 분석과 연결하며, 그리하여 폭력에 맞서는 정치적 실천의 조건 및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은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잠식할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실존의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극단적 폭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인간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폭력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징적인 권력에 기반을 둔 폭력(인종청소) 및 자연 재해, 일회용 인간들 같은 현상으로 오늘날 도처에서 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반드시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장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 힘겹게 그저 몸뚱이를 견뎌내는 사람들, 그저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 폭력은 이처럼 사람들 사이의 끈을 파괴하는 폭력, 그리하여 개인들이 지닌 인간적 차원을 해체시키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을 정치의 근본 쟁점으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 지배 계급의 폭력에 맞서 민중들은 결단해야 한다는 공문구의 반복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정치는 오늘날 인민 대중의 정치로서 좌파 정치의 사활이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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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02-26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에 관해 말하기의 어려움... 이건 비문 아닌가요 ㅎㅎ
폭력에 관해 말하기는 어렵다,
폭력에 관해 말하기가 어려운 까닭, 이렇게 써야 하는 거 아닐까요

로쟈님 서재에서 '영어식 한국어' 댓글 달고 나서, 여기와서 시비겁니다 ^^

릴케 현상 2009-02-2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고종석의 <<국어의 풍경들>>을 보고 있는데,<춤추기.잠자기.꿈꾸기>라는 장에서 '-ㅁ'('음')과 '-기'라는 명사형 어미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들을 해주네요. 명사형 어미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윗 글은 비문이 아닌 걸로 보이네요. 다만 "-ㅁ형은 이제 의고투라는 인상을 주어서 세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156쪽)고 하네요.

balmas 2009-02-2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딸기님, 산책님이 비문 아니라고 하시는데여?^^ 바람구두님 책 잘 받았습니다. 이번 호 글들이 상당히 알차던데요?^^

딸기 2009-02-2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기와 ㅁ이 비문이 아니라고 한게 아니예요, 저는...
폭력에 관해 말하기의 어려움이 비문이라는 거지요 ㅎㅎ
그냥 '말하기의 어려움'이라고 하면 어색할 뿐이지 비문은 아니지요

[해이] 2009-03-04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ㅋㅋ

balmas 2009-03-06 03:31   좋아요 0 | URL
ㅎㅎ 재밌었어?

2009-03-04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9-03-06 03:32   좋아요 0 | URL
글쎄요, 3월 안으로는 번역을 마칠 생각이니까, 대략 빠르면 5월 아니면 6월 정도에는 시중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9-03-0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이 비문이라고 지적한 근거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익섭 선생의 <<국어학개설>>을 살펴보다가 막연한 짐작이 들었습니다. '명사는 관형어의 꾸밈을 받지만 동사의 명사형은 관형어의 꾸밈을 받지 못한다'는 이익섭의 설명. 혹시 딸기님이 "폭력에 관해" 때문에 비문이라고 하신 것은 관형어와 부사어의 수식과 관련한 것이 아닌가요? 이익섭이 올바른 예문으로 소개한 문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훌륭히 합격하였음을 알려야겠다."

balmas 2009-03-06 03:33   좋아요 0 | URL
저도 왜 비문이라고 하시는지, 사실 좀 궁금하긴 합니다.^^; 그냥 독자가 어색하다고 하니까 일단 절의 제목을 고쳐서 신문사로 넘기기는 했는데, 저는 그냥 괜찮은 것 같던데 ... ㅎㅎㅎ
 

역자로서 제가 번역한 책을 갖고 이렇게 흥미있는 토론이 있었다니  

마구마구 보람이 느껴지네요.^^;  

이런 거 보면 좀더 번역을 해야겠다 싶다가도  

번역하다 보면 너무 지겨워서 이것만 하고 이제는 다시 안해야지,  

매일 이렇게 왔다갔다 한답니다. ㅋ  

 아무튼 좋은 페이퍼 올려주셔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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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님의 "헤로도토스 역사 그리스어 완역본 출간"

ㅎㅎㅎ 드디어 제 아이디의 비밀을 푸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제 아이디의 비밀 풀이 수수께끼를 걸고 이벤트를 한번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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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님이 지난 주말에 올린 페이퍼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http://blog.aladin.co.kr/mramor/2609687#C1588082)

이번에 출간된 [뉴레프트리뷰]에 수록된 자크 랑시에르의 논문 번역에  상당수의 오역과 오식이 있어서 정오표를 올립니다. 

이미 책을 구입하신 분들은 정오표를 참조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오역된 것들을 살펴보니 민망하게도 간단한 문장과 단어, 구문들이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영어 논문인데다가 랑시에르의 글이 간명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번역을 한 게 이런 불상사를 초래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편집위원으로서 다른 글들의 교열에 신경을 쏟다가  정작 저 자신이 번역한 논문의 교열은 소홀히 한 것도  

이런 부끄러운 결과를 낳게 된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튼 편집위원들과 역자들을 믿고 책을 구입하신 독자분들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저 때문에 좋은 번역을  

해주신  다른 역자분들께 공연히 누를 끼치는 것 같아서 더 송구스럽습니다.  

도서출판 길과 다른 편집위원 분들께도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꼼꼼하게 번역을 검토해서 오역을 지적해준 로쟈님께는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음에는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편집위원 직을 스스로 그만두기 전에 먼저 잘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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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 논문 오역 정오표



476쪽 “어떤 주체를 표상하는”

→ “어떤 주제를 표상하는”


477쪽 “무용술이나 선풍기의 회전 같은”

→ “무용술이나 부채의 회전 같은”


479쪽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예술이 아닌데, 그것은 이 조각상이 집합적 자유의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각상이, 집합적 삶과 그 조각상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의 거리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그것이 집합적 자유의 표현이기 때문에 예술인 것이 아니라, 그 조각상이, 집합적 삶과 그 조각상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의 거리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예술이다."


480쪽 “예술이 더는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

→ “예술이 단지 예술에 불과할 때 예술은 사라진다.”


484쪽 “그는 또한 이상적인 사물들의 신체 그 자체 속에 새겨져 있는 전언들을 간파하기 위해 사회의 어두운 밑바닥이나 무의식 속을 파고드는, 일종의 증상학자가 된다.”

→ “그는 또한 일상적인 사물들의 신체 그 자체 속에 새겨져 있는 전언들을 간파하기 위해 사회의 어두운 밑바닥이나 무의식 속을 파고드는, 일종의 증상학자가 된다.”


485쪽 “문화비평은 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으로, 예술의 기호들과 삶의 기호들의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 “문화비평은 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으로, 예술의 기호들과 삶의 기호들의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에 대한 합리화로 간주될 수 있다.”


490-91쪽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 불가능'하다.”

→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아무것도 ‘재현 불가능’하지 않다.”


492쪽 “"미학적 정식이 처음부터 예술을 비예술과 연결하는 한에서, 그 정식은 예술의 삶을 두 개의 소실점, 곧 단순한 삶이 되는 예술이나 단순한 예술이 되는 삶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

→ “미학적 정식이 처음부터 예술을 비예술과 연결하는 한에서, 그 정식은 예술의 삶을 두 개의 소실점, 곧 단순한 삶이 되는 예술이나 단순한 예술이 되는 예술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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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역 논란의 한 가지 사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0 15:01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에서 제기한 오역 문제에 대해 역자인 Balmas님이 정오표를 작성해 올려주신 적이 있는데, 그게 기사화되었다. 이번 '오역 논란' 사례에서 역자가 보여준 태도가 '올바른 번역 문화의 확립'에 좋은 선례가 되리라는 것이 기자의 판단이다. 대놓고 불편함을 토로하여 '악역'을 맡긴 했는데,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보람이 없지는 않다. <뉴레프트리뷰>에 국한하더라도 앞으로 나올 2권부터는
 
 
zeno 2009-03-1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그래도 이렇게 바로 수긍하시고 정오표를 올리시는 모습이 멋지네요! 괜히 여러분들이 존경하시는 게 아닌가 봅니다. ㅎㅎ (새움에서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 하시더라구요 ㅎㅎ)

balmas 2009-03-1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기는요, 부끄러운 일이죠. 어떤 의미에서든 이건 역자/편집자로서는 부끄럽고 무책임한 일이죠.

2009-03-11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9-03-12 02:4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속삭이신 님,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까 헤로도토스의 {역사} 완역본 출간 소식이 들리네요.  

이 책을 번역해서 낸 분은 천병희 선생이시구요. 천병희 선생은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개 정년을 마치게 되면 한가하게 보내는 게 우리나라 학계의 익숙한 풍경인데,  

천병희 선생은 정년 퇴임하신 뒤 벌써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몇 권이나 번역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학계의 귀감이 될 만한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엄밀한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번역의 이런저런 아쉬움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아쉬운 부분을 채우는 것은 후학들에게 남겨진 몫이겠죠.  

아무튼 오래오래 건강하게 장수하시고, 더 좋은 번역을 많이 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천병희 선생 같은 분에게는 마땅히 문화훈장을 드려야 옳을 것 같은데,  

혹시 벌써 받으신 건 아니겠죠? (그랬다면 좋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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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2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9-02-23 22: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드디어 제 아이디의 비밀을 푸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제 아이디의 비밀 풀이 수수께끼를 걸고 이벤트를 한번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