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데리다 저서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습니다.

올해 이미 출간된 책만 해도,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와 [시선의 권리](아트북스) [법의 힘](문학과 지성사),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 지성사)가 있고, 조만간 출간될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까지 하면 다섯 권이 출간되는 셈이죠.

지난 번에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번역 상태에 관해 간단한 글을 올린 적이 있고(그런데 후속 글은 계속 감감무소식 ... -_-;;;), [시선의 권리]가 출간되었을 때에도, 번역상태에 대해 불안감이 든다는 지적을 했습니다(7월 10일 마이페이퍼).

오늘은 간단하게, 최근 번역된(그리고 앞으로 출간될) 세 권의 책, [테러 시대의 철학], [목소리와 현상](출간예정)과 [시선의 권리]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먼저 좋은 소식(아마도)에 관해 말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 주 초에 [테러 시대의 철학]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오반나 보라도리라는 철학자가 데리다와 하버마스를 각각 초빙해서 인터뷰를 하고, 이 사람들에 관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데리다와 하버마스라는 동시대의 두 거장, 더욱이 그동안 상이한 철학적 입장을 보여온 두 사람이 9, 11 테러라는 중대한 사건에 관해 견해를 밝힌 책이라는 점 때문에, 출간되기 전부터 영미권과 유럽 철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모은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데리다가 직접 저술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데리다가 현재의 국제정세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고, 또 하버마스의 견해와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섣불리 단정적으로 좋은 번역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또 번역자들 중 두 사람(한 분은 지방국립대의 전임교수로 재직중인 선배고, 다른 한 사람은 제 후배입니다)이 저하고 가까운 사람들이어서 오해를 살 염려도 있지만, 번역자들이 꼼꼼한 사람들이고 이미 다른 책들을 잘 번역한 경험들이 있어서 이 책의 번역도 잘 되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에 유학 중인 제 후배 한 명이 [목소리와 현상]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번역은 다 끝나고 이제 교열을 보고 있는데, 저에게도 원고를 보내줘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친구는 원래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고 석사논문으로 데리다의 후설비판을 다루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다 잘 하는 데다가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책을 석사논문 주제로 삼았으니, 국내에서는 이 책의 번역자로 더 이상의 적격자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원고를 읽어보니, 실제로 번역도 매우 공을 들인 좋은 번역이더군요.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데리다 한글본을 한 권 더 얻을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이상이 좋은 소식(아마도)이고, 다음은 나쁜 소식입니다.-_-;;; 지난 8월 20일경에 [한국출판인회의]에서 내는 [북 앤 이슈]라는 서평전문지에서 서평을 하나 부탁받았습니다. 바로 [시선의 권리]에 관한 서평인데요, 알고 보니까 이 단체는 한달에 한번씩 인문, 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대중문화와 예술, 실용, 청소년, 어린이 등의 분야에서 이 달의 책을 선정해서, 선정된 책에 관한 서평을 싣더군요. 인문 분야에서는 매달 6-7권 정도의 책을 선정하고 대중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는 2종 정도를 선정하던데, [시선의 권리]는 마침 9월의 책으로 선정되어, 저에게 서평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밀려 있는 일들 때문에 서평을 거절했는데, 담당자가 계속 권유하고, 또 지난 번에 마이페이퍼에서 이 책의 번역상태를 한번 점검해보겠노라고 약속까지 한 마당이어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번역을 검토해볼까 하는 생각에 서평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바쁜 일들 먼저 해결하고 지난 주부터, 강의 준비하는 틈틈이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참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지난 번에도 "역자 소개를 보니 번역한 분은 미술사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공부한 분이더군요. 번역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정황상 번역의 상태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 때의 예상, 그 때의 불안감은 그대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시선의 권리]라는 책은, 혹시 벌써 구입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벨기에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대해 데리다가 상당히 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리다의 이 '해설'이 상당히 난해하다는 점이지요. 데리다가 수사법과 논증을 교묘하게 뒤섞어서 활용한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지적한 적이 있지만, 이 '해설'은 이런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해설'은 문자로 된 텍스트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문자와는 상이한 이미지들의 연속적인 배치에 관한 '해설'이기 때문에, '해설'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는 더욱 어려움이 가중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데리다의 철학에 관해 상당한 식견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불어에 관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데리다의 언어유희에 관한 섬세한 주의력이 있어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까,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불어의 기본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제대로 번역될리가 있겠습니까? 데리다의 '해설'은 가상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짧은 문단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번역은 정말 페이지마다 오역이 있는 게 아니라, 오역이 없는 문단을 찾아보기가 어렵더군요. 한 가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역자가 달아놓은 70여개의 역주인데, 이 주들 대부분은 데리다의 논의맥락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내용이더군요. 겉보기에는 무언가 데리다의 심오한 논의를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현학적인 주이지만, 실제로는 데리다의 논의와 무관하고 오히려 내용을 더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역주들이었습니다.

역자도 문제이긴 하지만 출판사 역시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광고(사실은 터무니없는 광고이긴 하지만.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를 낼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그리고 역자에게 거의 불어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이를 몰랐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적어도 불어전공자 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이나 교정을 맡겨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이런 번역을 버젓이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허위과장광고 아래 팔아먹으려는 그 저의가 정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한국출판인회의라는 단체의 공신력 역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한다는 발상 자체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책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누가 보상할 건가요?

이래저래 1년만에 또다시 엉터리 데리다 번역본 때문에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어쨌든 서평을 모레까지 써서 보내고, 조만간 알라딘을 비롯한 몇 군데 인터넷 서점에 또 한번 험악한 서평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제가 걱정이 되는 건,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이제 데리다 번역본은 읽을 만한 게 못된다는 생각을 아주 굳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섣불리 서평을 실으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도서선정기관에서도 데리다는 아예 처음부터 선정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니 차라리 점잖게 한 마디 하는 걸로 그칠까요?

---그러길래, 뾰족한 도움도 못되고 쓸데없이 어렵기만 한 철학자에 뭐하러 그렇게 관심을 두고 혼자 분통을 터뜨리고 하냐? 모른 척하고,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소개하고 읽으면 될 것을, 쯧쯧 ...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누구? 네그리? 지젝??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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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0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마스님, 험한 평을 하시든, 점잖은 평을 하시든, 발마스님 응원합니다! ^^

참, 그리고 지난번에 지나는 말로 하신 주제의 강의록, 정말 궁금합니다.

balmas 2004-09-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이 응원해주시면 든든하죠.^^

그리고 [현대의 철학적 문명론]이라는 강의에 관해서는, 사실 별로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_-;), 다음에 한번 말씀드릴게요.

hoyami 2004-09-09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is name is Boradori? Really? Is he one of the Teletubbies? Haha. I've sent you an email, so please chek it!

balmas 2004-09-09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사실은 Borradori야. r자가 하나 더 붙지. 텔레토비 출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메일은 잘 받았어. 그런데 부탁할 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얻었으니까,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aporia 2004-09-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일도 많으신데 분통 터질 일이 생기셔서 걱정이군요.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불어를 못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리다를 번역하겠다고 나섰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네요. 그나저나 선생님의 불길한 예감은 그냥 예감에 그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이 나온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었거든요.
결국 선생님과 동료분들이 힘내시는 수 밖에 없겠군요. 저는 허접한 독자리뷰나마 올려서 이 책은 훌륭하다고 열심히 추천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법의 힘" 독자리뷰를 써야 하는데,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계속 미뤄지네요. 어쨌든 힘내세요!

릴케 현상 2004-09-1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나 문제가 많다니...

balmas 2004-09-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좀 문제가 많죠.
전 데리다 번역에서 이런 게 전형화되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예요.

릴케 현상 2004-09-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번역서만 읽는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얘기 들으면 좀 불안해져요. 그동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도 다 문제가 있는 것인데 내가 모르고 있나보다 하는...

balmas 2004-09-1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서 내용이 잘 이해가 되고 잘 넘어가면, 대개 그 책은 좋은 번역입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거나, 이해가 되다가 어느 대목에서부터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가 없다거나 하면 그건 대부분 오역 때문이죠.
그나저나 이런저런 번역본들 비판하면서 저도 늘 사람들에게 공연히 불안감만 주는 게 아닌지 마음에 걸립니다. 쉽지 않은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비판이 오히려 사람들의 독서의욕을 꺾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의 생산 및 소개와 유통이 겪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저런 번역본들(특히 고전이거나 좋은 책들)의 문제점과 좋은 점들은 전문가들이나 관련된 단체들에서 공정하게 평가를 해주어야 하는데, 신문 서평은 실용서나 취미교양서 위주로 흐른지 오래되었고, 전문가들은 업적에 들지도 않는 이런저런 서평들을 외면하고 있고, 책을 내는 (몇몇) 출판사들은 저작권을 전매하고서 형편없는 오역본들을 양산하고 있고 ... 그러니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통받는 건, 누가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책들을 읽어보겠다는 갸륵한 마음을 품은 교양독자층이죠.
전문적인 서평지가 하나 시작되어서 모범적으로 자리잡는다면, 이런 상황이 좀 타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누가 총대를 메야 하는데 ...

릴케 현상 2004-09-1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하긴 읽다가 모르겠는 부분이 나오면 그냥 내가 이해 못하나 보다 하고 피동적으로 읽는 태도를 고칠 수 있는 자극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능동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체크해서 번역에 이상이 있는 건지 나한테 이상이 있는 건지 한번 이상 생각해 볼 기회를 주니까요 앗! 추천했습니다.

balmas 2004-09-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긍정적인 자세 ... ^^
 

 

 

 
 
 
 
■진단: 고구려사 문제, 이렇게 돌파하자
'내것 네것' 역사인식 버려야…‘공동교과서’로 돌파 가능

2004년 09월 02일   김조영혜/강성민 기자 

요즘 언론을 보면 한중간 고구려 쟁탈전이 가파르게 전개되는 듯 보인다. 고구려 유적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중국이,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를 삭제하는 사건을 벌임으로써 한국의 반중정서가 폭발했고, 이에 따른 민족사 수호의 담론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고구려사가 전혀 정치쟁점화 돼있지 않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가타부타 말이 없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모종의 프로젝트에 돌입해 있고, 고구려 유산 유네스코 등재시도를 했으며, 외교부 홈페이지 ‘삭제’ 사건을 벌였다는 것뿐이다. 이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교육사학)는 “중국에 비해 한국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라며 “문제가 됐던 북경대 교재는 교수들이 집필한 것으로, 시각의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중고교 교과서에는 고구려사 왜곡은 발견된 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교수가 올해 초 동북공정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경사지 연구센터 대표와의 면담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물론 이것을 중국을 대변하는 입장으로 간주할 수는 없고 당연히 고구려사를 탐내는 중국의 정치적 시도도 충분히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得’보다 ‘失’이 많은 반중담론

문제는 지금처럼 ‘과열된’ 반중담론으로는 문제가 더욱 꼬인다는 점이다. 우선 고구려사와 관련해 우리 사회에 정확한 정보를 추구하는 ‘공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설과 추측을 바탕으로 중국의 입장을 해석하고 즉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보민주주의가 진척된 나라가 취할 태도인지 의문스럽다. 둘째, 중국과의 외교관계 악화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이다. 무역량과 상호투자가 가장 활발한 인접 교역국인 중국은 동북아 경제단위를 위한 교섭의 대상이기도 한지라 앞으로 ‘대화’할 일이 많은데 너무 무모하게 중국을 압박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고구려는 우리 것이라는 인식이 갖는 위험성이다. 역사는 언제든지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모든 역사적 문헌이 역사가의 선택과 배제에 의한 ‘기록’이며, 근대 이후에 확립된 우리의 ‘민족사’ 역시 이런 ‘기록’들의 얼개에 철학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덧입힌 ‘창조적 해석’의 산물이라는 것은 홉스봄이나 이성시 같은 학자들의 책을 통해 무수히 제기돼온 주장이지만, 이에 대한 사회 일반의 학습수준이 매우 낮다는 점은 불행한 일로 비치기도 한다. 특히 두 민족이 맺어온 ‘관계사’를 논하는 것은 가장 뜨거운 해석의 대결을 낳을 수밖에 없음을 세계 각국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음에도, 변경사에 대한 학술적 논쟁을 무조건 ‘역사왜곡’ 내지 ‘약탈’로 간주하는 태도는 합리적으로 비치지 않을 뿐 아니라, 국익적 차원에서도 올바르지 못하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역사이론)는 “민족의 틀에 맞춰 고구려사를 봐서는 안 된다”라며 “국가의 개념이 없었던 동아시아 고대사는, 동아시아의 범주에서 봐야한다”라고 강조한다.


사실 고구려사가 한국사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에 대한 중국의 무관심 때문일 공산이 크다. 과거에는 고구려가 한국 것이든 아니든 상관않던 중국이 최근 들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한국 측에서 ‘역사’ 차원이 아닌 ‘영토’ 차원의 문제제기가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지난 2001년 만주를 한국땅으로 회복하려 했던 한국 민간단체의 움직임이 대표적 사례다. 현재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문제를 촉발한 것이 만주 회복 운운했던 한국”이라는 것이며, “고구려사 문제는 학술문제이므로 학술적으로 해결하자”라는 것이다. 간도니, 만주니 하며 타국 학자들이 자국의 영토에 들어와 역사유적을 뒤지고 다니니, 변방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아온 ‘통일제국’으로서는 옛날의 콤플렉스가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에 대한 타진은 현재 학계나 언론계 어디에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학술적 문제’라는 중국의 선언은 상당히 위협적 발언이다. 지금부터라도 ‘고구려’라고 불리는 영역에 대한 고고학적 역사탐사를 시도해 자신들 민족사의 허술한 빈틈을 메우겠다는 것인데, 고구려 유적들이 중국의 영토에 속해있는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사수 작전’으로 한국이 중국을 방어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유럽의 역사분쟁 해결을 모델로 삼아야

이에 따라 한국의 과민대응은 외교적으로 유리할 게 없고,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학술적으로 해결할 일을 국가간의 외교문제로 돌려놓으면, 급한 쪽이 손해를 본다”라는 것.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사)는 “영국의 초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인도가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던 20세기사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인도에서는 영국 교과서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자국의 역사는 자국이 기록하면 되지, 타국 교과서가 어떻든 관심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것. 굳이 인도의 예가 역사왜곡 해결의 정답은 될 수 없어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최영태 전남대 교수(독일사)는 “일제 식민지 경험 때문에 갖게 된 반일감정을, 고구려사 문제에 끌어들여 동일한 비중의 반중감정으로 국민정서를 몰아갔을 때, 한국은 인접국가 사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최 교수는 또한, 역사논쟁을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해 정치분쟁화 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들이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충동시키는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는 한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며 설명했다. “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불신풍조”가 문제라는 것. 한중일은 한자 문화권이란 공통점과 지리적 근접성이 있음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상호존중과 평화공영을 지향하는 문화적 신뢰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전쟁 가해자인 독일이 나서 평화의지를 천명하고 역사왜곡 등의 문제를 해결한 유럽연합에 비해 상황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과민반응’에 대한 합리화가 국익을 챙겨줄 수는 없다. 중국이 ‘공식적’ 입장으로 제시한 ‘학술적 해결’을 일단 액면 그대로 수용해, 학술적 대화의 틀과 구조를 우리가 먼저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가 더 이상 정치쟁점화되는 것을 막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에 전문가들의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가 오랜 역사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문화협정’을 맺고 오랜 시일에 걸쳐 ‘교과서 공동 출판’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는 역사 및 지리 교과서 개정을 위해 공동위원회를 구성, 20여년에 걸쳐 정기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양국 학자들의 빈번한 학술교류로 공동 교과서를 집필한 바 있다. 또한 유럽사 연구와 관련해, 국가마다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1992년 유럽 12개국의 교수들이 모여, ‘새 유럽의 역사’(프레데리크 들루슈 지음, 윤승준 옮김, 까치 刊, 2000)를 펴내기도 했다.


이를 볼 때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는 자신들의 ‘민족사’를 벗어나 ‘동아시아사’를 함께 창출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대화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물론 중국과 일본이 그에 협조적일 지는 모르지만, 학계나 민간 차원에서는 충분히 그런 교섭을 시도할 기반이 있다. 실제로 한중일 3국의 역사교과서 공동집필은 이미 진행중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익적 관점의 역사교재 출판에 대응하기 위해 3국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 역사 공동 독본’이라는 중학교 역사 교재를 개발 중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내년 5월 한중일 3개국 언어로 동시에 출판, 발행될 예정이다.


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제한국문화홍보센터에서는 오는 7일부터 북경사범대학 출판사 관계자들을 초빙해 중국 교과서 개선방향에 대해 집중 논의할 계획이다. 역사왜곡 문제를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해결하기보다 ‘심의제’인 중국의 현 교과서체제에 맞게 각 지역과 출판사별로 직접 접촉, 구체적 협의를 나누고 장기적인 협의체를 구성하는 게 양국의 역사충돌을 막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의 언론들이다. 여론 부추기에만 여념이 없는 감정적인 칼럼들, 학자들조차 행동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들을 펼치고, 중국의 움직임을 무슨무슨 '작전'이라는 듯 군사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어휘들을 사용해 '일'을 키우기만 하고 있다.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학계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런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얼마나 널리 알려지고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유럽의 사례에서 엿본 역사분쟁의 해결
학문적 대화로 풀어야

2004년 09월 02일   김조영혜 기자 

세계 어느 곳도 역사분쟁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국경은 세계사의 전개와 더불어 무수히 바뀌어왔고 그에 따른 밀고 당기기는 과거에는 전쟁의 형태로, 오늘날에는 외교적 분쟁으로 끊이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의 유럽도 지금의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독일-폴란드, 독일-프랑스 사이에 오랜 영토마찰이 있었고, 각국 교과서에서 자국 중심의 역사서술을 하면서 수많은 왜곡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현안을 놓고 인접국들과 협력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역사를 갖고 마냥 싸울 순 없었다. 득보다 실이 많은 탓이다. 앞날을 계산해본 독일, 프랑스, 폴란드는 서로간의 합의를 모색하게 됐다.


그 합의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일단 각국의 학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만나서 문제가 되는 쟁점을 가지고 토론을 했다. 국정교과서 체제가 아니었던 당시의 사정을 볼 때 이는 수많은 교재들을 상호검토해서 서로 다른 부분을 찾아내, 그것을 절충하거나 양보하는 일이었다. 독일-프랑스 같은 경우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1789년부터 1925년까지의 양국 관계사에서 39개 부분을 합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또 그 합의안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는 없었다. 독일-폴란드는 10여년에 걸친 지난한 신뢰 구축기간이 필요했다. 대표단이 구성돼서도 17년 동안 9번 회의를 했고 1977년에야 양국어로 된 ‘서독과 폴란드의 역사 및 지리교과서를 위한 권고안’이 마련됐다. 여기엔 문제가 되는 교과서의 ‘각 부분’을 양국의 합의 아래 ‘재서술한’ 구체적인 예시가 담겨져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치적 합의는 이뤘지만, 그걸 문화적 합의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권고안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온 학자들은 자국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했는데, 교과서를 집필하는 학자들, 출판사들,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고맙다’며 권고안을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각국에서 또 ‘말도 안된다’는 식의 다양한 불만이 제기됐고, 문제는 더욱 불거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 및 뜻있는 학자들은 지치지 않고, 새롭게 도출된 논의사항들을 가지고 만났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간차원에서의 정례화된 학술적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해가 되풀이 되면서 ‘권고안’ 초판은 여러차례 수정을 거듭했고, 바뀌어진 내용들은 교과서에 반영돼 갔다. 볼프강 야콥마이어의 ‘권고안 발표 이후 독일에서의 역사교재 변화’라는 논문을 보면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 간 역사분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유럽은 EU체제를 추진하면서 ‘공동교과서’의 필요성을 더욱 느꼈는지, 이런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2년에는 ‘새 유럽의 역사’라는 유럽연합판 새 역사교과서를 펴내기도 했다. 이는 12개국 역사학자들이 모여 유럽의 역사를 균형감 있게 서술한 것이다.


이런 결과는 유네스코의 중재가 개입한 상태였지만, 분쟁 당사자들의 열린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역사를 '소유물'로 바라보던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했고, 역사라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더 넓은 차원의 동의를 얻어 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유럽의 사례는 한국의 상황에 비춰볼 때 매우 시사적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경제공동체 추진, 최근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의 활발해진 교류 등의 상황을 지켜볼 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이 꼭 ‘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참고자료 : 한국교육개발원 ‘독일-폴란드 교과서 협의사례연구, 정영순 외 2인 2002년 / 한일간 역사왜곡 갈등과 유럽에서의 평화를 위한 역사교육, 정영순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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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에 서서] 노무현과 차베스 - 오늘의 사회개혁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더러 마주치게 되는 외국인이 당신들 나라의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럴 때 나는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짐작이 될 것이라고 답한 일들이 있다. 그것은 두 대통령이 똑같이 시장 경제의 방종에 고삐를 매고자 하는 진보적 정책을 추진할 정치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진보정책은 공산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적 사회 개혁 방안까지도 쉽게 차용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적 상황 속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진보정책이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야당이 발의한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겪어야 했는데, 이것까지도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와 비슷한 것이 되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버텨낸 것처럼 차베스 대통령도 지난 8월15일의 국민투표에서 58.25%라는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자신의 지위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개혁의지 ‘닮은꼴 다른 길’-

물론 두 대통령 사이에는 유사점과 동시에 차이점도 있다. 한 나라의 사정이란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또 그곳에서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국민투표 전후의 외지들의 보도는 대체로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그의 탄탄한 업적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5년여의 집권 기간중 그가 추구한 것은 사회개혁이었다. 대지주 독점 농지 소유제의 형평화, 주택환경과 의료환경의 개선, 문맹퇴치 운동을 중심으로 한 교육 혜택의 확산-이러한 것들이 그의 정부의 주된 목표들이었다. 여기에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던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어떤 통계에 의하면, 베네수엘라의 빈곤층은 인구의 70%에 이른다.)

그러나 핵심은 사회 발전에 두면서도 차베스 정책은 더 넓은 의미에서의 국가의 균형 발전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수력 발전을 위한 댐의 건설, 철도 시설의 개선과 확장, 새로운 국영 항공사 설립과 같은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도 정부 정책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직접적으로 사회적 위상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경험한 빈곤층은 물론 그 외에도 국가의 조화된 발전을 생각하고 또 그 장애물의 하나로 사회적 불균형을 걱정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많았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차베스 정부가 실질적인 업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뒷받침할 만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냉소적 관찰은 그간 세계를 휩쓴 석유 값의 폭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베네수엘라는 중동이나 러시아에 비교되는 산유국가로서, 그 석유매장량은 중동 최대의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맞먹는다고 한다. 이러한 나라에 그간 치솟은 석유 값이 거대한 세수 잉여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러나 찾아온 행운을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베스 정부는 처음부터 사회발전을 위한 자원이 석유와 같은 국가 기간산업에 의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책은 출발부터 석유 수입의 막대한 부분을 독점하던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외국 석유 회사의 전횡을 견제하고 수입의 보다 많은 부분으로 하여금 베네수엘라 정부의 통제 하에 있는 페트롤레오스 데 베네수엘라 회사로 넘어오게 하고 그것을 사회정책의 자금으로 활용할 것을 겨냥했었다. 그러면서도 국가 발전을 위하여서는 계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외국 회사들을 완전히 소외시키지 않도록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 투자자들의 계속적인 투자를 호소하였다. 이러한 준비가 석유가의 상승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사회의 모든 문제가 얼마간의 사회 정책으로 다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현상에 대한 보도는 부패, 실업, 치안불안 등의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 베네수엘라가 완전히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울는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제도이면서 사회 기풍이다. 사법제도의 조종, 그리고 격렬한 선동적 언어에 의한 위협 분위기의 조성 등이 정치공작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것도 지적되고, 차베스 대통령의 인품은 대체적으로 ‘거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차베스 정부의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는 확실한 것으로 말하여진다. 지난번의 국민투표 직전에는 영국의 정치인 토니 벤(노동당 전 의원)과 켄 리빙스턴(런던 시장), 그리고 지식인 해럴드 핀터와 에릭 홉스봄을 포함한 국제적인 인사들이 지지성명을 발표하였고, 국민투표 이후에는 지미 카터가 이끄는 국제 감시단이 투표의 공정성을 확인하였다.

-차베스 ‘비전’ 현실화 착착-

우리나라의 형편으로 돌아와 볼 때, 우리는 차베스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비슷한 점과 함께 차이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되풀이하여 말하건대, 두 정부는 두 나라의 역사적 궤적에서 기묘하게 비슷한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점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 주변의 인사들도 사회정책에 대한 의지를 엿보이게 하는 발언들을 많이 하였지만, 엿보일 뿐인 정서는 하나의 정치적 비전으로 통합되지 않았고, 일관된 정책으로 추구되지도 아니하였다. 지금의 정부가 서민 생활을 위한 시책을 펴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어떤 종합적 삶의 이상으로 또는 오늘의 시점에서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한 방안으로 제시된 바는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정한 간격으로 발표된 거대 계획들-국민 개인 소득 2만달러 달성, 수도 이전, 동북아 경제 거점 건설, 과거사 청산 등과 같은 것들이 이 정부가 생각하는 주요 과제들이었다. 이러한 추상적으로 들리는 과제들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알기 어려운 것은 이것들이 종합적으로 어떻게 오늘의 삶에 관계되고 또 미래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정부의 일들을 하나의 사회 투시도로서 납득할 수 있게 해주고 우선순위를 알 수 있게 하는 일관된 비전이다. 물론 이것은 현실에 밀착되고 그 관점에서 타당성을 가진 것이라야 한다.

-참여정부 실천결여 ‘차이’-

베네수엘라와 한국의 처지가 같을 수는 없다.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차이는 크고 두 나라의 국민이 원하는 삶의 이상도 매우 다른 것일 것이다. 그러니 해야 할 일도 전혀 다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베네수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한국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아마 그렇게 되어도 아니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나 이념보다는 오늘의 현실에 작용하는 것이 정치라는 점에서는 두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같다고 할 것이다. 이번의 베네수엘라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나온 보도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진보적 성향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차베스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유사하지만, 차베스 정권이 나라의 현실을 일정한 장래로 묶어주는 총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우리 정부는 집권 2년에 가까이 가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그러한 현실적 계획을 제시 또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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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9-02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우창 선생이 아직 노무현 정권에 대해 모종의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한데,
어쨌든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통과 관건…"양질 교육 의문"
분석 - 美 조지워싱턴대, 교육개방 신호탄 될까

2004년 08월 30일   김봉억 기자 

지난 16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이 제주도 및 남제주군과 함께 '제주-GWU캠퍼스타운'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함에 따라 교육개방이 본격화되는 첫 사례가 될지 주목을 받고 있다.

제주도 남제주군은 지난 24일 조지워싱턴대학 제주캠퍼스 조성을 위한 행정지원단을 구성해 본격 운영에 들어가 전폭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남제주군은 부군수 직속에 총괄지원팀과 투자지원팀을 두고 1백15만평의 군유지 무상임대 준비와 캠퍼스 후보지에 대한 투자진흥지구 지정 작업을 해나갈 계획이다.

캠퍼스 후보지로 선정된 대정읍 구억리 산1 일대 17필지의 군유지에 대해서는 유치확정시 까지 일체의 대부와 처분도 금지시켰다.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싱가폴분교의 모습. 최근 OECD가 교육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는 교육제도는 대학시스템의 협력부재로 내실이 결여돼 있으며 해외에 분교를 설립했던 일부 대학들이 교육의 질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홈페이지

제주도, '행정지원단'구성 전폭지원
지난 해 6월부터 지금까지 세차례나 제주도를 방문해 분교 설립 의사를 타진해 왔던 조지워싱턴대는 아시아지역의 학생들을 유치할 지역을 물색중이다.

조지워싱턴대가 최근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경제자유구역 및 제주국제 자유도시의 외국교육기관 설립·운영에 관한 특별법(이하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지난 6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됨에 따라 제주도 쪽이 다양한 행·재정적 지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학교를 쉽게 설립할 수 있고, 이익금 송금도 가능해져 호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현행법상 국내에 외국교육기관을 설립할 수는 있지만 국내 교육기관과 동일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고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지만 이익금을 본교로 송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직 외국대학 분교가 설립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하지만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제정되면 건물을 임차해 학교시설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익금을 '결산 잉여금'명목으로 본교로 송금이 가능해 진다.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통과여부가 관건
결국, 조지워싱턴대의 제주분교 설립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의 통과여부에 따라 실현 가능성을 따져 볼 수 있다.

전국교수노조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이 소속된 '교육개방 저지와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범국민교육연대' 등 교육단체들은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통과 저지를 비롯해 WTO·FTA 협상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이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공청회 때부터 제기해 왔던 수익금의 해외송금, 내국인 입학허용, 학력인정 등 '3대 독소조항'에 대한 신중한 검토작업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외국교육기관의 영리추구 편의를 위해 구성돼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교육을 통한 '영리추구'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조지워싱턴대의 제주분교 설립이 계획대로 이뤄질 경우 다른 외국대학 유치도 잇따를 전망이다.

이미 무산 위기에 놓였던 제주도 남제주군의 스위스 DCT관광호텔대학교의 유치가 다시 추진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남제주군에 따르면 스위스 DCT관광호텔대학 제주분교 설립 및 레저단지 조성에 관심을 보였던 서울 이스턴개발(주)이 사업의향을 포기하자 (주)제주SMS가 대신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사업시행자 지정 신청서를 제주도에 제출한 것.

지난 해 6월 30일을 기준으로 해외 유학생수가 15만 명을 넘어서 한국 유학생 유치에 적극적인 미국, 호주 등 외국대학의 국내 진출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미 미국, 호주, 뉴질랜드, 중국, 대만 등의 나라는 지난 해 WTO 교육서비스 분야에 대학교육과 성인교육, 직업교육 등의 개방을 요구해 놓은 상태다.

"최근 아시아지역 기업형 외국대학 많아"
문제는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외국대학이 들어오겠냐는 것이다. 대학·교육의 질은 우수한 교수진에 달려 있는데 본교의 우수 교수진을 외국에 보낼지는 의문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교육학과)는 "백번양보해 교육개방이 이뤄진다손 치더라도 가장 중요한 건 교수진"이라면서 "본교에서 교수를 데려 올 경우 최소 1인당 15만 불로도 힘들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또 "지난 10년 동안 새로 설립된 아시아지역 대학 가운데 대부분이 기업형 대학"이라며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완결성 있는 대학의 면모를 갖추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재홍 영남대 교수(법학과)도 "공교육은 해당 국가가 책임지는 것인데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을 외국교육기관에 맡긴다면 엉망이 될 공산이 크다"고 진단했다.

"외국대학 분교, '유학생 유치 통로'될 것"
또 외국대학 분교가 유학생 유출을 막기 보다 오히려 외국대학 본교의 한국 유학생 유치 통로로 활용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제주도 쪽에서도 "조지워싱턴 대학이 우수학생 유치를 위해 1∼2년을 제주에서 마치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겠느냐"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외국대학 분교는 해외 유학의 준비단계로 여겨질 수 있다.

'인터내셔널 하이어 에듀케이션'은 2002년 가을호에서 호주 모나시대학 국제업무공무원 그랜트 맥버니씨도 "호주대학의 해외대학분교 사업은 재정적인 면과 수출산업으로서 교육 기업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하다보니 무리한 학습왜곡이 있다"며 "국내환경과는 상당히 다른 관리체제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고 적절하게 통제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가 경고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2004 Kyosu.net
Updated: 2004-08-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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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9월 01일 (수)
제 2646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최저생계 보장할 수 없는 최저생계비

"현재의 최저생계비로 먹고사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폭을 점점 좁아지게 만들고 결국엔 고립된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난 7월 진행된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희망UP' 캠페인에 함께 했던 참가자의 소감이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는 1999년 이후 5년만에 실시되는 최저생계비 계측조사를 앞두고 31일 '최저생계비의 현실과 적정화 방안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최저생계비는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최소한의 비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 1인 가구에 36만 8226원, 4인 가구에는 105만 5090원이 책정돼있다. 1인 가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 한 달 보건의료비는 1만 7463원, 교통통신비는 2만 2878원에 지나지 않는다. 동덕여대 남기철 가정복지학과 교수는 "최저생계비 금액이 비현실적으로 적은 액수"라며 "특히 보건의료비, 교통통신비 등은 실제 가구의 지출에 기초하지 못한 터무니없는 액수"라고 주장했다.

순천향대 허선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최저생계비가 △지역별 물가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점 △장애인이나 환자 등 가구유형별 특성이 반영되지 못하는 점 △실제 수급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1·2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상대적으로 더 낮은 점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일반가구의 생활수준과 상대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저생계비가 계측돼야 한다"며 일반 가구의 가구소득·가계지출·소비지출에 따른 비율로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 토론회 참가자들은 의료비, 교육비, 주거비 등 국가가 복지분야에서 직접 담당해야 하는 부분을 최저생계비 항목에서 분리시켜 최저생계비 계측 시 발생하는 형평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토론회는 빈곤한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인권적 접근은 부족했다. 토론을 지켜본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 유의선 사무국장은 "최저생계비는 금액으로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실질적인 생계를 사회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지만 "이번 토론회가 최저생계비에만 국한되어 다양한 측면에서 빈곤계층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박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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