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고구려사 문제, 이렇게 돌파하자
'내것 네것' 역사인식 버려야…‘공동교과서’로 돌파 가능

2004년 09월 02일   김조영혜/강성민 기자 

요즘 언론을 보면 한중간 고구려 쟁탈전이 가파르게 전개되는 듯 보인다. 고구려 유적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중국이,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를 삭제하는 사건을 벌임으로써 한국의 반중정서가 폭발했고, 이에 따른 민족사 수호의 담론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고구려사가 전혀 정치쟁점화 돼있지 않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가타부타 말이 없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모종의 프로젝트에 돌입해 있고, 고구려 유산 유네스코 등재시도를 했으며, 외교부 홈페이지 ‘삭제’ 사건을 벌였다는 것뿐이다. 이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교육사학)는 “중국에 비해 한국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라며 “문제가 됐던 북경대 교재는 교수들이 집필한 것으로, 시각의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중고교 교과서에는 고구려사 왜곡은 발견된 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교수가 올해 초 동북공정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경사지 연구센터 대표와의 면담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물론 이것을 중국을 대변하는 입장으로 간주할 수는 없고 당연히 고구려사를 탐내는 중국의 정치적 시도도 충분히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得’보다 ‘失’이 많은 반중담론

문제는 지금처럼 ‘과열된’ 반중담론으로는 문제가 더욱 꼬인다는 점이다. 우선 고구려사와 관련해 우리 사회에 정확한 정보를 추구하는 ‘공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설과 추측을 바탕으로 중국의 입장을 해석하고 즉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보민주주의가 진척된 나라가 취할 태도인지 의문스럽다. 둘째, 중국과의 외교관계 악화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이다. 무역량과 상호투자가 가장 활발한 인접 교역국인 중국은 동북아 경제단위를 위한 교섭의 대상이기도 한지라 앞으로 ‘대화’할 일이 많은데 너무 무모하게 중국을 압박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고구려는 우리 것이라는 인식이 갖는 위험성이다. 역사는 언제든지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모든 역사적 문헌이 역사가의 선택과 배제에 의한 ‘기록’이며, 근대 이후에 확립된 우리의 ‘민족사’ 역시 이런 ‘기록’들의 얼개에 철학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덧입힌 ‘창조적 해석’의 산물이라는 것은 홉스봄이나 이성시 같은 학자들의 책을 통해 무수히 제기돼온 주장이지만, 이에 대한 사회 일반의 학습수준이 매우 낮다는 점은 불행한 일로 비치기도 한다. 특히 두 민족이 맺어온 ‘관계사’를 논하는 것은 가장 뜨거운 해석의 대결을 낳을 수밖에 없음을 세계 각국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음에도, 변경사에 대한 학술적 논쟁을 무조건 ‘역사왜곡’ 내지 ‘약탈’로 간주하는 태도는 합리적으로 비치지 않을 뿐 아니라, 국익적 차원에서도 올바르지 못하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역사이론)는 “민족의 틀에 맞춰 고구려사를 봐서는 안 된다”라며 “국가의 개념이 없었던 동아시아 고대사는, 동아시아의 범주에서 봐야한다”라고 강조한다.


사실 고구려사가 한국사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에 대한 중국의 무관심 때문일 공산이 크다. 과거에는 고구려가 한국 것이든 아니든 상관않던 중국이 최근 들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한국 측에서 ‘역사’ 차원이 아닌 ‘영토’ 차원의 문제제기가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지난 2001년 만주를 한국땅으로 회복하려 했던 한국 민간단체의 움직임이 대표적 사례다. 현재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문제를 촉발한 것이 만주 회복 운운했던 한국”이라는 것이며, “고구려사 문제는 학술문제이므로 학술적으로 해결하자”라는 것이다. 간도니, 만주니 하며 타국 학자들이 자국의 영토에 들어와 역사유적을 뒤지고 다니니, 변방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아온 ‘통일제국’으로서는 옛날의 콤플렉스가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에 대한 타진은 현재 학계나 언론계 어디에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학술적 문제’라는 중국의 선언은 상당히 위협적 발언이다. 지금부터라도 ‘고구려’라고 불리는 영역에 대한 고고학적 역사탐사를 시도해 자신들 민족사의 허술한 빈틈을 메우겠다는 것인데, 고구려 유적들이 중국의 영토에 속해있는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사수 작전’으로 한국이 중국을 방어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유럽의 역사분쟁 해결을 모델로 삼아야

이에 따라 한국의 과민대응은 외교적으로 유리할 게 없고,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학술적으로 해결할 일을 국가간의 외교문제로 돌려놓으면, 급한 쪽이 손해를 본다”라는 것.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사)는 “영국의 초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인도가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던 20세기사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인도에서는 영국 교과서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자국의 역사는 자국이 기록하면 되지, 타국 교과서가 어떻든 관심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것. 굳이 인도의 예가 역사왜곡 해결의 정답은 될 수 없어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최영태 전남대 교수(독일사)는 “일제 식민지 경험 때문에 갖게 된 반일감정을, 고구려사 문제에 끌어들여 동일한 비중의 반중감정으로 국민정서를 몰아갔을 때, 한국은 인접국가 사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최 교수는 또한, 역사논쟁을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해 정치분쟁화 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들이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충동시키는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는 한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며 설명했다. “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불신풍조”가 문제라는 것. 한중일은 한자 문화권이란 공통점과 지리적 근접성이 있음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상호존중과 평화공영을 지향하는 문화적 신뢰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전쟁 가해자인 독일이 나서 평화의지를 천명하고 역사왜곡 등의 문제를 해결한 유럽연합에 비해 상황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과민반응’에 대한 합리화가 국익을 챙겨줄 수는 없다. 중국이 ‘공식적’ 입장으로 제시한 ‘학술적 해결’을 일단 액면 그대로 수용해, 학술적 대화의 틀과 구조를 우리가 먼저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가 더 이상 정치쟁점화되는 것을 막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에 전문가들의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가 오랜 역사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문화협정’을 맺고 오랜 시일에 걸쳐 ‘교과서 공동 출판’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는 역사 및 지리 교과서 개정을 위해 공동위원회를 구성, 20여년에 걸쳐 정기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양국 학자들의 빈번한 학술교류로 공동 교과서를 집필한 바 있다. 또한 유럽사 연구와 관련해, 국가마다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1992년 유럽 12개국의 교수들이 모여, ‘새 유럽의 역사’(프레데리크 들루슈 지음, 윤승준 옮김, 까치 刊, 2000)를 펴내기도 했다.


이를 볼 때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는 자신들의 ‘민족사’를 벗어나 ‘동아시아사’를 함께 창출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대화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물론 중국과 일본이 그에 협조적일 지는 모르지만, 학계나 민간 차원에서는 충분히 그런 교섭을 시도할 기반이 있다. 실제로 한중일 3국의 역사교과서 공동집필은 이미 진행중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익적 관점의 역사교재 출판에 대응하기 위해 3국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 역사 공동 독본’이라는 중학교 역사 교재를 개발 중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내년 5월 한중일 3개국 언어로 동시에 출판, 발행될 예정이다.


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제한국문화홍보센터에서는 오는 7일부터 북경사범대학 출판사 관계자들을 초빙해 중국 교과서 개선방향에 대해 집중 논의할 계획이다. 역사왜곡 문제를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해결하기보다 ‘심의제’인 중국의 현 교과서체제에 맞게 각 지역과 출판사별로 직접 접촉, 구체적 협의를 나누고 장기적인 협의체를 구성하는 게 양국의 역사충돌을 막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의 언론들이다. 여론 부추기에만 여념이 없는 감정적인 칼럼들, 학자들조차 행동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들을 펼치고, 중국의 움직임을 무슨무슨 '작전'이라는 듯 군사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어휘들을 사용해 '일'을 키우기만 하고 있다.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학계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런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얼마나 널리 알려지고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유럽의 사례에서 엿본 역사분쟁의 해결
학문적 대화로 풀어야

2004년 09월 02일   김조영혜 기자 

세계 어느 곳도 역사분쟁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국경은 세계사의 전개와 더불어 무수히 바뀌어왔고 그에 따른 밀고 당기기는 과거에는 전쟁의 형태로, 오늘날에는 외교적 분쟁으로 끊이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의 유럽도 지금의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독일-폴란드, 독일-프랑스 사이에 오랜 영토마찰이 있었고, 각국 교과서에서 자국 중심의 역사서술을 하면서 수많은 왜곡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현안을 놓고 인접국들과 협력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역사를 갖고 마냥 싸울 순 없었다. 득보다 실이 많은 탓이다. 앞날을 계산해본 독일, 프랑스, 폴란드는 서로간의 합의를 모색하게 됐다.


그 합의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일단 각국의 학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만나서 문제가 되는 쟁점을 가지고 토론을 했다. 국정교과서 체제가 아니었던 당시의 사정을 볼 때 이는 수많은 교재들을 상호검토해서 서로 다른 부분을 찾아내, 그것을 절충하거나 양보하는 일이었다. 독일-프랑스 같은 경우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1789년부터 1925년까지의 양국 관계사에서 39개 부분을 합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또 그 합의안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는 없었다. 독일-폴란드는 10여년에 걸친 지난한 신뢰 구축기간이 필요했다. 대표단이 구성돼서도 17년 동안 9번 회의를 했고 1977년에야 양국어로 된 ‘서독과 폴란드의 역사 및 지리교과서를 위한 권고안’이 마련됐다. 여기엔 문제가 되는 교과서의 ‘각 부분’을 양국의 합의 아래 ‘재서술한’ 구체적인 예시가 담겨져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치적 합의는 이뤘지만, 그걸 문화적 합의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권고안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온 학자들은 자국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했는데, 교과서를 집필하는 학자들, 출판사들,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고맙다’며 권고안을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각국에서 또 ‘말도 안된다’는 식의 다양한 불만이 제기됐고, 문제는 더욱 불거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 및 뜻있는 학자들은 지치지 않고, 새롭게 도출된 논의사항들을 가지고 만났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간차원에서의 정례화된 학술적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해가 되풀이 되면서 ‘권고안’ 초판은 여러차례 수정을 거듭했고, 바뀌어진 내용들은 교과서에 반영돼 갔다. 볼프강 야콥마이어의 ‘권고안 발표 이후 독일에서의 역사교재 변화’라는 논문을 보면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 간 역사분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유럽은 EU체제를 추진하면서 ‘공동교과서’의 필요성을 더욱 느꼈는지, 이런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2년에는 ‘새 유럽의 역사’라는 유럽연합판 새 역사교과서를 펴내기도 했다. 이는 12개국 역사학자들이 모여 유럽의 역사를 균형감 있게 서술한 것이다.


이런 결과는 유네스코의 중재가 개입한 상태였지만, 분쟁 당사자들의 열린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역사를 '소유물'로 바라보던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했고, 역사라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더 넓은 차원의 동의를 얻어 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유럽의 사례는 한국의 상황에 비춰볼 때 매우 시사적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경제공동체 추진, 최근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의 활발해진 교류 등의 상황을 지켜볼 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이 꼭 ‘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참고자료 : 한국교육개발원 ‘독일-폴란드 교과서 협의사례연구, 정영순 외 2인 2002년 / 한일간 역사왜곡 갈등과 유럽에서의 평화를 위한 역사교육, 정영순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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