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의 태동, 밝혀지는 '마음'의 신비들
연구경향_뇌과학의 혁명(上)

2004년 09월 03일   이상훈 서울대 

약 70년 전 캐나다 몬트리얼에 있는 한 병원의 수술실. 당대의 노련한 뇌수술 전문의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는 두개골이 열려 뇌를 활짝 드러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간질환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간질의 진원지를 찾아 뇌 표면의 이곳저곳을 전극으로 조심스레 찌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측두엽-관자놀이 쯤에 위치한 뇌의 한 영역-의 한 부위를 자극했을 때 갑자기 간질환자가 중얼거렸다. “난 지금 부엌에 앉아 있는데 내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요. 그 아이는 길가의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자동차들이 많이 지나다녀 위험한 것 같아 걱정돼요.” 자신의 귀를 의심한 펜필드는 다시 한 번 똑같은 뇌 영역에 전류를 흘렸다. 놀랍게도 환자는 똑같은 경험을 보고했다. 마치 자동응답기의 단추를 누르듯 펜필드는 특정한 기억흔적을(engram) 지닌 뉴런들을 자극하여 생생한 기억을 불러낸 것이다.

마음의 자리는 뇌다

마음의 사건을 물리적으로 촉발한 펜필드의 실습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마음은 뇌의 활동”임을 강력하게 예시하고 있다. 당연하게 들리는 이 명제는 최근에야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며, 그러기 위해 고단한 논쟁과 발견들의 축척을 거쳐야만 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영혼의 장소로 여겨 죽은 이의 심장을 미라로 만든 반면, 두개골 속의 뇌는 파내어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뇌를 마음의 장소인 심장이 활동할 때 발생하는 열을 식히는, 일종의 냉각기라 생각했으며, 데까르뜨는 영혼은 물질로 환원될 수 없으며 松科腺(pineal gland)을 통해 물질적 육체와 교신한다고 보았다.


마음의 장소가 뇌라는 사실은 철학자들의 상상력과 논리학으로 정립된 것이 아니었고 실험 현장에서 과학자들의 체계적 관찰을 통해 혹은 우연히 얻어 낸 발견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대한 ‘과학’이 시작된 시점은, 마음이 뇌라는 물질적 기반위에 존재하는 것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이며, 이는 곧 근대 뇌과학의 출발인 셈이다.

“마음의 자리는 뇌다”라는 명제는 뇌과학의 시작일 뿐, 뇌과학의 목표라 할 마음과 행동의 물질적 기초를 밝히는 것은 어마어마한 노력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다. 뇌는 비전문가의 눈에 그저 1400cc의 크기와 1.4kg 정도의 무게를 지닌 주름지고 뚱뚱한 두부덩이 같아 보인다. 그러나 뇌에는 약 1010~13개의 뉴런들과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더 많은 수의 신경다발들이 있으며, 이들은 복잡하게 변화하는 분자생물학적, 화학적 환경에서 활동한다.

뇌의 뉴런들과 신경망들에서 벌어지는 전기화학적 활동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복잡하고 다양하기 이를데없는 마음과 행동의 측면들을 발생시키는가를 밝히는 것이 현대 뇌과학자들이 마주한 숙제다. 이러한 작업의 어려움은 우주의 물리적 기초를 푸는 숙제를 마주한 한 뛰어난 물리학자의 고백에 견줄 만 하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질문인지 미리 알지 못한다. 해답에 다가갈 때까지 옳은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겪는다.” 스티븐 와인버그의 말이다.

마음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다

이 도전적인 숙제에 응전하여 뇌과학자들은 지난 세기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고단한 여정을 걸어 왔다. 비록, 여전히 갈 길이 벅차긴 하지만 그간 이룬 성취도 결코 만만치 않다. 1889 년 가을, 도은법(silver impregnation)이란 예리한 칼로 무장한 검객, 카할(Cajal)은 독일 해부학회장의 연단에서 개별 신경세포들을 하나하나 도려내듯 떠낸 아름다운 그림들을 공개한다. 이 그림들로 그는 뇌가 연속적인 망상체가 아니라 서로 분리된 수많은 개개의 뉴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이고, 많은 동료 과학자들의 동의를 끌어내어 ‘뉴런 독트린(Neuron doctrine)’을 선포한다.

아드리언(Adrian)과 하트라인(Hartline) 등은 또 다른 뇌의 중요한 비밀을 밝혀서 뉴런 독트린을 강화시켰다. 뉴런들이 서로 대화할 때 모스와 같은 부호를 사용하는데, 이 부호는 局地的이며, 스스로 옮겨 다니기도 하고, 실무율적(all-or-none)인 일종의 전기적 교란으로 뇌의 모든 지역에서 통용된다는 것이었다.

‘뇌의 핵심 단위는 뉴런이며, 뉴런들은 만국공통의 부호로 대화한다’라는 단단한 패러다임을 확보하여 정상과학의 지위에 오른 뇌과학은 주로 감각뉴런들에 다양한 입력들을 제시해가며 이 부호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허블(Hubel)과 비젤(Wiesel)에서 정점에 이른 이러한 관찰들은 하나의 뉴런이 매우 선택적 자극에만 반응을, 즉 신경부호들을 발생시킨다는 대단히 놀라운 결과를 도출했다. 이를테면 고양이 시각피질의 한 뉴런에 전극을 내렸을 때, 망막의 아주 제한된 영역에 11시 방향으로 기울어진 막대가 오른쪽 위로 움직일 때만 그 뉴런이 맹렬하게 반응을 한다는 것이었다.

뇌과학의 후예들은 뇌가 수많은 영역들로 분화되어 있으며 각 영역마다 고유한 마음의 특정한 측면들만을 표상하거나 행동의 특정 측면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 왔다. 여러 형태의 감각입력 사건들을 등록하는 감각영역들, 펜필드가 예시한 것처럼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의 흔적을 지닌 기억과 체계적 지식을 담당하는 영역들, 감각영역의 출력과 기억/지식영역들의 출력을 결합하여 적응적인 반응을 결정하는 의사결정과 관련된 영역들이 있으며, 이 모든 활동들에 따르기 마련인 정서적 반응과 관련된 영역들도 존재함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뇌에 마음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


 

연구경향: 뇌과학의 혁명(下)
세포들의 커뮤니케이션망 구축…인문학자들 관심 늘어

2004년 09월 10일   이상훈 서울대 

현대의 뇌과학자들은 마음과 행동의 다양한 측면들과 相關된 뉴런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공격적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자연스런 마음이나 행동산출의 과정에 발생하는 신경부호들을 소극적으로 관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유기체의 마음이나 행동을 원하는대로 조절할 수 있을까”라는 것처럼.


스탠포드 대학의 뉴썸과 동료들은 MT라는 시각영역에서 특정한 방향의 움직임과 상관된 반응을 보인 뉴런들을 규정한 다음, 원숭이들이 움직이는 물체를 보고 있을 때 그 뉴런들에 미세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원숭이들은 자신들이 지각한 방향대로 보고하도록 잘 훈련됐었는데, 제시된 물체들이 물리적으로 특정 방향 없이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쪽 방향에 조율된 뉴런들을 전기적으로 자극했을 때 위쪽 방향의 움직임을 보았다고 보고하는 확률이 우연수준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온 것이다. 뇌의 활동을 교란하여 마음을 움직인 이 실험은 마음을 조작하는 인공보조장치 개발이 가능함을 시사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시도이다.

뉴썸과 동료들이 뉴런의 활동을 조작하여 마음을 움직였다면, 마음과 상관된 뉴런의 활동을 읽어 행동으로 번역하는 연구들이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칼 테크의 앤더슨과 동료들은 원숭이의 뇌에서 운동계획에 관여하는 여러 인지 영역 세포들의 부호들을 풀어내어 원숭이들의 선호도와 동기수준을 읽어 냈다. 또한 원숭이들의 운동계획을 읽어 내어 로봇 팔을 원숭이의 의사판단에 일치하도록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발전은 사고로 인해 척수가 손상되어 마비된 몸을 지녔으나 뇌의 인지기능은 여전히 건강한 많은 환자들에게 엄청난 희망을 제시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뇌과학 활동의 대부분은 뇌에 주어지는 입력과 가까운 쪽이나 뇌의 출력과 가까운 쪽의 뉴런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최근에는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매우 복잡한 문제해결이나 의사결정 과정의 신경적 기초를 이해하는데서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다.

뇌과학자들은 경제적 의사결정의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하며 해묵은 경제학의 딜레마에 새로운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뉴욕 대학의 글림셔는 원숭이들의 뇌에서 특정 뉴런들이 경제적 투자행동과 관련된 의사판단과 상관된 활동을 보인다는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의 실험에서 목마른 원숭이들은 매 번 도박-이것의 점잖은 혹은 합법적 표현은 주식투자이다-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예컨대 A란 선택지는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쥬스 1000cc를 마실 수 있고, 뒷면이 나오면 쥬스를 아예 마시지 못하는 반면, B란 선택지는 동전 던지기 결과와 상관없이 500cc의 쥬스를 보장받는다. 경제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두 선택지는 ‘기대값’의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기대효용'은 B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글림셔가 관찰한 뉴런의 활동수준은 도박에 열중한 원숭이들의 선택을 매우 정확하게 예언하며 기대효용의 수준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였다. 복잡한 수학으로 유도된 하나의 추상적 경제학 방정식의 해가 원숭이 뇌의 한 세포의 활동으로 번역된 것이다.

최근에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이라 불리는 뇌영상 기술을 통해 인간들의 뇌활동을 직접 측정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fMRI는 뉴런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측정하며 시공간의 해상도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뇌의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뉴런들의 활동을 모니터할 수 있으며, 원숭이와 인간의 뇌 활동을 직접 비교함으로써 과거 동물모델을 통해 축적된 단세포 측정법의 결과들을 인간의 뇌에 적용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나아가, 인간에게 특징적인 여러 고위 인지기능 및 정서, 사회적 적응기능의 신경적 기초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뇌과학 연구에 획을 긋는 연구결과들이 최근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주된 흐름은 전통적으로 뇌과학 영역의 바깥이라 여겨져 왔던 분야들이 하나 둘씩  뇌과학의 손길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껏 철학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돼 온  ‘의식’ 혹은 ‘자각’의 문제를 뇌과학자들이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공격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의식의 신경상관(NCC, 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이란 주제로 의식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소비활동에서 '상표 가치'의 신경적 기초를 밝히는 작업들을 중심으로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 혹은 넓은 의미로 뉴로이코노미(Neuroeconomy)란 분야가 생겼는가 하면, 두 사람 이상이 fMRI 스캐너에 동시에 들어가 인터넷으로 상호작용을 할 때의 뇌활동을 측정함으로써 사회적 능력의 신경적 기반을 탐구하는 소셜 뉴로사이언스(Social Neuroscience)등의 분야도 생겼다.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인문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들이 뇌과학 학회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뇌과학자들의 발견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와서 자신들이 축적해온 개념들의 외연도 넓히고 또한 미래 뇌과학 연구에 적절한 지침을 주기도 하여 매우 생산적인 학제간 상호작용이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뇌과학은 젊은 학문이다. 그리고 뇌과학이 마주한 엄청난 난이도와 방대한 양을 지닌 숙제들은 많은 과학자들의 노동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다양한 종류의 과학자들을. 필자는 각 분야의 젊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연구활동이 뇌과학의 질문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여기길 바란다. 우리 뇌과학자들에겐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고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들이 산적해있지만, 우리는 즐거운 불평을 해대며 연구실로 달려간다. 마치 새로운 발견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잠 못 이룬 카할처럼.

국내의 뇌과학 관련서들
입문서부터 학제적 연구까지

2004년 09월 10일   최철규 기자 

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생명공학이나 나노 기술 등의 최첨단 과학뿐만 아니라 이공계 분야의 기초학문까지도 뇌과학으로 귀결되어 21세기는 뇌과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출판계에서도 뇌과학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뇌과학에 대한 기초 입문서 성격의 책부터 학제적 접근까지 제시하는 포괄적인 책까지 다양하다.


‘브레인 스토리’(수전 그린필드 지음, 지호 刊)는 영국의 BBC 방송이 2000년 제작해 국내에서도 방영됐던 동일명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 90년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축적된 뇌의 비밀을 폭넓고 쉽게 설명하기 때문에 뇌과학에 대한 기초 입문서로 적당하다.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코언이 쓴 ‘마음의 비밀’(문학동네 刊)은 뇌 혹은 마음의 비밀을 캐기 위한 두 유형의 집단의 성과를 정리하고 있다. 생리적 영역을 탐색하는 한편의 집단은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적 접근을 통해 마음이 거주하는 뇌의 비밀을 밝히려 하고, 다른 한편은 심리적인 영역에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마음의 구조를 탐사하려는 것. 양 유형을 접목하여 뇌의 비밀을 밝히려는 저자의 시도를 살펴볼 수 있다.

신경과 교수인 리처드 레스탁이 쓴 ‘새로운 뇌’(휘슬러 刊)는 뇌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뇌의 다양한 변화 양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책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고 두뇌 회전을 게을리 할수록 기억력이 저하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조건을 변경하면 기억력이 어떻게 될까.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란 연령에 따라 퇴화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활발한 사고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며 거듭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음악을 통해 뇌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 등 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실용적 예도 전해주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뇌과학이 부딪힐 수 있는 윤리적 문제의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한다.

‘뇌와 기억 그리고 신념의 형성’(다니엘 쉑터 지음, 시그마프레스 刊)은 하버드 대학의 ‘마음/두뇌/행동 이니시어티브(Initiative)’ 그룹이 펴낸 책이다. 신경생물학, 인지과학, 정신과학, 문학의 다양한 측면에서 기억, 뇌 그리고 신념의 복잡한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지식형태로서의 기억과 신념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과학적 접근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별로 이뤄지는 전개를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은 지난1989년 이른바 '한겨레신문 방북 취재 기획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신 당시 리영희 한겨레 논설위원이 국가 권력의 대행기관인 검사의 신문에서 국가보안법의 '허구성과 비논리성'을
조목조목 따진 글이다. 15년 전에 발표된 글이라 '허구성과 비논리성'을 따지기 위해 조목조목 든 14가지가 지금의 싯점에서 보면 조금 상황이 변한 것도 없지 않으나 지금 보아도 보안법의 '허구성과
비논리성'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원문 그대로를 옮겨서 적어 본다.
이글은 리영희 교수가 펴낸 <자유인>아라는 책에 실려 있으며, 책 안에서의 작은 제목은 "객관적 진실과 법률적 허구"이다.


정확히 6개월 만에 '한겨레논단'에 돌아왔다. 그동안 뜨거운 격려와 사랑을 보내준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나는 옥중에서 확인한 감동적인 우정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한겨레신문 기자단 방북취재 기획 사건'은 수많은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의 전형이다. 그 핵심적 쟁점은 휴전선 이북에 존재하는
정치적 실체의 '성격' 규정에 있다. 다른 모든 문제는 부차적일 뿐이다.

<한겨레신문>과 나에 대한 공소장 20매는 그 본문 첫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북한 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다. 그 끝줄에서 <한겨레신문>은 "그런 단체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탈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반국가단체'라는 성격 규정이 각기 상이한 내용의 모든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정부 쪽 주장의 논리적 대전제가 된다.

과연 정부의 그런 주장이 객관적 진실 검증을 견딜 수 있는 것인가? 혹시 한때 냉전시대의 맹목적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는 아닌지? 나는 국가를 대리한 '검사'의 신문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였다.(지면관계상 요점만 적어본다)

1) 광복과 동시에 한반도는 38도선으로 분할됐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반국가단체'가 지배한다는 그 지역에 대해서 대한민국은 통치권을 행사한 역사적 사실이 없다.

2) 정부가 주장해온 이른바 '유일 합법정부론'의 근거인 유엔총회 결의 (제 195호의 제 2항, 1948.12.12)는 1948년 5월 선거(5.10선거)가 실제로 실시된 38도선 이남에 제한된 것이다.(담당 검사도 이 사실을 시인했다)

3) 한국전쟁 초반에 점령하에 놓인 38도선 이북 지역에 대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유일 합법정부론'에 입각해서 대한민국 민정장관을 임명, 파견했다. 그러자 유엔은 그 지역 (38도선 이북지역, 즉 지금의 북한)이 대한민국 행정관할의 밖이라는 근거로 한국 정부의 결정을 취소시켰다.(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보고서
A / 1881, 1951년)

4) 대한민국 수립 뒤, 한국을 승인하고 수교하는 관계에 있어서 각국은 이 제한적인 결의를 '고려'하라는 유엔의 그 결의 제 9 항의 '권고'를 따르고 있다.

5) 북한을 '반란단체'라 하여 북한을 승인한 국가와는 수교하지 않고, 수교했다면 수교 단절을 고수하던 60년대의 원칙(이른바 할슈타인 원칙)은 이미 백지화된 지 오래다.

6) 그 결과로 대한민국은 현재(1988. 8. 10) 북한을 독립,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102개국과 수교하고 있다.

7) 박정희 군사정부의 '통일원칙에 관한 남북공동성명'(7.4 공동성명)은 최초의 사실적 승인이다.

8) 1980년 1월부터 추진 중인 '남북한 총리회담'은 그 명칭이 말하듯이 주권국가 정부간의 회담을 위한 것이지 '반란단체'와의 회담이 아니다. 반란단체'에 어찌 정부조직인 '총리'가 있을 수 있는가?

9) 전두환은 '남북 최고책임자회의'를 갖자고 '김일성 주석'에 거듭 제의했다.
대통령이 '주석'이라고 공식화 했는데 대통령을 따라 '주석' 용어를 쓰는 국민은 왜 처벌되어야 하는가?

10) 정부는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해 주권국가 만이 회원이 될 수 있는 "유엔에 함께 가입하자"고 독촉하고 있는데 이 모순을 국가보안법은 또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11) 행정부와 국회는 1985년부터 '남북 국회회담' 개최를 추진 중이다.
어째서 반란집단이 입법부인 '국회'를 가질 수 있는가?

12) 남북 정부는 지금 상대방의 정식 국호를 공문서에 사용하고 있다.
(나는 실제로 정부기구의 회의에 참석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으로부터 ' 대한민국 국무총리 강영훈 귀하'에게 방금 전달된 공식문서를 토대로 정책토론을 했었다.)

13)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주권국가 정부만'이 발급하는 북한의 여권사증(비자)을 받고 '반란집단'의 지역으로 '잠입' '탈출'하는 행위를 정부가 "승인"했다.

14) 대한민국이 국가적 운명을 의탁하고 있다는 '한미 방위조약'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사실상' 휴전선 '이남'으로 규정하고 있다.(제 3조 및 종말부칙 '미합중국의 양해사항')

국가보안법이 대전제로 규정한 이북 지역은 과연 어떤 성격인가? 진실로 문제인 것은 오히려 보안법의 성격이 아닐까?
(1989년 10월 8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4-09-1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명백한 사실들이네요

balmas 2004-09-1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선생의 대를 이을 만한 지식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
 

오늘(금요일) 낮에 일이 있어서 문학과지성사에 들렀는데, 마침 [테러 시대의 철학]을 한 권 줘서(공짜밝히기는 ... -_-;;;) 조금 읽어봤다. 생각대로 번역이 괜찮더군. 아직 책을 못본 분들을 위해 한 대목을 맛보기로 인용해 보면(저작권 시비에 말려들지는 않겠지???) ...

 

보라도리: 9.11은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목도하게 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인상을 말이죠. 세계대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죠?

데리다: Le 11 septembre[이하 9.11]라고, 혹은 우리가 두 언어로 말하는 데 동의한 이상, "september 11"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나중에 우리는 이 같은 언어의 문제로 되돌아와야 할 겁니다. 또한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딱 날짜만을 말하는 이러한 명명 행위의 문제로도 되돌아와야 할 거구요--당신은 '9.11'이라 말하면서 이미 인용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이에 대해 제가 뭔가를 말하도록 권유하려고 당신은 지금까지 5주 동안 우리의 공적 공간과 사생활을 점령하고 있는 어떤 날짜 혹은 날짜 기입을 마치 따옴표 안에서인 듯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프랑스 숙어로 말하자면, 뭔가가 날짜를 만듭니다fait date. "날짜를 만들다, 획기적 사건이 되다", 이는 늘 두드러지게 각인되는 사건, 유일무이한 사건, 여기 식으로 말해, "전례 없는" 사건으로 느껴지는--외견상 직접적으로는 그런 사건으로 [인식된다기보다는] 최소한 느껴지는--무언가에 의해 가해진porte 일격이며, 이것이 남긴 효력portee 자체입니다.

물론 저는 "외견상 직접적"이라 말했습니다. 이 '느낌'이란 게 보기보다 덜 자생적이거든요. '느낌'이란 대부분 조종된 것이며, 짜맞춰진 건 아닐지라도 구성된 것, 어쨌든 경이적인 기술-사회-정치적 기계로 매개된 것, 매체화된 것입니다. 하여간 "획기적 사건이 된다는 것"은 '뭔가'가, 아직 어떻게 정체를 부여하고 규정하고 인지하고 분석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망각할 수 없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뭔가'가, 보편력calandrier universel의 공용 문서고에 남게 될 지워질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입니다. 물론 이는 가정상의 보편력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겐 가정과 전제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시작에서부터 강조하고 싶군요. 이러한 가정과 전제는 유치하고 독단적인 전략이거나, 아니면 심사숙고되고 조직되고 계산된 전략이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날짜를 가리키는 색인, 날짜만을 부르는 수식 없는 벌거벗은 행위, 극소적 지시사, 이것이 겨냥하는 극소주의적 표적, 이는 또한 뭔가 다른 것을 표시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뭘까요? 그건 바로, 방금 일어난 이 '것', 이 가정상의 '사건'을 어떻게든 달리 명명할 수 있는 개념이나 의미가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겁니다. 가령, '국제 테러리즘'이라는 행위--우리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이는 우리가 말해보려는 어떤 것의 독특함을 파악케 하기에는 결코 엄밀하고 만족스러운 개념이 아닙니다.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도래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느끼지만, 이 '것'은 특정한 귀결들을 부인할 수 없도록 펼쳐냅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 이 '사건'의 장소와 의미는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개념 없는 직관처럼, 지평에 아무런 일반성을 지니지 않는, 심지어는 어떠한 지평도 수반하지 않는 유일무이함처럼, 이것은 언어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언어는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게 되고, 결국 어떤 날짜를 기계적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이 날짜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해버립니다. 일종의 제의적 주문처럼, 이와 동시에 축귀의 시처럼, 저널리스트적 연도(連禱)나 자신이 뭘 말하는지 모르고 있음을 자백하는 수사적 상투어처럼 말이죠.

사람들은 9.11, 9.11, 9.11이라고 말하거나 명명하면서도 그들 자신이 무엇을 말하거나 명명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호명이 간결한 건(9.11, 9.11) 단지 경제적 필요나 수사적 필요 때문만은 아닙니다. 환유--어떤 이름, 어떤 숫자--의 전보문은 사람들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거나 재인하지 못한다는 것, 심지어는 인지하지도 못한다는 것, 아직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 스스로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재인지함으로써 규정 불가능한 어떤 것을 털어놓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계산되었든 아니든, 잘 계산되었든 아니든) 9.11,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가져온 최초의 효과, 논란의 여지 없는 최초의 효과입니다. 즉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아주 잘 알지는 못하기에 오히려 더더욱 그것을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단번에 두 번의 푸닥거리를 하기나 하려는 듯, 곧 한편으로는 '사물' 자체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주술적으로 몰아내기 위해서(반복은 늘 정신적 외상traumatisme을 중화시키고 무감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해주는 효과를 낳으니까요. 텔레비전 이미지의 반복도 마찬가지 경우인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하기로 하죠),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의 그 사물을 적절한 방식으로 명명하고 규정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단순히 날짜를 지시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9.11, 뭔가 끔찍한 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을 가능한 한 이 같은 언어 행위 및 진술 행위 가까이서 부인하기 위해. 실상 우리가 폭력에 대해 아무리 분노한다 한들, 다른 모든 분과 더불어 저 역시 그렇듯, 숱한 사망자에 대해 진심으로 비탄해 마지않는다 한들, 문제가 되는 것이 결국 이런 거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나중에 이 문제로 되돌아올 겁니다. 당분간 우리는 다만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주 동안 뉴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실은 제가 9월 11일 날 머물렀던 중국에서, 그 다음 9월 22일 가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이미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약간은 맹목적으로 이 날짜에 준거하지 않고서,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서, 아무 것으로나 말을 시작한다는 건 단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금지되어 있다고,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고, 이미 사람들은 느끼고 있으며 또한 당신에게도 그렇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특히 공개석상에서 말이죠. 저는 어김없이 이 명령에 따릅니다.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선 당신과의 이 우애로운 인터뷰에 참여함으로써 저는 또다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충격과 가장 충심 어린 연민을 넘어, 9.11, 여기 맨해튼의 코앞에 있고 워싱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막 일어난 일에 대해, 일어난 듯 보이는 일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기를, 그리고 "사유하기"를 호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름을 붙이고 날짜를 기입하는 이 같은 언어 현상을, (수사적이면서도 주술적이고 또한 시적인) 이 반복 강박을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늘 믿고 있습니다. 이 강박이 무엇을 의미하고 나타내고traduit 혹은 누설하는지trahir[이건 "기만하는지"나 "왜곡하는지"로 번역하는 게 낫지 않을까?---인용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성급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하고 싶어하듯 언어 속에 빠져들어 감금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바로 언어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그리고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9.11, 9.11, 9.11, 9.11"이라 반복하도록 부추기는지를, 언어와 개념이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른바 사건이 가져온 이와 같은 일차적 효과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좀더 알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여유를 가지고서 자유롭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결국 아직 알지 못하는데도, 그리고 당신이 부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도, '9.11' '9.11'이라 명명하라는, 반복하라는, 또다시 명명하라는, 그 자체 위협적인 이러한 명령. 도대체 어디서 이러한 명령이 우리에게 도래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명령에 강제될까요?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이 위협적 지시를 내렸을까요?(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이는 테러리스트가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테러를 가하는[공포에 몰아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 말에 동의합니다. 즉 의심의 여지없이 이 '것', '9.11'은 "우리에게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 경우 인상이란 뭘까요? 사건이란 또 무엇입니까? 특히 '대사건'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저는 하나 이상의 주의 사항을 강조하려 합니다. 물론 경험주의를 넘어서기를 겨냥하면서도 저는 이를 외견상 '경험주의적' 스타일로 수행할 겁니다.  분명 18세기 경험주의자라면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하겠죠. 거기 어떤 '인상'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이는 당신이 영어로--이는 우연이 아닙니다--'대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준 인상이라고. 저는 영어를 강조했는데, 물론 이는 영어가 당신의 언어도 저의 언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뉴욕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반복하라는] 명령이 무엇보다도 영어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지 미국의 거의 두 세기를 거치는 동안--정확히 말해 1812년 이래로--처음으로 제 국토에서 표적이 되고 습격당하고 침범당했다 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가 이 폭력의 표적이 되었다고 느끼는 세계 질서가 대부분 앵글로-아메리카 고유어idiome[이런 경우에는 "방언"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 같다-인용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 질서에서 이 고유어는, 세계 무대를 지배하는 정치적 담론과, 국제법, 외교 관례, 미디어, 그리고 가장 거대한 기술과학적, 자본주의적, 군사적 권력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죠. 그리고 지금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헤게모니가 지닌 여전히 수수께끼같으면서도 결정적인critical 본질입니다. 결정적인''이라는 말을 저는 '결정하는' '잠재적으로 결정하는' '결정을 내리는'의 의미로 사용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며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 '인상'이 정당하든 아니든, 이 '인상' 자체가 하나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확실히 분화된 방식으로 고유하게 세계적인 효과일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인상'은, 그것을 숙고하고 소통시키고 '세계화'한,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그것을 우선적으로 형성하고 산출하고 가능케 한 일체의 정서와 해석 및 수사법들과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상'은 그것을 산출한 "바로 그 사물 혹은 사태"와 닮게 되죠. 이른바  '사태'가 '인상'으로, 따라서 사건 자체가 '인상'으로 환원될 순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건은 (일어난 혹은 도래한) '사태' 자체와, 이른바 '사태' 자체가 부여하고 남겨두고 만들어낸 (그 자체 '자생적'이면서도 '조종된') 인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인상이 'informee[형식을 부여받는다/정보화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좀더 인용했으면 좋겠지만, 타자치기 싫어서(;;;), 사실은 저작권법에 저촉될까 두려워서(;;;) 이만 줄인다. 하지만 데리다의 전형적인 논변(또는 이 경우에는 즉흥적인 대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글로 씌어졌을 경우에는 훨씬 더 다양한 수사법적 장치가 동원되고 논변의 가닥이 좀더 복합적이겠지만, 인용한 이 구절만으로도 데리다 특유의 논변을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논변과정에서 중요한 한 문장이나 한 문단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면, 그만큼 데리다의 논변의 의미, 그것이 낳는 의미효과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데, [시선의 권리]를 포함한 많은 국역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번역된 문장들, 문단을 찾기가 더 어렵다. 그러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리다의 난해함의 8할은 바로 이런 오역 때문에 생겨나는 난해함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시안 기획.연재 라이브러리 문화

 

 

<요하네스버그의 버스 기사는 길눈이 어둡다>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하는 '역사시평' <1>과거사 규명과 현대사 연구                                                                                          2004-09-01 오후 3:24:38

  오늘부터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역사학자가 쓰는 '역사시평'을 연재합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1988년 창립된 진보적 한국사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현재 4백40여명의 역사학자들이 연구활동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넓고 긴 안목을 통해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역사학자가 쓴 '담배이야기' 연재도 곧 시작될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편집자
  
  과거사 청산 논란과 관련해 기자들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 통화의 빈도수가 최근 부쩍 늘었다. 질문 내용 가운데 과거사 청산의 대상과 방법, 청산을 담당할 기구 구성 등에 대한 질문이 많고, 여론 조사도 국민 다수가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보아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거사 정리를 학계에 맡기자는 주장이 일부 야당의 공식 입장으로 제기되는 형편이니 과연 그 당위성과 필요성에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 의문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나라당은 김영삼 정부 때 정신문화연구원에 설치되었다가 김대중 정부에 와서 사라진 현대사연구소를 모델로 현대사연구소를 새로 만들되 정부기관이 아닌 학술원 산하에 두고, 그 연구소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정리’를 하는 방안을 한나라당의 공식 입장으로 삼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학자들의 중립성에 기대는 외양을 취함으로써 학자들의 식견을 존중하고 학자들을 대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한나라당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 연구와 과거사 청산을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과거사 청산을 물타기 하려는 시도로 비칠 뿐이다.
  
  과거사 청산은 불가피하게 진상 규명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진상 규명이 먼저고 청산은 국민에게 물어보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부터 정리해야겠다. ‘과거사’란 무엇인가. 역사면 역사고, 현대사면 현대사지 과거사는 또 무엇인가. 과거의 사건(過去事)을 의미하는가, 과거 역사(過去史) 전체를 의미하는가. 과거사 청산의 경우 ‘청산’의 사전적 정의는 과거의 관계 사항 또는 주의, 사상, 과오 등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이다. ‘정리’의 사전적 정의는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이 되었든 ‘과거 역사 일반’이 되었든 정치가들이 타협한다고 해서 이미 흘러간 과거사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인가. 또 무엇보다 진상이 규명되어야지 청산을 하든 정리를 하든 할 것이 아닌가.
  
  지금 논란이 되는 과거사 청산이 우리 국민들의 역사 지식이 부족하고 역사 인식이 천박하기 때문에 전국민을 향해 근현대사를 재교육하려는 국민적 프로젝트가 아닌 이상 이때의 ‘과거사’는 이 시대에 고유한 맥락과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과거사는 ‘우리 근현대의 어떤 시점에서 마땅히 해명되었어야 할 현실적, 역사적 과제가 당시의 억압적 사회구조와 정치상황으로 인해 미처 해명되지 못하고, 현재로 이월되어 새로이 역사적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들’이다. 그런 면에서 과거사 규명작업은 사실 자체에 대한 해명과 함께 그 사실이 제대로 해명될 수 없었던 사정의 규명과 시정을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즉 과거사 청산에서 과거사는 결코 역사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진상 규명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기된 것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정치적 음모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여당 대표가 선친의 친일 전력 때문에 정치적으로 낙마하는 것으로 보아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또 경제상황을 들어 과거사 청산을 미루자는 말이 있지만 듣기에도 딱한 것이 과거사 청산이 어디 경기 봐가며 하고 말고를 정할 일인가. 호황인지 불황인지 따져서 청산해야 할 과거사는 도대체 어떤 과거사이고, 그런 식으로 하자면 어느 세월에 과거사를 청산할 것인가. 결국 청산하지 말자는 소리 아닌가. 경제 걱정을 하는데 지난 봄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적 유행가가 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정치인들은 경제에 신경 쓰지 말고, 불법 정치자금 걷을 생각을 거두는 것이 이 나라 경제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점은 이제 국민적 상식이 되지 않았는가.
  
  과거사 청산은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과거사 청산의 타이밍과 관련한 이런 식의 논란을 보노라면 그동안 우리 사회의 역사적 감각이 얼마나 무디어지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하였는가를 보는 것 같아 씁슬해진다. 우리 현대사에서 과거사 청산은 나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정부수립 후 어렵게 구성된 반민특위가 끝내 좌절함으로써 일제 식민지기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고, 4.19 이후 거창 민간인 학살 등 6.25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나 했더니 그것 역시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친일경찰과 친일관료를 정권기반으로 했던 이승만 정권 시기는 물론이고 다카키 마사오라는 창씨개명 이름을 가졌던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 ‘친일파’의 친일경력을 문제삼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한국사회는 그 이후 정권에서도 과거사 진상 규명이라는 과제를 정면에서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면에서 지난 겨울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성금 모금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나마 이 과제가 대중적 차원에서 제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했음을 반증한다. 지난 겨울 16대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이 삭감되자 시민들의 호응으로 불과 1주도 안되어 성금 목표액을 달성하고, 친일진상규명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을 때 이미 지금의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논란을 예감했어야 했다. 큰 지진은 사전에 여러 번 신호를 보내지 않는가. 왜 이 시점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기되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이제 이 사회가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들을 시정하고, 과거 역사의 잘못들을 바로잡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더 전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이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역사라는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한다.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과거사 청산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제기될 것이 분명하다.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과거사 규명을 위해 나서야
  
  과거사 청산이나 역사 바로 세우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정치인들이 학계에 책임을 떠넘기는 데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학계의 노력 부족을 탓하기 위한 것이라면 학자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일이고, 그 동안 역사가 누워서 쉬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세워주려는 것이라면 그 충정은 이해하지만 제발 참아 주었으면 좋겠다.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예산 지원을 삭감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계속 할 수 없게 만든 때는 언제이고, 정치적 공방이 가열되니까 학계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또 무슨 태도인가.
  
  그렇게 학계의 의견을 중시했으면 친일인명사전 편찬 같이 국가적 사업이 제기되었을 때 지원을 대폭 강화해서 학계가 이 사업을 성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해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반민특위가 실패하고 그 동안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중립적인 학계가 참여하지 않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과거사 진상규명이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정치권과 정부, 시민단체, 학계가 모두 나서서 풀어야 할 일이지 어디 학자들에게만 맡길 일인가. 소를 잡기 위해서는 소 잡는 칼을 써야 하고, 닭을 잡기 위해서는 닭 잡는 칼을 써야 한다. 탄핵사태가 닭 잡기 위해 소 잡는 칼 들고 설친 사례라면 학자들에게 과거사 청산을 맡기는 것은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 쥐어주는 격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방자치단체들도 모두 현대사연구소 하나쯤은 만들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현대사연구소를 여럿 만들어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바로 인력과 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학계의 연구역량을 강화하고, 과거사 청산 문제는 정치권과 정부, 시민단체, 학계가 모두 나서서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풀어갈 일이다.
  
  요하네스버그의 버스 기사는 길눈이 어둡다
  
  이태 전 이맘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한국에서도 거의 4백명이나 되는 대규모 참가단이 참석했는데, 그곳에 다녀온 이로부터 흥미 있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한국 대표단이 머문 숙소에서 대회장까지는 불과 20-30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내내 아침마다 대회장에 가는 데 두세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어정거려서가 아니라 한국 대표단이 탄 버스의 흑인 기사가 길을 몰라 두세 시간씩 헤매기가 일쑤였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는 서울만큼 크고 복잡한 도시가 아니고, 호화주택이 즐비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 인종분리 정책 하에서 대중교통 수단을 전혀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인종분리 정책이 철폐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소웨토라는 제한 구역에 살아야 했던 흑인들은 거리감각이 전혀 없고 길눈이 어두운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한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질곡이 되는지, 또 과거 청산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아공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화합과 진상 규명을 시도하였지만 가해자들이 여전히 실질적 권력을 지니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상태에서 진실 규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사의 미청산 때문에 버스 기사가 길을 못 찾아 헤맬 정도는 아니라고 위로하려 들지 말라. 과거를 망각하거나 제때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복수하는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세인의 뇌리에서 사라졌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 박기서라는 버스 기사가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찾아가 병석에 누워 있던 그를 ‘정의봉’으로 타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결국 살인죄로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는데, 이 평범한 시민을 살인으로 내몰고 결국 감옥으로 보낸 것은 의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적 망각증과 미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때문이었다. 그가 안두희를 타살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안두희의 배후를 추적해서 백범 암살의 진상을 밝혔더라면 그런 희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의로운 시민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김영삼에 대해 IMF 사태와 경제위기를 초래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일각에 존재하지만 만약 그가 재임 중 백범 암살의 진상을 규명했더라면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될지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았겠는가.
  
  과거사 규명 없이는 온전한 백범ㆍ장준하 강의도 불가능하다
  
  백범과 장준하는 비슷한 점이 많다. 두 분의 강렬한 민족애와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의(剛毅)함이 그렇고, 두 분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한 역정을 보여준다. 또 두 분의 활동과 사상이 통일민족주의로 비약한 순간 모두 죽음을 맞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분의 죽음은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활동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지만 우리는 이 두 분의 죽음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백범과 장준하에 대한 강의는 반쪽강의가 될 수밖에 없다. 두 분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 이르러서는 쓸데없이 열을 내거나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느냐는 식의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도대체 이 눈망울 초롱초롱한 젊은이들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미래의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나갈 이들에게 나는 역사적 자긍심 대신 역사적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전 어느 세대보다 독립적이고 개성이 강한 이 시대 젊은이들이 역사적 망각증과 선택적인 기억상실증을 극복할 때 비로소 세계인도 이들을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 또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그 어느 사회보다 높은 문화민족으로 대우하지 않겠는가.
  
  새학기에는 백범 암살의 진상과 장준하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길이 열려서 강의실을 메운 학생들에게 이게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우리 사회의 저력이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후세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이 정도의 자기 교정 능력은 있는 사회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히딩크 식으로 표현하면 나는 백범과 장준하의 죽음의 진상까지 낱낱이 해명된 제대로 된 백범 강의, 온전한 장준하 강의에 목이 말라 있다. 해방된 지 60년이 다 되가는 이 시점에서조차 과거사 규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후대 사가의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배운 춘추필법이 그랬고, 우리가 후손들에게 가르칠 역사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정용욱/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09-1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같은 광기어린 수구세력(한마디로 파시스트들)을 제어할 수 있는 보수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마도 현재 남한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일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기회주의와 무능함을 보면 기가 막힐 뿐이다.

로드무비 2004-09-11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아니겠습니까.
그 기회주의와 무능함을 합리니 실용이니 우겨쌓는 그들을 보면......
조금 미안한 기색도 없는 것 같아요.

balmas 2004-09-11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릴케 현상 2004-09-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우리당이 과거사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요? 어떤 점이 기회주의고 무능함인가요?( 며칠전에 아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그 사람은 성대에서 학생회 활동을 했었는데 자기가 아는 선배가 청와대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요.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그것만 봐도 노무현 정부가 얼마나 문제가 많냐? 당연히 서울대출신들로 포진해야 되는데 내가 아는 사람을 쓰고 있다는 것부터가...')

balmas 2004-09-1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사 규명과 친일 청산을 위한 노력 자체를 문제삼는 게 아니라, 그런 노력에 의혹과 불성실함이 보인다는 거지요. 국가보안법 폐지만 해도, 국가보안법을 대체하겠다고 내놓은 새로운 법안이 국가보안법 못지 않은 악법이 되리라는 게 뻔하지 않습니까?

릴케 현상 2004-09-1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혹과 불성실에 대해서 진보적인 분들이 좀더 비판은 하셔야겠지요. 그건 각자가 할 몫이라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안타까운 건 시민들에게 여론 조사를 해도 완전 철폐에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대체입법이라도 내서 시민들을 안심시켜야 국보법 철폐를 밀어붙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대체입법의 내용을 가능하면 악법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진보적인 단체들이 영향력을 행사해야겠고요...
 
 전출처 : 바람구두 > 지금도 나는 그날 밤이 무섭다

며칠전 "푸른역사"에서 한 권의 신간을 냈다. "나의 천년 - 발칙한 후손의 내 역사 찾기"란 책인데, 이 책의 저자는 표정훈이란 사람이다. 표정훈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아직도 이 사람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인 사람에겐 그의 직업이 출판평론가라는 사실을 넌즈시 일러주어야 한다. 그제서야 아하, 하는 표정이라면 당신도 책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낸 이 책을 지난 2004년 9월 3일자 "조선일보"에서 서평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를 쓴 이한우 기자는 최장집 교수의 제자라고 한다. 나는 이한우 기자 덕에 출판평론가 표정훈에 대해 좀더 자세한 가계를 알게 되었다. 물론 이제부터 내가 독후감을 올리고자 하는 표명렬 선생에 대해서도 함께 말이다.

"나의 천년"은 한 집안의 가계사를 추적해간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책이다. 그의 고랫적 선조 이야기는 빼고, 그를 기점으로 3대를 거슬러 이한우 기자의 서평 기사를 읽다보니 내용이 이랬다(알라딘에도 올라 있으미 참고하고 싶으시면 읽어보시라). 그의 할아버지 표문학은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다. 할아버지는 인촌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았고, 중앙고보에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해준 인촌을 분명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말을 무척 아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표명렬 장군은 보도연맹원에 남로당 출신의 아버지를 둔 그는 육사출신이었지만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즐겨 읽던 '삐딱한' 군인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런 빛나는 가계를 둔 3대의 맨마지막 손자인 표정훈은 그런 가계 3대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이 되지 못했고, 대신 플라톤을 즐겨읽는 문화주의자로 남았고 그런 당당한 관찰자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단다.

참 대단한 "조선일보"고 대단한 "조선일보" 서평이다. 최근 나는 "조중동"의 서평기사들을 읽으면서 묘하게 꼬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왜 꼭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참 치사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는 듯해서 말이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쓴다. 나역시 종종 독후감을 빙자한 논설문을 작성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늘 안타깝지만, 최소한 내 의중을 교묘히 감추려고 하지는 않는데, 이 기사를 읽은 표정훈 씨와 표명렬 장군의 표정이 어떨지를 상상해보니 입맛이 더욱 씁쓸해진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아버지 표명렬 장군의 책에 대해서는 리뷰 기사를 올렸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표명렬 장군은 책을 발간한 뒤에 "한겨레"와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서 그럴까? 에이, 설마 그래서 그런 건 아닐 거다. 다른 좋은 책들을 서평하다 보니 빠뜨렸을 게다. 난 틀림없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세계 어느 선진군대도 '주적'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냉전수구세력이 주적 개념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지만, 이건 전쟁의 원리를 모르는 말입니다. 전쟁은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정신으로 하는 겁니다. 수구세력은 국가보안법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는데, 이 법 때문에 국가안보가 유지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권 탄압의 대명사인 이 악법을 지키고 있는 건 문명사회의 수치입니다."

이 책의 저자 표명렬 장군의 약력에는 이채로운 점이 많다. 우선 그가 전남 완도 출신이라는 것, 육군사관학교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우리나라 군인으로는 최초로 대만의 정치심리전학교를 수료한 최고의 심리전 전문가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베트남전에 전투 부대 제1진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그는 엘리트 장교가 걸어가는 길 대신에 정훈 병과를 택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엔 정치위원이라는 특수집단이 있다. 그들은 당원이고, 일반 병사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정훈병과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표 장군이 정훈병과를 택한 이유는 베트남전에서 목도한 우리 국군의 실상에 충격을 받은 탓에 우리 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은 이 책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의 필자 약력 소개에 따른 것이다.

군사학 혹은 전쟁사 관련 서적들을 들춰볼 때 종종 "그렇게 전쟁이 좋아?"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막막함이란... 평화네트워크의 활동가 정욱식 씨가 MD관련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전쟁이 좋아서 쓸리 없지 않은가. 우리 전체 국민의 3분의 1이 군대에 다녀온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서는 그간 변변히 군대 문제를 다룬 책 한 권이 없다. 세계에서 몇 째가라면 서러운 출판대국에서 군사학 관련 코너는 물론 다른 분야를 다 뒤져봐도 우리 군에 대한 비판서적 한 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혹자는 "군에 가야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혹은 "원래 군대란 게 다 그렇다"고 치부해버린다.

어쩌다 신문에서 군대내 구타로 인한 사망, 자살사고, 혹은 성추행, 오발사고 거기에 최근 불거진 자이툰 부대에 지급된 철모, 방탄복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달이 멀다 하고, 이런저런 군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지만 이런 문제들은 그저 변죽만 울릴 뿐 기획 기사로 다뤄지는 법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군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성역이자,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이다. 군만이 국가안보를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명예를 먹고 사는 직업군인들과 군 장성들의 자존심을 건드려선 안된다. 그 결과 주간 "미디어오늘"의 이번 주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엔 한국 특파원이 없다"는 기사가 나와도 할 말이 없어진다. 지난 7월초 KBS와 MBC가 외교통상부의 권유로 이라크에서 철수한 뒤 이라크 현지에는 한국 언론의 취재진은 단 한명도 없고, 다만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PD 한 명이 있을 뿐이다. 정부가 앞장 서 보도 자제를 요청했기 때문이란다.

구멍이 뻥뻥 뚫리는 철모와 방탄복을 입혀 자국 군대를 내보내고 이에 대해 우리 군의 안전을 위해 보도 자제를 요청하는 정부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철학이 있는 개혁이 아름답다'에서 그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이 웅장하게 서 있는 이 땅의 현실을 꼬집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마디로 철학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친일 청산, 과거 청산 문제는 다시금 나온다. 1987년 10월 29일 제장된 우리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으나 우리 육군사관학교는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지 못했고, 광복군이 우리 군의 주축을 이루지 못했다.

'2부 1950년에 멈춘 시계'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주적논쟁, 4ㆍ3사건 등과 같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등 현재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이다. 앞서 이한우 기자의 기사에도 드러나고 있듯, 이 책의 저자 표 장군이 진보주의자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표명렬 장군은 매우 민족적인 보수주의자이다. 문제는 그가 진짜 민족주의자이고, 진짜 보수주의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비판조차 우리 사회 일각에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건 우리가 아직도 삐뚤어진 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대표적인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는 반대했지만, "미국의 독립"엔 찬성했다). 표 장군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간 우리 가 행했던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반인권,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에 반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냉전 수구 정치 세력들이 정치 군인들을 동원하여 저지른 특수한 역사적 사안에 대해 마치 군이 저지른 양, 군을 볼모로 하는 획책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표 장군은 우리에게 합리적인 보수와 냉전 수구 세력이 어디에서 작별을 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총은 쏘라고 있는 것이고 총도 쏘지 못하는 군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면서 연평해전이나 서해교전 등에 그야말로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난리치는 수구 언론이야 말로 군과 국민 사이를 이간질하는 이적행위자들이라고 규정한다 .

'3부 개혁의 나침반은 언제나 양극을 가리킨다'에서 그는 “군에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이상한 충고에 반기를 든다. “군에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은 “군 생활을 통해 불합리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무조건 체념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습관화함으로써 비판력을 무디게 하는 소극성을 장점으로 둔갑시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라는 거창한 말” 구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도 정작 제복을 입은 국민인 병사들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얼차례나 일삼는 장교들의 리더십을 비판한다. '4부 우리 시대, 새로운 군대를 향하여'에서 표 장군은 '군대에는 인권이 없어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모교이자 군의 미래를 건설할 육군사관학교의 개혁을 요구한다. 입으로는 늘 정의의 편에 선다고 말하면서도 현실 정치 속에서는 선후배 관계를 통해 늘 강자의 편에 서 왔던 선배 군인들과 동기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그는 12.12 쿠테타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김오랑 소령을 참 군인의 귀감으로 삼는 육사교육을 꿈꾸는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무렵의 나는 특수전사령부(일명 특전사)가 있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12월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총성(종종, 야간사격 연습이 실시되곤 했지만)에 깨어났다. 그때의 내가 그 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날 밤이 무섭다. 그날 밤이 무섭기에 우리는 오늘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