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숨은아이 > 그게 틀린 말이라고?

지난 금요일(10월 14일) 저녁 뉴스에 우리나라 초중고 경제 교과서에 잘못된 내용이 많다는 보도가 나왔다. 용어가 잘못 쓰이고 개념 규정이 잘못되고... 음, 그렇군, 고쳐야겠네, 생각하는데, 잘못된 사례 중에 "이처럼 시장은 사람이 아닌 돈이 투표를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경쟁적이며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온다. 어, 맞는 말 아냐?

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에서 탈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구만!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성장은 바로 이들 저임금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룩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인데!!

“재벌은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늘리고 은행의 돈을 빌려 필요 없는 투자를 많이 함으로써 우리나라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재벌을 개혁하고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
언론에서 매일 주장하는 말이잖아?

도대체 누가 이런 말에 시비를 거나 했더니, 재정경제부, 한국은행,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KDI경제정보센터라고 한다. 경제 이야기 하면 매일 냉정한 시장의 논리 운운하던 곳들 아닌가? 그래도 “비인간적”이라는 말은 듣기 싫었나 보다. 비인간적이란 게 꼭 나쁜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인간적인 정리정략과 상관없이 수요 공급 원리에 따라 돌아간다는 게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걸 가지고 조중동과 경제신문들은 교과서가 반기업적이라며 팔팔 뛰고 난리다.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걸 바로잡아 “더 좋은 자본주의”로 가자는 내용이 왜 비위에 거슬릴까?

http://news.empas.com/show.tsp/cp_ed/20051014n01006/?kw=%B1%B3%B0%FA%BC%AD%20%3Cb%3E%26%3C%2Fb%3E%20%B0%E6%C1%A6%20%3Cb%3E%26%3C%2Fb%3E%20%C0%DF%B8%F8%20%3Cb%3E%26%3C%2Fb%3E경제교과서의 잘못을 지적한 이데일리 기사

http://news.empas.com/show.tsp/cp_kh/20051016n02819/?kw=%B1%B3%B0%FA%BC%AD%20%3Cb%3E%26%3C%2Fb%3E%20%B0%E6%C1%A6%20%3Cb%3E%26%3C%2Fb%3E%20%C0%DF%B8%F8%20%3Cb%3E%26%3C%2Fb%3E‘경제 교과서 편향’ 지적도 편향 있다는 경향신문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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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이론지 [트랜스토리아]에서 제 7회 포럼을 개최한다고 합니다.

흥미있는 주제들이어서 시간이 나면 저도 한번 가볼 생각인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시간 나면 많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

 

역시이론지 트랜스토리아

 

 제1호. 특집: 포스트식민주의와 서발턴 연구

 

 제2호. 특집: 식민/포스트식민 역사와 민족주의의 구성적 모순

 

 제3호. 특집: 바바와 그의 외부

 

 제4호.  특집 Ⅰ:  서발턴/여성과 포스트식민적 재현

        특집 Ⅱ: 근대(성)과 폭력

 

 제5호. 특집: 스피노자의 현재성   

 




트랜스토리아 포럼 연혁



제1회: “서발턴에게 역사는 있는가”/ 김택현


제2회: “‘공공 민족주의’ 비판과 한국 민족주의 역사/배성준


제3회: “바바의 탈식민이론과 제3의 공간”/나병철


제4회: “공순이와 여대생 사이에서; 1970년대 여공의 정체성과 욕망을 둘러싼 담론들”/김 원


제5회: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속의 미스터 몬스터와 식민적 환타지를 횡단하는〈하녀〉”/ 주창규


제 6회: “브로델의 역사적 시간개념”/고 원


 


 제7회


 트랜스토리아(TRANSTORIA)

포럼 


 

혼성적 주체와

대항 지구화



 


▪일시:   2005년 10월 29일(토) 14:00~18:00

▪장소: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5층              31512 첨단강의실

▪주최 : 역사이론지 『트랜스토리아』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안내의 글

 

  지난 2002년 민중사와 역사유물론의 재사유를 모색하기 위해 역사이론지 『트랜스토리아(TRANSTORIA)』가 창간된 이후,『트랜스토리아』의 문제의식을 점검하고 토론하는 포럼이 여섯 차례 개최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와 함께 “혼성적 주체와 대항 지구화”를 주제로 제7회 『트랜스토리아』포럼을 마련하였습니다.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2005년  10월  15일


                                            『트랜스토리아』 편집인  김 택 현

 

 

 

포 럼 일 정

 

 

혼성적 주체와 대항 지구화

 

사회: 김 택 현 (성균관대)

 

 

 제1부 발표 및 토론(14:00-16: 20)

 

1. 젠더화된 서발턴 여성의 혼성성과 대항 지구화

      발표:태혜숙(대구 가톨릭대)

      토론:유제분(부산대)

 

 

 2. 다중: 지구화 시대의 변혁 주체

      발표:정남영(경원대)

      토론:김경수(고려대)

 

 

 3. 쌍-빠삐에(sans-papiers): 결정 불가능한 것의 정치

       발표:서용순(영남대)

      토론:박대진(서울대)

 

 

  제2부 종합토론(16:3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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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파시즘 체제를 둘러싼 논점들- 홍양희의 문제 제기에 답함
전시동원체제와 파시즘 구분해야

2005년 10월 02일   권명아 연세대 이메일 보내기

▲권명아 / 연세대, 국문학 ©
필자의 '역사적 파시즘: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 정치'에 대한 홍양희의 서평은 일제 말기 연구에 있어서 고민해야 하는 핵심적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홍양희가 제기한 논점들에 대한 답변을 중심으로 필자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홍양희가 제시한 세 가지 논점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시 동원 체제의 역사적 특성을 이전 시기와 관련하여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홍양희의 문제제기는 주로 이전 시기의 특성과의 연속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좀 더 구체적인 논점을 토대로 논의 구도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인다.


이는 먼저 일본의 동화 정책과 황민화 정책을 어떤 관련 속에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담고 있다. 이 논점은 대만과 조선의 식민 경험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논점이다. 필자의 경우는 황민화를 동화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과 입장을 달리하면서(물론 황민화가 동화와 전혀 이질적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황민화 고유의 특성과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즉 필자의 논의는 황민화와 동화의 차별성, 특히 황민화가 사회적, 정치적인 적대적 갈등을 정체성 투쟁으로 전환시켜서 황민화를 존재론적 투쟁으로 만드는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또 전시 동원 체제와 이전, 이후 시기와의 관계는 전시 동원 체제의 주체화의 역학(황민화와 관련된)이 근대 체제의 일반적 속성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가, 또는 파시즘 체제의 특수성에 의해서 더욱 지배적으로 규정되는 것인가 라는 논점으로 구체화 될 수 있다. 일례로, 가족이 사회의 기초 단위로 설정되는 것은 지역을 막론하고 근대 체제 일반의 공통적 성격이다.

그러나 가족을 국민 구성의 기초 단위로 정치화하는 가족 국가주의는 일본의 근대 구성과 식민 통치의 종별적 성격이기도 하다. 필자의 가족 국가주의에 대한 논점 역시 이 문제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또 이는 파시즘 체제가 근대성의 일반적 특성에 의해 규정되는가, 혹은 파시즘 체제 고유의 성격이 보다 지배적인가 하는 논점을 내포하는 것이다.

필자는 파시즘 체제(역사적 파시즘 체제)를 근대성의 예외적 국면으로 보는 관점과는 기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즉 파시즘 체제는 근대성의 역사적 전개 과정의 산물이라는 관점에 필자는 서 있다. 그러나 필자는 동시에 파시즘 체제의 역사적 특성이 모두 근대성 일반의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점 또한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파시즘을 근대성의 경향적 특성으로 탈역사화하는 관점을 비판하면서 역사적 파시즘 체제라는 규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시기 구분의 문제는 전시 동원 체제의 특성을 전시 체제 일반의 공통적 특성, 식민지 조선의 고유한 특성과 관련하여서 어떻게 구별적으로 논의할 것인가 하는 논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논점과 관련하여 홍양희가 사례로 제시한 전시 체제하 여성 동원의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남성들이 전선에 나간 후방의 노동력 부족을 위해서 여성을 동원하는 것은 이차 대전기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양상이다.

그런 점에서 홍양희가 제기하는 후방의 여성 동원 문제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이라기보다 세계 대전기의 전시 체제의 공통적 속성이다. 오히려 가정의 정치화와 여성 동원은 이러한 세계 대전기 전시 체제의 공통적 속성과 함께,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의 특성으로서 가족 국가주의와 일본 여성과 달리 정치적 무능력자로 규정된 식민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사이의 불일치와 같은 문제들이 더욱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필자는 주로 이 점을 중요하게 논의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전시 체제의 동원 논리 속에서 일종의 정치 세력화와 권력을 얻게 되는 과정이 일본 여성들과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이 과정에서 일본 지식인 여성-조선 지식인 여성-조선의 이른바 여성 대중들 사이의 위계화와 서열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지 후방의 여성 동원을 강조함으로써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인다.


두 번째 논점은 필자의 문제틀이 자칫 친일 협력의 문제를 어쩔 수 없는 행위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의 논의에서 중요하게 규명하고자 한 문제는 바로 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 추구 행위와 적대적 그룹에 대한 비난과 배제와 말살을 “어찌할 수 없음”으로 자기 합리화화는 정당화 기제에 대한 것이다.

이는 바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살아가고자 했던 이들의 자기 정당화 기제라는 것이지, 이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실상 필자가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은 민족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연구를 비판하는 것이 마치 이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이 폭력에 동참한 것으로 환원하는 논리이다.

또한 이 연장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이 파시즘에 동참하게 되는 요인들과 엘리트 집단의 동기, 욕망 구조들을 반사상이나 대칭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제기하는 중요한 논점이다. 이들이 결과적으로 시대에 편승했다는 동일한 현상을 보이지만, 실제 그 내부의 욕망, 배제 기제, 동기, 정체성 불안의 요인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실상 젠더사가 차이화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적인 갈등과 배제의 폭력적 투쟁의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서다. 또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이 모든 차이화 과정을 대칭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가 제기하는 중요한 논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5 Kyosu.net
Updated: 2005-10-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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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10-09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요~~ ㅋㅋ
 

 

 

논쟁서평: 『역사적 파시즘-제국의 판타지와 젠더정치』(권명아 지음| 책세상 刊 | 2005| 511쪽)
단절론적 시각 문제..."무엇이 최소한의 생존이었는가"

2005년 10월 02일   홍양희 한양대 이메일 보내기

이 책은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을 파시즘의 유산이 살아 숨쉬는 사회로 보면서 그러한 폭력의 시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자기 성찰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그 기원을 일제말기 전시동원체제의 경험에서 찾으면서, 그것의 역사적 특성을 파시즘과 젠더정치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수탈과 저항, 혹은 억압과 동의의 구조로 일제 말의 파시즘 체제를 분석하는 역사 연구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분법적 연구는 파시즘 체제의 폭력성을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실제 모습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파시즘의 속성, 즉 파시즘이 젠더, 지역, 인종 등을 기제로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전환시키는 체제라는 바로 그 점에서 비롯된다. 총후부인, 청년, 남방담론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따라서 전시동원체제 하의 파시즘 체제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 식민지라는 집단들 내부에 존재하는 정체성 투쟁의 양상들을 분석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파시즘 체제를 유지시키고 대중을 그것에 합류하게 하는 근본 요인이 그들 사이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이기려는 욕망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시선을 끄는 대목은 총후부인이나 스파이 담론을 통해 여성의, 모던보이나 애국청년 담론을 통해 남성의, 좋은 일본인 되기를 각각 분석한 2부와 3부의 젠더 관련 부분이다. 젠더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정체성 집단간의 갈등과 투쟁의 모습을 포착한 점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젠더사 연구에서 한 걸음 나아간, 이 책이 지닌 차별성 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황민화 정책과 그에 대한 저항이나 협력이라는 접근 방식과 달리, 식민지인들의 내부 투쟁을 통한 자발적 일본인 되기란 시각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 연구자, 특히 한국사 연구자로서 이 책이 준 유용한 자극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전시 동원 체제기와 그 이전 시대를 너무 단절시켜 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특히 총후부인 담론이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여성 정체성을 혐오하는 담론이었다는 점과 전시동원체제 하에서 가정은 새로운 정치적 단위가 되었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물론 총후부인은 전시체제기에 나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가정 주부와 여성해방적인 신여성 사이의 정체성 투쟁이 과연 이 시기에 한정된 담론이었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은 식민지 초기부터 1920년대의 교과서와 잡지에도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가정을 둘러싼 젠더정치는 일제 말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젠더로 이분화된 국가 분업주의는 근대국가의 중요한 시스템이었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가정은 국가로부터 개개인을 국민으로 자기 복제해 내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사적인 공간으로 은폐되어 있지만, 사실상 공적인 세계에 처음부터 열려있었다. 최근의 젠더사 연구가 사적 생활조차 정치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총후부인이 그 이전의 여성 담론과 구별되는 것은 남자들의 빈공간을 메우기 위해 사회적인 진출을 일정하게 용인하였다는데 있다. 요컨대 저자는 여성들 사이의 정체성 투쟁과 가정의 정치적 성격이 제국주의의 폭력성에서도 기인한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둘째, “파시즘 체제의 욕망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제한된 상황에서 그 폐쇄된 상황에서 적어도 자신을 파시즘적 폭력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도덕은 없는가”라는 논리 모순적 화두에 담긴 문제점이다. 이 질문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의하면 파시즘 체제는 국민의 일상 전체를 잠재된 적에 대한 공포를 통해 규율함으로써 일상적으로 끝없이 좋은 일본인 되기의 실천을 수행하게 하는 주체화의 역학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은 그 체제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고, 부지불식간에 일본 파시즘에 공범이 되고 만다.


이 논리의 연장선에 서면 친일 협력의 책임 부분에서 전시동원체제 이전과 이후의 친일 행위를 분리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후의 친일은 책임을 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 자체가 정당화된다. 저자의 고민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나마 “파시즘의 유산과 최소한이나마 거리를 두게 해주는 최소한의 도덕은 어쩌면 자기 안의 무한 증식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 그것인지도 모른다”는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 경우 이번에는 무엇이 최소한의 생존이었는지 그 기준을 세워야 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일상적이고도 구조적인 폭력 체제 안에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결론에 공감하면서도 저자의 화두에 공허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째서 일까.

홍양희/한양대·한국근대사

필자는 한양대에서 ‘조선총독부의 가족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기 호적제도와 가족제도의 변용’, ‘식민지시기 남성교육과 젠더’ 등이 있다.


©2005 Kyosu.net
Updated: 2005-10-0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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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10-09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오랜만이죠, 따우님.
ㅎㅎㅎ 그런데 일단 퍼가시려면 추천도 하나 해주셔야죠~~
 

 

 

1세기 넘게 지속된 낡아빠진 우상을 땅에 묻을 시간인가?
해외논쟁_ 프랑스, 정신분석학이냐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냐

2005년 10월 02일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이메일 보내기

프랑스의 정신의학자는 대략 1만3천7백50명 정도(70%가 정신분석학적 경향)이고, 그밖에 심리학자나 정신요법의사는 8천2백50명에서 1만4천명에 이른다. 전자만 따질 경우, 프랑스에는 주민 7천5백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가 있으며, 후자를 포함할 경우, 4천1백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가 있게 된다. 4만5천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를 가진 미국과 비교한다면, 프랑스에서의 정신분석학의 위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종주국이라 할 만한 프랑스에는 그것을 비판하는 담론들도 끊이지 않았다. 사르트르,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등은 대표적인 예다.

지난 9월 1일, "프로이트 없이 살고, 사유하고, 건강해지자"라는 부제를 단 ‘정신분석학 흑서’가 프랑스내 정신분석학 경향에 대한 대대적 비판을 감행하며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8백30쪽에 이르는 이 두꺼운 책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인식론적, 철학적, 정신요법적 비판들 뿐 아니라, 정신분석치료 과정에서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 환자나 주변인들의 증언들까지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의 중심에는 미국에서 발전된 행동주의적 -일정한 환경에서의 자극과 그에 대한 관찰 가능한 반응에 주목- 이고 인지적인- 인간의 마음을 정보 처리하는 인지체계로 간주, 인지과정에 대한 단계적 분석- 정신치료 경향의 정신의학자들이 있다.


‘르 푸앙’(Le Point)지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정신분석학자 자크-알랭 밀레르는 본 논쟁의 쟁점이 '정신적인 것을 매매'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논박했다. 지난 2003년에는 정신치료사 자격증에 대한 대대적인 조정을 위한 아쿠와예법이 통과됐으나, 아직 시행안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이며, 2004년 6월 프랑스 국립 보건 의학 연구소(INSERM)의 보고서는 행동-인지 치료가 '관계주의적인 심리치료'(곧, 정신분석학)보다 효과적이라고 발표했다. 이처럼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학술적인 차원에 국한되기 보다는, 의료보험체계의 위기에 봉착한 프랑스 정부의 대책 마련과 맞물려 있다. 즉, 어떤 치료 방식이 '효율적'이고, '저렴한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쟁점은 정신분석학과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 경향 사이의 학술적 쟁점 및 토론을 저해하는 형국이다. "정신치료가 전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되어버렸으며, 순전히 '의학적'으로 되돌아가며 행동주의에 복속되고 있는 중"이라는 엘리자베스 루디네스코의 지적과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는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중시하는 학습과 조절의 기술이지 정신 치료가 아니다"라는 자크-알랭 밀레르의 지적은, ‘정신분석학 흑서’의 저자들이 보기엔 행동-인지주의 경향에 대한 선험적인 비판일 뿐, 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빠져있다.


다시 한번 불가능한 대화로 치닫고 있는 현 논쟁은 사실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숨'에 비유됐던, 정신(psuche)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였다.

사람들마다 그것을 가슴이나 심장에, 때로는 머리에, 때로는 온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으로 간주하고자 했으나, 정신 자체는 언제나 비록 인간 '안에' 존속하기는 하나, '비가시적이고', '지정 불가능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원리'이자, 신체를 통해 '징후'로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분석대상 자체, 즉 '정신'을 지정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과학을 비단 칼 포퍼처럼 반증가능성을 통해 정의하지 않고, 그 단어의 원래적인 의미에서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을 배제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더라도,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범위에 넣을 수는 없게 되는 셈이다.

또한 정신을 '분석'한다고 할 때, 분할은 언제나 무한히 가능하며, 징후 역시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측면에서 그 분석은 '종결될 수 없는' 것이자 그 치료는 '끝날 수 없다'는 아포리가 존재한다. 정신분석의는 인간의 마음을 치료함에 있어서 시시포스가 되기를 자처하지만, 극도의 우울증이나 정신질환, 각종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그 증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여기에 치료 과정이라는 시간을 감내하기 위한 심적 고통 및 치료비 부담이라는 경제적 고통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반면, 정신치료는 정신에 대한 iatros적(의사 혹은 의학적) 접근을 주장한다. 정신분석이 과정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정신치료는 무엇보다 치료 및 결과가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정신치료는 해석자의 입장에 서지 않고 조건을 부여해 유리한 결과를 유도해내는 한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도 '정신'의 아포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인지심리학에서 하는 것처럼 두뇌(가정된 정신의 위치)에 대한 생물, 생리학적 연구 혹은 정보처리 메커니즘 추적을 통해 모든 것이 밝혀질 수는 없다.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한계에 위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 흑서’ 혹은 미국에서 주류적인 행동주의-인지주의 정신치료가 은밀히 제기하는 '빠른' 치료와 '저렴함'이라는 경제적 논리가 정신분석학이라는 다른 접근 방식의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해야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의 민주주의를 깨트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아버지의 이름'에 기대온 정신분석학은 미셸 또르가 지적하듯 아버지의 지위의 쇠락 및 새로운 父性 관계의 조직화에 대해 답해야 하며, 디디에 에리봉이 지적하듯 동성애를 비롯한 사랑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할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이냐 정신치료냐라는 이접적인 질문은 정신분석과 치료라는 연접적인 실천으로 바뀌어야 한다.

양창렬 / 프랑스 통신원·파리 8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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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10-05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글이네요!

balmas 2005-10-05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죠? 우리나라에서는 정신분석이 주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통해
수용되고 있기 때문에, 저런 문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정신분석의 본산이라 할 만한 프랑스에서 앞으로 정신분석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내심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답니다. ^0^

가을산 2005-10-0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내일 제대로 읽어볼래요....... 쫌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