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메일 주소로 아래와 같은 메일이 왔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조사와 해명, 해결의 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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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박물관 한홍구 이사의 전횡과

시민단체 사유화에 대한 사무처 입장

 

 

2013년 평화박물관에서 근무하던 활동가 6명이 한홍구 당시 상임이사의 인사 전횡에 항의하며 평화박물관을 떠나는 사태가 있었습니다이는 한 활동가에 대한 부당한 권고사직에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당시 활동가들은 평화박물관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단체가 한홍구 당시 상임이사에 의해 사유화되었다고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가슴 아픈 사태였습니다이러한 사태에 대해 한홍구 당시 상임이사가 책임을 지고 상임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평화박물관은 정상화되는 듯 하였습니다그러나 평화박물관이 한홍구 현 이사의 독단에 의해 좌우되는 고질적인 병폐는 해결되지 않았으며이 때문에 지금 평화박물관은 또 다시 파행을 겪고 있습니다. 2016년 328일에 열린 제34차 이사회는 이사들의 언쟁 속에 파행되었으며한홍구 이사는 이해동 대표의 방조 또는 묵인 아래 사무처장에 대해 보직 해임을 하고사무처에 대한 업무 정지사무처 폐쇄를 지시하는 등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고 있습니다이는 전적으로 한홍구 이사의 독단과 전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013년 권고사직, 2016년 보직해임

 

2013년 활동가 집단 사직 사태 직후한홍구 이사는 상임이사직을 내려놓았지만이후에도 변함없이 상임이사아니 그 이상의 역할을 지속했습니다평화박물관의 인사재정활동 등은 모두 한홍구 이사 1인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한홍구 이사의 독단과 전횡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사업(이하반헌법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2015년 9월 이후더욱 노골화본격화되었습니다.

이사회 결의는 물론기본적인 논의와 보고도 없이반헌법 사업은 별도의 사무처를 구성하였습니다또한 재정도 별도로 운영하였습니다반헌법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논의나 결의도 없이 활동가를 상근반상근아르바이트를 포함해 16명 이상 늘렸고평화박물관 사무처 활동가를 반헌법 사업에 데려가려는 과정에서 이에 항의하였지만결국 해당 활동가가 사실상 부당해고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한홍구 이사는 줄곧 사무처와 갈등을 겪게 됩니다한홍구 이사는 마치 사무처의 정당한 문제제기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사무처가 회원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신입 회원을 등록하지 않는 방식의 업무 해태를 통해 평화박물관에 재정적인 손실을 끼쳤고심지어이 액수가 2년 동안 3억 원에 이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음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평화박물관의 단체 규모로 보나무엇보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활동가들이 회원가입서를 받아두고도 입력을 하지 않아서일부러 평화박물관에 재정적 손해를 입혔다는 한홍구 이사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평화박물관 사무처는 단체의 감사에게 감사요청을 하기도 하였고이 문제에 대해 이사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논의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3월 28일 열린34차 이사회에서 감사는 감사보고서를 통해 회원관리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인하였고다른 이사들의 항의와 권유로 한홍구 이사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는 재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사무처 활동가들에게 공개 사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더 큰 문제는 이후에 벌어집니다34차 이사회에서 한홍구 이사가 사과하며 사태가 일단락되자이해동 대표는 사무처를 음해했던 한홍구 이사를 상임이사로 임명하고사무처장을 보직해임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합니다그러나 이해동 대표의 이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이 안건은 다른 이사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결정이 보류되었고사무처를 비롯한 인사 문제 등을 논의할 소위원회를 3인의 이사들로 구성하여그 소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하기로 하고이사회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이사회에서 결정사항을 위임한 소위원회는 아예 소집조차 되지 않았습니다이런 상황임에도 한홍구 이사는 이사회 회의 이틀 후이해동 대표의 지시사항이라며사무처에 업무정지를 명령합니다이는 이사회 결정을 정면으로 뒤엎은 결정입니다.

대표의 업무정지 지시 이후 사무처는 일손을 놓고다만 다른 명령이나 업무지시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이러한 상황이 2주 동안 계속되자사무처는 4월 18일 이사진 앞으로 평화박물관 정상화 호소문을 보냈습니다호소문을 보낸 지 3시간 만에 이해동 대표는 이메일을 통해 사무처장을 보직해임한다고 통보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이사회에 출석하여 회원가입과 관련한 사무처의 업무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감사보고서를 제출했던 감사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한홍구 이사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감사보고서를 보냅니다이러한 상황에서 한홍구 이사는 이해동 대표와 함께 5월 3일 제35차 이사회를 소집하였습니다이는 제34차 이사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인사전횡과 해직사태

 

한홍구 이사의 인사 전횡은 2013년 권고사직과 이로 인한 6명 활동가의 집단 사직그리고 반헌법 사업과 관련한 활동가의 부당해고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무처에 대한 업무정지와 사무처장 보직해임만이 아니었습니다한홍구 이사의 인사전횡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습니다한홍구 이사는 2015년 평화박물관이 주관했던 손배가압류 관련 시민운동 손잡고의 사업 담당 활동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폭력적 언행을 반복했고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이 조직에 대한 실망으로 반복적으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한홍구 이사는 선의를 갖고 시민운동에 참여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갑질을 반복했습니다부당한 업무지시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한홍구 이사는 부당한 업무지시에 대해 사무처장이 문제제기를 하자, “삼성도 이병철이 결정하면 그 밑에 사장은 따르는 거다라며 윽박지르기도 하였습니다이 발언은 평화박물관이 한홍구 이사 개인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발언입니다인사전횡을 일삼고반발이 있으면 사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사회를 움직여 자신의 전횡을 절차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은 손잡고’ 사업이 비판하고 있는 악덕 재벌기업의 행태와 꼭 닮아 있습니다한홍구 이사는 해고를 하게 되면법률적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이유로권고사직이나 보직해임 등을 남발하였고이는 13명의 이사 중 한 명에 불과한 한홍구 이사가 법률적으로나 평화박물관 정관으로나 사회 상규 상 결코 가질 수 없는 권한이었습니다없는 권한을 남용한 것입니다.

 

 

단체 운영의 사유화

 

한홍구 이사는 평화박물관이 공익단체로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는 논의구조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고 무력화시켰습니다사단법인 설립 당시 300현재 5,000명에 달하는 후원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10여명의 회원만으로그것도 형식적으로 치르고 있습니다. 2013년 부당한 권고사직과 관련한 사무처 활동가 집단 해고 사태 당시에도 그랬지만이사회와 대표는 한홍구 이사가 열심히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원하는 대로 결론을 내주기만 하였습니다정관은 있지만형식적인 것일 뿐실제는 모든 운영권과 모든 결정권이 한홍구 이사 1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평화박물관의 공식명칭은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입니다그렇지만평화박물관의 설립 목적과 무관하게평화박물관 건립기금은 현재한홍구 이사의 개인 연구실 전세금으로 묶여 있습니다이 공간을 반헌법 사업과 함께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한홍구 이사는 안방을 자신의 침실로 사용하고,개인 연구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그 이전에 시민단체가 관리비도 많이 드는 50평이 넘는 고급 아파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큰 문제입니다. 5천원, 1만원씩 후원금을 내는 많은 시민들의 정성이 한홍구 이사 개인을 위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한홍구 이사는 제34차 이사회에서 아예 평화박물관 사업을 없애자는 제안을 하고 현재 사무처 폐쇄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단체의 설립목적이며단체명이기도 한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을 위해 회원들의 회비를 받아놓고는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그냥 접어버리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이는 10년 넘게 평화박물관 사업에 참여했던 회원들을 우롱하는 일입니다아무리 단체를 사유화했다고 해도많은 회원들과의 약속을 이렇게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일단 아무 것이나 트집을 잡아 사무처장에게 인사와 급여에서 불법적 불이익을 주고사무처 전체의 업무를 정지시키고그것도 모자라 아예 사무처를 폐쇄하겠다는 한홍구 이사의 작태는 재벌 대기업의 반인권적 노동자 탄압보다 훨씬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재정의 사유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한홍구 이사가 평화박물관 재정을 자의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한홍구 이사가 지금까지 평화박물관의 회원 확대를 위해 노력해 온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공익단체가 공익적 목적으로 모금한 자금은 공익적 활동에 쓰여야만 합니다평화박물관의 회비는혈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돈입니다그래서 재정을 운용할 때는 신중을 거듭해야 하고반드시 목적사업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저희는 평소 방만한 재정운용을 했던 한홍구 이사가 갑자기 회원관리 문제를 두고 사무처를 공격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회원관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 인식했다면당연히 회비가 제대로 쓰이지 않도록 했던 자신의 행태부터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한홍구 이사는 이미 퇴직했으며 평화박물관에 근무하지도 않는 전임 사무처장에게 급여를 지급하라는 등의 부당한 업무지시를 남발했습니다이렇듯 지난 10년 넘는 세월 동안 공과 사의 구분도 없이 자의적으로 운영되는 평화박물관 재정 운용 실태는 즉각 정상화되어야 합니다.

 

평화박물관은 작은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공익단체

 

사무처장 보직 해임은 한홍구 이사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무처장에 대한 보복성 조치이자 해고에 준하는 결정입니다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이미 평화박물관 이사들의 사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지난 34차 이사회에서는 두 명의 이사가 사임 의사를 밝혔고평화박물관 내부의 파행이 거듭되자또 한 명의 이사가 개인 성명을 발표하고 사퇴하였습니다한홍구 이사가 독단과 전횡을 거듭하기에 생긴 일입니다공익단체 중에서 평화박물관처럼 활동가와 이사들이 잇따라 사퇴를 반복하는 사태가 있었던 단체는 일찍이 없었습니다이런 사태가 반복되는 것은 한홍구 이사의 독단과 전횡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박물관 내부 문제와 관련하여 끝도 없이 논란을 일으키고평화박물관의 설립 목적을 위해 헌신하겠다 다짐했던 젊은 활동가들이 상처를 받고 단체를 떠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거듭 말씀드립니다만이는 전적으로 한홍구 이사의 책임입니다당장 지난 2년 동안 벌써 네 차례나 인사 파행이 있었고이 과정에서 자의든 타의든 평화박물관을 떠난 활동가가 10여 명이 넘습니다.

한홍구 이사는 평화박물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렇지만그의 신분은 그저 여러 이사 중의 한 명일뿐이기에지금까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고또한 어떤 책임의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한홍구 이사의 이런 전횡이 가능했던 것은 이해동 대표의 묵인과 방조 때문입니다.

평화박물관은 시민들이 다만 평화박물관의 설립목적에 동의해서, 5천원, 1만원씩 회비를 내면서 운영하는 공익단체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한홍구 이사와 이해동 대표는 평화박물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합니다다시는 평화박물관이 독단과 전횡 때문에 회원들의 기대와 바람을 외면하고공익단체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파행을 거듭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한홍구 이사와 이해동 대표의 즉각 사퇴를 통해 평화박물관이 조속히 정상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 저희 평화박물관 사무처 활동가들은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했습니다저희는 공익단체의 대부분이 그렇듯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또한 인간적인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데다한홍구 이사의 개인 비서 역할이나 수행해야 하고잠자코 그의 부당한 지시를 따라야 하는 상황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전횡에 눈감는다면 다음에 오게 될 활동가들이 또다시 상처를 받고 저희가 겪었던 좌절과 슬픔분노를 되풀이할 것이란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부디 이 글을 통해평화박물관이 회원들의 정성으로 운영되는 공익단체답게 과거의 악행에서 벗어나 신뢰받을만한 단체로 거듭나게 되었으면 합니다평화박물관이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고맙습니다.

 

2016년 5월 10

 

평화박물관 사무처 활동가 일동

석미화 최성준 김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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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에 "음 ... "님이 댓글을 다신 것을 보고 생각이 나서 한 말씀 드립니다. 


이것은 꼭 "음 ..." 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제 블로그에서 제 글에 대해 이런저런 비평이나 


반론을 제시하는 분들 모두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제 블로그를 오래 전부터 보아온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블로그를 10년 넘게 하면서 몇 차례에 걸쳐 제 블로그 상에서 


이런저런 온라인 상의 토론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개중 어떤 것은 논문 1편 이상의 긴 분량을 지닌 토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 차례 토론을 해본 결과 얻게 된 결론은, 온라인 상의 토론이 상당히 소모적이고 별로 유익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가 열심히 논거를 들어서 반론을 해도, 상대방이 제 반론에 대해 납득할 만한 재반론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논점이 자꾸 빗나가는 논의들이 이어지면서 오히려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던 기억만


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블로그 상에서 온라인 토론이나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점은 제가 이미 몇 차례 제 페이퍼에서 피력한 바 있습니다.  



제가 비평이나 반론을 제시하는 분들께 가급적 이런저런 매체에 공식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게 저에게도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께도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반론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학술지나 계간지 또는 기타 매체에 반론을 제시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인데, 


다만 저는 제 블로그의 글에 댓글 형태로 제기된 반론이나 비평들에 대해서는 별로 답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비평이나 반론들 중에는 조금 더 논점을 발전시켜 보면 흥미로운 논쟁 거리가 될 만한 것들도 있는데, 


제 블로그에서 비평이나 반론을 제기한 분들 중 그것을 실제로 논문이나 글로 발전시킨 분들은 없는 것 같아서 


저는 그것이 오히려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런저런 매체에 공식적으로 반론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조금 더 논점을 정교하고 분명하게 전개해달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저도 더 분명하게 잘 다듬어진 논거를 바탕으로 


제 답변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블로그는 '공론장'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알라딘 서점을 이용하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시작하게 된 공간이고, 


제 글을 읽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이런저런 매체에 발표한 글들을 가급적 올려두는 공간입니다. 


제 글을 읽고 이런저런 비평이나 반론을 댓글로 다는 것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시되, 


제가 꼭 거기에 대해 답글이나 재반론을 달거라고 기대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ㅎㅎ 


제 답글을 간절히(?) 원하신다면, 이런저런 매체에 투고하시고 저에게 알려주시면 제가 가능한 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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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2016-04-05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짜증스러우시겠지만 마지막으로 댓글 한번 더 달겠습니다.

온라인 토론이 소모적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라인 토론이 너무 소모적이므로 토론은 지양하겠다고 한 마디 하시면 못 알아듣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냥 서로 예의만 지키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제 댓글은 정동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마스님에게 단지 ˝알려˝ 드리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왜 꼭 다른 사람들이 발마스님께 토론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제 답글을 간절히(?) 원하신다면˝ 이란 표현을 쓰실 수가 있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예의를 지키세요.

소조 2016-04-05 09:17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음...님의 덧글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제 답글을 간절히(?) 원하신다면˝이라는 표현은 유감스럽습니다. 온라인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어리둥절. 이곳이 개인적인 곳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내용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ㅈㅈ 2016-05-0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의라... ㅎㅎ
음...님이 애초 ˝너무 성급한 비판˝이라느니
˝원고 게재를 철회하는 편이 낫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을 때가
더 예의 없어 보이는데요?
 
 전출처 : balmas님의 "현대시학 4월호-정동인가 정서인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초보적 논의"

반론할 게 있으시면 여기 댓글 달지 마시고 [현대시학]에 기고를 하세요. [현대시학]에서도 환영을 할 겁니다.

저야 어차피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해 더 글을 쓸 생각이니까, 반론을 해주시면 저도 기꺼이 답론을 드리죠.


[현대시학]이 아니라 다른 매체에 기고하실 거라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꼭 답론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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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2016-04-04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답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반론을 댓글로 달든 말든은 제 소관 아닐까요?
발마스님께서 그에 답하든 말든은 발마스님의 소관인 것처럼요.
발마스님께서, 저널에 실리는 글에 대해서는 온라인 토론을 지양하려 한다는 등으로 양해를 구하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예의였을 텐데요...

이런 주제를 가지고 저널에 기고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애초 댓글을 단 것도 발마스님을 만류하려 한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발마스님의 글에서 본 것은 한국 인문학계의 고질적인 풍토병이었습니다. 토론 상대를 미니멈으로 상정하지 마세요(저 사람은 에티카에 대한 초보적 이해도 없다...). 또, 당파성을 드러내지도 마세요(알지도 못하면서 스피노자를 소비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국문학계, 또 이를 조장하는 국내 네그리 학자들...). 한국 인문학계가 아프다면, 바로 발마스님이 옮기고 있는 그 병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에 대한 댓글은 사양할께요. 물론 대댓글을 달든 말든은 발마스님의 소관이겠지만요.

참, 엉뚱한 곳에서 ˝~할게 있으시면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이러 저러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세요˝ 소리를 듣네요. 암튼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ㅈㅈ 2016-05-0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토론 상대를 미니멈으로 상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래 답글이 보여주는 공소한 논리나 지식을 보면 그냥 미니멈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발마스님의 글이 당파성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이셨다니, 참 갑갑할 따름입니다. ㅎㅎ
 

[현대시학] 4월호에 게재될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이 원고는 최근 국문학계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꽤 널리 쓰이는 "정동"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적 고찰입니다. 지면의 제약이 있어서 이 글에서는 간단한 논의로 그쳤는데, 앞으로 다른 지면에서 이 문제를 좀더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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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인가 정서인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초보적 논의


 

 1. 정동?

 

최근 국내 인문학계, 특히 국문학계에서 정동’(情動)이라는 용어가 꽤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 이 낯선 용어[국어사전에서 정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갑자기 일어나는 노여움, 두려움, 기쁨, 슬픔 따위의 급격한 감정.”(다음 국어사전) 그런데 이 단어 자체는 일본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국어사전에서는 영어의 emotion에 상응하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가 인문학자들, 특히 우리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국문학 연구자들이나 비평가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현상은 현재의 한국 인문학에 대해 꽤 증상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른 지면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정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스피노자의 정서론에 관해 다루려고 하는 것은, 요즘 일부 국문학 비평가들이나 네그리 연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정동이라는 용어의 이론적 기원이 스피노자(특히 들뢰즈와 네그리에 의해 재해석된)에 있는데, 정작 이 비평가들이나 연구자들이 스피노자의 정서론에 관해 초보적인 수준에서부터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통해서도 정동에 관한 국내의 용법이 지닌 문제점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한다?

 

여기에서는 한 가지 사례만 지적하겠다. {현대시학} 20161월호에 실린 시와 정동기획의 첫 번째 글인 조강석 교수[이하 인명을 사용할 때에는 직위 없이 사람 이름만 표기하겠다.]정동적 동요와 시 이미지라는 글은 affectionaffect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동 개념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과 이해가 필요할 것이지만 간략히 정리하자면, 정동은 이미지의 순간적이고 정태적인 효과인affection과 대비되는 것으로 한 정서로부터 다른 정서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재해석하고 공교화하는 데 공을 들인 들뢰즈에 의하면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한다.[조강석, 정동적 동요와 시 이미지, 󰡔현대시학󰡕 560, 20161월호, 44.]

 

이 짧은 인용문은 내가 보기에 국내 문학계의 affectioaffectus에 대한 수용과 이해가 지닌 문제점을 아주 집약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리고 조강석이 이 대목의 참고문헌으로 {비물질노동과 다중}이라는 책에 수록된 들뢰즈의 스피노자 강의록 번역문을 제시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 2005.] 이런 오류의 기원에는 조정환을 중심으로 한 국내의 네그리 연구의 들뢰즈 이해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기원적인 오류는 갈무리 출판사에서 연이어 출간된 정동에 관한 일련의 저작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가령 최근에 나온 두 권의 책을 참조할 수 있다.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정동이론󰡕,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및 이토 마모루, 󰡔정동의 힘󰡕, 김미정 옮김, 갈무리, 2016 참조.] 조강석 같은 명민한 비평가가 여기에 담긴 문제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꽤 심각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글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네그리 연구자들의 들뢰즈/스피노자 이해의 오류가 정동에 관한 문제의 뿌리라는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자.


조강석은 인용문에서 두 가지 지적을 하고 있다. (1) “정동은 이미지의 순간적이고 정태적인 효과인 정서affection와 대비되는 것으로 한 정서로부터 다른 정서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며, (2) “들뢰즈에 의하면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 그가 이 인용문에서 afection정서로 옮기고, affect정동이라는 용어로 옮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하의 논의는 이 세 가지 점에 대한 몇 가지 논평이다.


조강석이 앞의 인용문에서 근거하고 있는 문헌은 질 들뢰즈의 정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다. 사실 이것은 들뢰즈가 생전에 따로 발표한 글이 아니라, 그가 1970년대 말~80년대 초 프랑스 뱅센느 대학에서 했던 스피노자에 관한 몇 편의 강의에 대한 녹취록을 편역한 것이다. 이 강의에서 그는 자신의 두 권의 스피노자 연구서에 입각하여[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권순모이진경 옮김, 인간사랑, 2003;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1999.] 아펙치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 개념을 매우 평이하면서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문제는 조강석이 준거하고 있는 들뢰즈 강의록에 대한 저 번역이 초보적인 오역을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2)에서 조강석은 정서와 정동, affectionaffect의 차이를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뭔가 그럴 듯한 대비로 읽힌다. 그런데 과연 봉인하다는 말의 원어는 무엇일까? 번역서 36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자신의 술어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affectio(정서)가 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변경된 신체의 성질을 가리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을 봉인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첫 번째 종류의 관념들이 신체의 정서를 재현하는 모든 사유양식이라고 말하겠습니다.[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비물질노동과 다중󰡕, 앞의 책, 36~37.]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들뢰즈의 이 글을 번역한 역자나 이 대목을 참조하여 글을 쓰는 사람들이 과연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해당 대목의 원문을 한 번 살펴보자. 프랑스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Pour garder la rigueur de sa terminologie, Spinoza dira qu’une affectio indique la nature du corps modifié plutôt que la nature du corps modifiant, et elle enveloppe la nature du corps modifiant. Je dirais que la première sorte d’idée pour Spinoza, c’est tout mode de pensée qui représente une affection du corps.

[Gilles Deleuze, “Cours sur Spinoza”(Vincennes, 1978. 1. 24), webdeleuze.com (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11&groupe=Spinoza&langue=1)(2016.3.7 접속)]

 

In order to preserve the rigor of his terminology, Spinoza will say that an affectio indicates the nature of the modified body rather than the nature of the modifying body, and it envelopes the nature of the modifying body. I would say that the first sort of ideas for Spinoza is every mode of thought which represents an affection of the body.

[Gilles Deleuze, “Course on Spinoza”(Vincennes, 1978. 1. 24), webdeleuze.com(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14&groupe=Spinoza&langue=2)(2016.3.7 접속)]

 

내가 번역한다면, 위의 인용문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서 번역할 것이다.

 

자신의 용어법의 엄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아펙치오는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보다는 오히려 변용되는 신체의 본성을 가리키며, 변용되는 신체는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을 포함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스피노자에게 첫 번째 종류의 관념들은 물체의 변용을 재현하는 모든 사유 양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인용문 가운데 밑줄 친 단어가 바로 봉인하다로 번역된 강의록의 불어 및 영어 단어다. 들뢰즈가 인용된 단락에서 이 단어를 통해 가리키는 스피노자 {윤리학}의 해당 구절은 2부 정리 16 및 따름정리 2이다. 라틴어 원문과 영역문 및 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다.

 

Idea cujuscunque modi, quo corpus humanum a corporibus externis afficitur, involvere debet naturam corporis humani et simul naturam corporis externi.

The idea of any mode in which the human body is affected by external bodies must involve the nature of the human body and at the same time the nature of the external body.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에 대한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본성도 함축해야 한다(2부 정리 16)

[이 글에서 내가 참고한 󰡔윤리학󰡕 원문의 출전은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vol. 2, Carl Winter Verlag, 2015이며, 영어번역은 최근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에드윈 컬리의 번역이다(Edwin Curley, The Ethics, Penguin Books, 1996). 한글 번역문은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국내의 󰡔윤리학󰡕 번역(또는 스피노자 저작 번역) 중에서 학문적으로 신뢰할 만한 번역은 하나도 없다.]

 

Sequitur secundo, quod ideae, quas corporum externorum habemus, magis nostri corporis constitutionem quam corporum externorum naturam indicant.

It follows, second, that the ideas which we have of external bodies indicate the condition of our oen body more than the nature of the external bodies.

둘째, 우리가 외부 물체들에 대해 갖는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의 본성보다는 우리 신체의 상태를 더 많이 가리킨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 2)

 

들뢰즈가 “enveloppe”라고 표현한 것은 정리 16의 라틴어 원문의 “involvere” 동사이다. 이것을 컬리의 영역본에서는 “involve”라고 옮겼고 나는 함축하다로 옮겼다. involvere 동사가 전문적인 의미에 따라 사용되지 않은 이 맥락에서는 포함하다로 옮긴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전문적인 의미로 쓰일 경우 involvere의 뜻은 다음과 같다. “AB의 개념을 함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AB 없이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윤리학󰡕 2부 정리 49의 증명)]


정리 16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될 때 우리는 그 변용되는 것을 지각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인간 신체의 본성과 더불어 외부 물체의 본성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가령 우리가 저녁 무렵에 서쪽 하늘로 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의 눈에는 태양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이 태양에 대한 이미지에는 태양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신체, 곧 우리 시각 기관의 본성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태양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주지 못하며, 우리의 신체의 성질을 반영한 상태로 재현하게 된다.


더욱이 따름정리 2에 의하면, 외부 물체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외부 물체 자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우리 신체의 성질을 더 많이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 35의 주석에서 방금 내가 언급한 태양의 사례를 든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지구 지름의 600배 정도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지구와 태양의 거리다. 오늘날 측정된 거리로는 약 15천만 킬로미터 정도다.] 우리는 마치 200피트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둥근 물체와 같다고 지각한다. 이는 인식의 오류와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구와 태양의 실제 거리를 알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태양이 마치 200피트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지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이렇게밖에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 기관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다.[이 문제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변용의 질서와 연관: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2, 2010, 112쪽 이하 참조.]

 

3. affectio

 

이렇게 본다면, 들뢰즈 강의록 번역에 나오는 봉인한다는 번역은 매우 엉뚱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들뢰즈가 사용한 “envelopper”라는 단어를 그 일상적 의미 중 하나인 포장하다내지 덮다로 이해한 결과 생겨난 오역이다. 2부 정리 16의 밑줄 친 단어를 봉인한다로 바꿔서 한 번 읽어보라. 그 문장이 이해가 되는지.


이제 (1)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강석은 이미지의 순간적이고 정태적인 효과정서affection”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조강석의 규정은 사실 들뢰즈 강의록에 대한 번역문에 의거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번역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의 술어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affectio(정서)가 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변경된 신체의 성질을 가리킨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인용문을 읽고 드는 의문은 정서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변경된 신체의 성질을 가리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이다. 강의록 조금 앞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첫번째 결정에서 정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한 신체의 상태입니다. ... 여러분 신체의 정서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태양이 아니라, 태양의 행위 혹은 여러분에게 내리 쬐는 태양의 효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효과,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 위에 생산하는 행위입니다.[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비물질노동과 다중󰡕, 35~36.]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강의록을 번역한 역자나 이 책을 엮은 엮은이들, 또는 그 독자들은 이 대목을 읽고 무엇을 이해한 것인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우리말에서 정서(情緖)란 어떤 것인가?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1.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2. 지역이나 집단 따위와 관련된 한정적 특성을 가진 성향 3. [심리] 갑자기 일어나는 노여움, 두려움, 기쁨, 슬픔 따위의 급격한 감정”[내가 참조한 국어사전은 포털사이트 다음의 온라인 사전이다. 네이버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 이러한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의 정서는 사람의 마음과 관련된 감정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들뢰즈는 줄곧 affection신체와 관련시킨다. 그것은 한 신체의 상태또는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 위에 생산하는 행위”(‘행위보다는 작용이 더 자연스러운 번역일 것이다)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affection정서라고 번역하고, 또 그 번역을 자연스럽게 인용하여 활용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인용문에 나오는 들뢰즈의 affection에 대한 규정은 {윤리학} 2부 정리 13과 정리 14에 나오는 이른바 자연학 소론의 논의를 가리키고 있다.[지나치는 김에 지적해두자면, 자연학 소론은 스피노자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자연학에 관한 일종의 보론에 해당하는 이 부분의 논의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명칭이다.] 자연학 소론공리 1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Omnes modi, quibus corpus aliquod ab alio afficitur corpore, ex natura corporis affecti et simul ex natura corporis afficientis sequuntur.”] 여기서 내가 변용되는변용하는이라고 번역한 라틴어 동사의 원형은 아피키오afficio(또는 아피케레afficere). 이 동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하다또는 신체나 정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 이러저러한 상태에 이르게 만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주로 후자의 뜻으로 이 동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2부에서는 물체들이나 물체-신체 간의 물리적 작용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고, 3부 이하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어떤 대상에 의해 심리적으로 특히 정서적으로 변화되는 작용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afficio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가 바로 affectio.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에서는 이 단어를 주로 양태와 동의어로 사용하데, 2부에서는 물체나 신체 사이의 물리적 작용 및 그것이 남긴 흔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따라서 들뢰즈가 인용문에서 언급하는 affectio는 물체와 물체 또는 물체와 신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작용을 가리키는 용어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그러면 손이 시리고 내 살갗에 좁쌀 모양의 도톨도톨한 소름이 돋고 입에서는 입김이 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affectio. 또한 이런 예를 생각해보자. 조용한 독서실에서 갑자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노래 소리가 나의 청각을 자극하면서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고 나를 불쾌하게 만들어 누구야?”라고 말하게 만든다. 반면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강남스타일은 똑같이 나의 청각을 자극하지만, 나를 흥겹게 하면서 내가 몸을 꿈틀거리게 만든다. 이것도 역시 affectio. 그렇다면 이것을 정서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번역한 것처럼 변용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실제로 위의 들뢰즈 인용문에 나오는 정서라는 단어를 변용이라고 고쳐서 읽어보라. 훨씬 더 내용 이해가 잘 될 것이다.

 

4. affectus

 

위의 인용문에서 조강석은 affect정동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한 정서로부터 다른 정서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정서를 변용이라고 고쳐 쓰면, “한 변용에서 다른 변용으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affect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 들뢰즈 강의록의 논지와 부합하는 것이다. 실로 들뢰즈는 affection, 곧 변용은 신체의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 affect연속적인 변이”, 곧 행위 역량의 증대나 감소를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affect 또는 라틴어로 하면 affectus의 정확한 의미를 해명하는 것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6) 7장을 참조.] 하지만 초보적인 논의의 차원에서 본다면 들뢰즈의 규정은 통찰력이 있고 유용한 규정이다. 문제는, 행위 역량의 증대나 감소를 나타내는 affect정동이라는 낯선 용어로 규정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정서또는 감정이라는 흔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간단하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가 affectus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마지막에 일종의 부록을 제시하고 있다. 이 부록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이 3부에서 논의했던 정서들을 모두 열거하면서 각각의 정서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때로는 그 정의에 대한 보충 설명을 붙이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affectus는 바로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미움, 좋아함, 싫어함, 희망, 공포, 안도감, 낙담, 만족, 실망, 연민, 호감, 분개, 비하, 시기심, 동정심, 자족감, 자괴감, 후회, 자만, 자기비하, 자부심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정서 내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아닌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슬픔, 미움, 싫어함, 공포, 낙담, 실망, 분개, 비하, 자괴감, 후회 같은 정서는 우리의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정서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정서를 겪을 때, 또는 이러한 정서들로 변용될 때 우리의 행위 역량은 감소하고 우리의 수동성은 더욱 강화된다. 반면 기쁨, 사랑, 좋아함, 희망, 안도감, 만족, 호감, 자족감 같은 정서는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정서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정서들로 변용될 때 우리는 여전히 수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행위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영양분이 좋은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기쁨과 사랑, 만족 같은 정서로 변용되면서 우리의 행위 역량이 증대함을 느낀다. 반면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할 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수밖에 없을 때, 불쾌한 소음에 시달릴 때, 매연과 황사, 먼지로 뒤덮인 거리에서 장시간 일을 해야 할 때,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겨우 끼니를 때워야 할 때 우리는 슬픔과 미움, 분노, 낙담, 자괴감 등으로 변용되며, 우리가 무력해지고 나약해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에게 정동이라는 낯선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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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6-04-02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갑자기 `정동`이라는 말들이 쓰이기 시작해서 안그래도 궁긍했습니다.
전 저만 무식한 줄 알았는데....

balmas 2016-04-02 21:26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대로 그게 ˝정동˝이라는 말의 가장 불쾌한 정치적 효과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언중을 무식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또는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리는 ...

음... 2016-04-04 17: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성급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원고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원고 게재를 철회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1). 정동이란 말은 정신분석학 관련 문헌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이나 스피노자의 용례를 들어 이 개념의 사용을 비판하고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은 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2). 감정, 정서, 정동... 이런 개념들은, 여전히 애매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구별가능한 개념들입니다. 자극자가 나의 신체에 일으킨 변용이 감정입니다. 나의 정신에 의해 파악된 감정이 곧 정서입니다. 정동은 좀 더 복합적인 현상을 포착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우울이나 불안 같은 것. 거의 준-실체적인 것. 정동을 무의식과의 관련 하에서, 혹은 신경 생리학적으로 특수한 기제와의 관련 하에서, 혹은 죽음에의 존재라는 식으로 철학적 장치를 통해 이해하려는 노력들은 정동이 정서와 전적으로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정동은 정서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겠지요. 그런데 발마스님이 이런 입장이신가요?

3). 정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다시 바라보시지요.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는 코나투스와의 관련 하에서, 역량의 증대와 감소라는 동적인 측면을 포착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말한 정동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부록에 잔뜩 나열된 항목들을 다시 살펴보세요.

4). 그렇다면 정서를 봉인으로, 정동을 이행으로 규정한 것은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에티카 본문은 발마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문제는 위에 인용하신 학자들이 그런 초보적인 이해도 하지 못한 바보들이라고 예단을 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적 오독의 가능성을 열어 둘 것인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무조건 후자를 먼저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야 토론이 생산적이 되고 독자나 청중은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balmas 2016-04-04 20:30   좋아요 2 | URL
반론할 게 있으시면 여기 댓글 달지 마시고 [현대시학]에 기고를 하세요. [현대시학]에서도 환영을 할 겁니다.

저야 어차피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해 더 글을 쓸 생각이니까, 반론을 해주시면 저도 기꺼이 답론을 드리죠.

[현대시학]이 아니라 다른 매체에 기고하실 거라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꼭 답론을 드리겠습니다.

ㅈㅈ 2016-05-05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성급한 비판˝ ㅎㅎ
`무사`들과 달리 `문사`들의 싸움에 진정성과 삼가는 마음이 없어 보이는 것은
칼은 상대를 벨 수 있지만 말은 아무리 베어도 베어지지 않기 때문일까요.
문사의 폐습 중 하나는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며 혹은 모른 채 아무에게나 칼을 겨누고,
수십 번 베이고도 이겼다는 착각 속에(정신 승리!ㅎ) 서서히 경화되어/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음... 님의 반론을 보면 이제 갓 호구를 입은 이가 무게도 감당 못할 진검을 들고 허우적 대는 모습이 연상되네요.
발마스님이 응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칼/말을 섞을 마음 자체가 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발마스님과 음...님이 진검으로 승부하는 무사들이었다면, 그리고 발마스님이 맞상대를 해주었다면,
음...님은 이미 형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겠지만요.

glamorlee 2017-05-3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쭤보려고 이렇게 댓글을 답니다.

제가 얼마전에 바흐찐의 <예술과 책임>, 뿔에서 출판된 책을 읽었는데요,
두 번째 챕터인 <행위철학>에서 ‘정동 의지적 태도‘라는 말이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정동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어요. 하지만 제가 식견이 짧아서 그런지,
제가 이해한 바흐찐의 ‘정동 의지적 태도‘와는 좀 다른 것 같았어요.

책 뒤편의 편집부로 전화를 해보니, 이미 없는 번호라.. 왜 ‘정동 의지적 태도‘로 번역을 한 건지..
바흐찐이 정말 한국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쓴 건지 궁금한데요 ㅠㅠ
(제가 생각하기엔 전혀 아닌 것 같아서요...)

혹시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balmas 2017-06-01 00:48   좋아요 0 | URL
오늘은 제가 여러 곳에서 질문을 많이 받네요.^^ 아무튼 질문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바흐친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질문에 답변드리려면 책을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도서관에 가기가 어려우니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양해해주세요.

다음 주 월요일쯤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glamorlee 2017-06-0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책을 직접 확인해보시고, 답을 달아주실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햇어요.

선생님께 수고를 끼쳐드린 것 같아 죄송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더 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ㅠㅠ

balmas 2017-06-05 14:51   좋아요 1 | URL
제가 바흐친 책을 찾아보니까 국역본 [예술과 책임] 2부에 해당하는 <행위철학> 77쪽 이하에서 ˝정동-의지적 어조˝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되고 있네요. 바흐친 글의 영역본인 M. M. Bakhtin, Toward a philosophy of the act,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3의 해당 페이지수는 pp. 33 이하인데, 여기에서 ˝정동-의지적 어조˝에 대응하는
영어 표현은 ˝an emotional-volitional tone˝입니다. 따라서 번역자는 영어의 emotion을 ˝정동˝이라고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바흐친의 이 글에서 이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분들은 영어의 affect를 <정동>으로 번역하는 만큼, 바흐친 번역자는 <정동>이라는 용어를 약간 다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glamorlee 2017-06-0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를 정도로요, 영역본 표현까지 함께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ㅠㅠ 바흐찐이 의미한, 정동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그 의미를 고찰해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

황봉구 2018-10-0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태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작년 공부모임에서 스피노자 강의를 들었던 황봉구입니다. 지금 모임에 나가지 않고 남해에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을의 민주주의는 아직 독파하지를 못했습니다. 워낙 현실정치와 사회학 등에서 아웃사이더로 살다보니 선생님의 세계로 선듯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 같습니다. 선생님이 스스로 지적한 대로 ‘추상적 보편주의‘에 빠져 있거나 그저 예술을 빙자한 탐미세계에만 몰두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평론가 한 분을 만났는데, 스피노자의 정동에 관해 자꾸 이야기하길래, 그게 무엇인가 찾아보다 선생님 블로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번역본으로 읽기는 했지만 원문의 하나의 개념어가 그렇게 우리 문학계에 영향을 주는지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정동이라는 단어는 무척 낯이 섭니다. 책을 그래도 많이 읽은 축에 속하는데도 그렇습니다. 현재의 시류가 생산한 새로운 개념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과거부터 사용되어온 것, 번역된 것, 외국철학자들이 또 재해석한 개념이라는 사실에 그만 할 말을 잃었습니다. 무식을 탓할 수 밖에요.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들뢰즈나 서양철학자들은 자기들의 전통에 입각하여, 자기들이 그 어감을 예리하게 파악할 정도의 자국어를 바탕으로, 과거의 단어나 개념어를 분석하거나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거나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려고 하니 너무 힘이 들고 갖가지 오해와 억측이 빚어집니다. 마치 새로운 개념어를 사용해야만 어떤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나아가서 현재의 우리 상황을 이러한 개념어들이 잘 분석해주리라 믿고 있는 거 같습니다. 하나의 개념에는 반드시 이를 뒷받침하는 거대한 체계가 먼저 자리잡고 있습니다. 단편적인 것만을 취해 우리의 것에 대입하려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굳이 정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스스로 하나의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고 별도의 새로운 개념어를 창출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철학은 개념어의 창출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뒤를 따라가야먄 하겠습니까. 우리의 근대화과정, 지난 백년간의 과정은 정말로 이러한 따라가기의 연속입니다. 따라가고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게 전부인 것처럼 스스로 제한되고 규정짓는 것은 벗어나야 합니다. 우주에서 새로움은 무한입니다. 열려 있습니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바라보기만 하면 엄청나게 새로운 것들이 스스로 활짝 걸어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언어로 기술하기만 하면 됩니다. 정동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 선생님에게 나는 한표를 던집니다.

balmas 2018-10-09 19:39   좋아요 0 | URL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블로그까지 찾아와주시고, 직접 댓글로 귀중한 말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말씀 하나하나 모두 깊이 동의합니다. 선생님 스스로 오랫동안 깊은 사유를 펼치고 끈기 있는 지적 노력을 수행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좋은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전출처 : balmas님의 "에티엔 발리바르에 관한 인터뷰"

예 제가 4월 8일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 주 뒤로 연기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의 시작 날짜는 4월 15일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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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 2016-03-2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러셨군요
4월 8일에 가서 허탕 칠뻔했네요 ㅋㅋㅋ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