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광고했던 것처럼, 서동욱 선생과 제가 편집한 [스피노자의 귀환]이 출간되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민음사에서 출판사 블로그에 출간 후기를 싣고 싶다고 원고를 부탁했습니다.
아래 글은 제가 쓴 출간 후기입니다.
민음사 블로그로 가시면, 서동욱 선생과 김은주 선생의 후기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1_doc/221014859520
아울러 민음사에서는 <민음사 배 철학책 백일장>을 개최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주소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
http://blog.naver.com/1_doc/221014016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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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읽기, 철학 공부하기
내가 처음 스피노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9년 학부 4학년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한편으로 죄르지 루카치, 허버트 마르쿠제 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내에 막 소개되던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의 프랑스 철학에도 흥미를 느꼈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철학의 흐름에 관심을 갖게 된 데 매개 역할을 한 것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였다.
당시 국내에 막 번역이 됐던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푸른산, 1989)를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루카치나 마르쿠제 같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또는 소련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다른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그것은, 내 생각에 서구 마르크스주의나 정통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의 현실과 그 변혁의 가능성을 잘 설명하는 매혹적인 사상이었다.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제자였으며, 이들이 스피노자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그 무렵 알게 되었다.
군대에 근무하면서 이들의 저작을 읽는 한편,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인 푸코와 데리다 사상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막 번역된 푸코의 성의 역사나 데리다의 입장들, 들뢰즈의 대담 같은 책을 읽으면서, 그때까지 내가 주로 공부하던 독일 관념론 철학이나 헤겔 마르크스주의 사상과는 매우 다르지만, 또한 깊이 있고 독창적인 이들의 저작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군대를 마치고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른 뒤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장에는 교수님 세 분이 나와 계셨는데, 나에게 “그래, 자네는 대학원에 진학하면 무엇을 공부할 생각인가?”라고 질문을 하셨다. 나는 그때 가장 관심 있게 읽고 있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푸코, 데리다 등과 같은 프랑스 철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당연히 이렇게 답변했다. “예, 구조주의 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세 분이 한 목소리로 “그딴 것은 해서 뭐하게!”라면서 버럭 면박을 주었다. 당시는 프랑스철학이 국내에 매우 생소했을뿐더러, 알튀세르가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인을 목 졸라 살해하고 동성애자였던 푸코가 AIDS로 사망한 일 등 때문에, 다른 프랑스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매우 안 좋은 선입견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런 반응이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원에 입학은 하게 되었지만, 면접장에서 겪었던 일은 내내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앞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공부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자칫 쓸데없는 것 했다고 욕을 먹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논문 주제를 스피노자 철학으로 바꾸게 되었다. 알튀세르나 발리바르만이 아니라 들뢰즈 같은 사상가에게도 스피노자 철학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스피노자를 공부하면 현대 프랑스 철학도 더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서관에 가서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선행 연구를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스피노자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이고 서양 철학사에서도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과 비견될 만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스피노자에 관한 국내의 선행 연구를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논문도 없었고 학위논문도 찾기 어려웠고, 외국 연구서도 별로 비치된 것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암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묘한 욕구가 생겨났다. 스피노자처럼 중요한 철학자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전무한 형편이니, 내가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몇 안 되는 전문가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었다.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저명한 스피노자 연구자였던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그리고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프랑스어 원서를 구해서 한줄 한줄 번역해가면서 읽었다.
에티카를 읽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불친절해도 이렇게 불친절한 책이 없다. 책의 집필 동기나 전체 내용을 저자가 직접 설명하는 「서론」 같은 것도 없이 다짜고짜 정의, 공리, 정리, 증명 등으로 이어지는 낯선 서술 방식은 가뜩이나 난해한 내용을 이해하기 더 어렵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논의가 어떤 철학자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고 자신의 비판은 또 어떤 적수를 겨냥한 것인지 각주나 참고문헌 등을 제시해준다면 훨씬 수월하겠지만, 에티카라는 책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슈레, 발리바르, 들뢰즈의 연구서를 참고서삼아 에티카를 읽어가면서 점차 스피노자 사상의 깊은 매력과 독창성을 깨닫게 되었고, 아울러 서양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의 흐름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서양 근현대 철학, 특히 유럽 대륙 철학이 주체를 중심으로 한 관념론 철학을 기저로 삼고 있었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주체보다는 실체로서의 자연이 바탕에 있고, 주체는 실체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헤겔에서 루카치에 이르는 관념론적 역사철학이 주체의 자유를 과장했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주체의 자유는 자연 전체를 이루는 존재자들 간의 관계의 소산이었다.
때때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주체를 부정했다는 (그릇된) 비판이 제기되듯이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발도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는 주체와 자유 개념에 대한 관념론적 선입견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주체와 자유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조건이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라 나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관계의 문제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이런 시각은 여전히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나의 기본적인 입장을 이루고 있다.
스피노자 철학을 공부한지 이제 25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국내의 스피노자 연구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에티카, 신학정치론, 정치론 등과 같은 스피노자 원전에 대한 번역이 다수 출간되고 있고,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같은 탁월한 스피노자 연구서도 번역ㆍ소개되었다. 또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스피노자 철학의 관점에서 저술한 제국, 다중, 공통체 3부작도 소개되어, 스피노자 철학을 현대화하는 작업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아울러 10여 명이 넘는 스피노자 철학 전문가가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하면서, 스피노자는 20년 전처럼 더 이상 우리에게 이름만 알려져 있는 낯선 철학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 부활하고 있다.
이번에 서동욱 교수와 함께 편집해서 펴낸 스피노자의 귀환은 300년 전에 살았던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가 우리의 삶에 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연구 성과라고 자평하고 싶다. 더욱이 국내 연구자들의 힘만으로 이 정도의 연구 성과를 올렸다는 것도 뿌듯하게 생각할 수 있는 점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피노자의 주요 원전에 대한 전문적인 번역과 해설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독자들이 에티카를 비롯한 스피노자 저작을 직접 읽고 싶어 하지만, 현재 나와 있는 번역본들은, 역자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 자신의 사상을 생생하게 들려주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부족이다. 앞으로 스피노자 철학이 우리나라 교양 대중의 공통 통념들(notiones communes)을 넘어 직관적인 지식(scientia intuitiva)이 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