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이 지난호(제407호, ‘교내학술지 그대로 등재지 게재…심사기준 모호’)에 이어, 인문·사범·사회과학 계열의 논문을 살펴본 결과, 또 다시 자기표절을 통해 연구업적을 부풀리는 사례가 포착됐다. 계간지에 게재됐던 글이 연구소 논문으로 당당히 실리는가 하면, 교내 학술지에 실렸던 여러 편의 논문이 합성된 채 한편의 외부 학술 논문으로 둔갑한 사례도 있었다. 또 동일한 내용과 결론의 ‘도플갱어’ 논문이 다른 학술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같은 글쓰기에 대한 학적·도덕적 몰이해는 정직하게 연구하는 학자들에게까지 여파를 미쳐 글쓰기 윤리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요한다. / 편집자주
포스트모던 담론 속에서 ‘몸의 정치학’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데카르트, 들뢰즈, 푸코의 육체’라는 ㅇ 교수의 논문을 접해봤을 것이다. 이는 서울 소재 ㅅ대의 ㅇ 교수가 1997년 6월 ‘사회비평’(제 17호)를 통해 발표했던 논문이다.
이 논문은 8년 후 ‘데카르트, 푸코, 들뢰즈의 육체’라는 제목의 ‘특집논문’(‘성평등연구’ 9집)으로 등장한다. 원논문을 기준으로 볼 때, 각 절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고, 몇 개의 구절이 변화된 후, 약간의 새로운 내용이 삽입돼 완성된 논문이다.
‘자기표절’ 의혹에 대해 ㅇ 교수는 “연구업적에 포함시키지도 않았으며, 가톨릭대성평등연구소에서 예전 것을 토대로 고쳐 발표해달라는 부탁에 개인적으로 발표만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이영자 가톨릭대성평등연구소장(정치사회학)은 “우리 연구소에서 관례상 학술제 발표문을 제작했던 것”이며 “학술지로 나오는 것을 ㅇ 교수는 몰랐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 이 소장은 “ㅇ 교수는 업적평가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어서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담론의 생산성을 위한 건전한 과학 공동체 정신에 입각해 곱씹어 볼 때, 이러한 상황은 담론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바람직하지 않다”고 전했다.
본인 논문 베끼고 출처도 안 밝혀
또 다른 서울 소재 ㅅ대의 ㅇ 교수는 연구년 기간에 작성한 ‘우리나라 교육과정학 연구 동향에 관한 역사적 비판’을 2001년 6월, 등재후보지인 ‘교육과정연구’에 투고했다.
하지만, 이 논문에는 3개월 전 ‘한국의 학술연구’(논문모음 단행본)에 실렸던 ‘교육과정 및 교육공학’의 내용 중 2장 ‘교육과정 연구의 네 가지 패러다임’이 버젓이 게재돼 있었다.
이 부분은 앞 논문의 3장 ‘교육과정학 연구의 주요 접근들’에 그대로 들어가 있는데, 이 내용은 또 다시 2003년 8월 발표된 ‘교육과정학 이론 수립의 현황과 발전전망’(‘사회교육과학연구’ 제7권)에 무단 복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중복적으로 발견되는 이 내용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용 표시도 없어 논문 작성자의 도덕 불감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기 표절을 통해 업적을 부풀린 ㅇ 교수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논문이라 아무 문제없다”고 호언했다.
이번에 살펴본 결과 많은 학자들이 기존 연구에서 한 챕터를 통째로 옮겨오거나, 논문화하지 않았지만 책에 이미 실었던 내용을 필요에 따라 두 개의 章을 뭉치는 방식으로 논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글쓰기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강원도 소재 ㅊ대의 ㅊ 교수는 ‘인문사회교육연구’(6권)에 실린 자신의 논문 ‘학교 통일교육의 평화교육적 접근’의 50% 이상을 ‘통일교육에서 평화교육적 접근의 타당성’(통일문제연구 제39호)에 중복 게재했다.
2장 1절 ‘평화의 개념’, 2절 ‘평화실현을 위한 전략’이 추가된 것과 몇 개의 바꿔쓰기(paraphrasing)를 제외하면 논리의 전개방식이나 결론에 있어서 동일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게다가 ㅊ 교수는 ‘학교 통일교육의 평화교육적 접근’ 102쪽에 담긴 내용을 113~114쪽과 122쪽(결론부)에 걸쳐 두 번이나 표절하고 있어, 논의의 생산성마저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립형’, ‘통합형’ 자기복제도 적발돼
이러한 지적에 ㅊ 교수는 “첫 번째 것은 선배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논문용으로 급하게 제출한 것이고, 두 번째는 앞의 논문을 수정·보완해 등재지에 게재한 것”이라며 “해당 학회지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문제시된다면 업적 목록에서 삭제하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례와 관련해 권오국 평화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주제와 내용이 서로 다른 다양한 논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실질적으로 자기표절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인문사회계열의 경우 학술지 간의 교차 확인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고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이어 그는 “텍스트들이 지속적으로 DB화되고 있어, 다양한 학술지를 교차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넓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더해 여러 편의 연구논문을 한 편으로 묶어내는 ‘조립형’, ‘통합형’ 자기표절 사례도 적발됐다.
2주만에 3만원짜리 심사?
경북 소재 ㅇ대의 ㄱ 교수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3년에 걸쳐 ‘홉스의 인간관과 정치체제관과의 인과관계’(사회과학논총, 2000), ‘로크의 인간관과 정치체제관과의 인과관계’(사회과학논총, 2001), ‘루소의 인간관과 정치체제관과의 인과관계’(사회과학논총, 2002)를 발표한 바 있으며, 이후 이 세 논문의 교차편집을 통해 또 다른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홉스, 로크, 루소의 인간관과 정치체제관과의 인과관계 비교연구’(사회과학연구, 2004)가 그것.
물론, ㄱ 교수 스스로 서론의 말미에서, 상기 세 편의 논문이 선행작업으로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으나, 마지막 ‘종합’ 논문에는 그 세 편이 거의 동일하게 발췌·복제돼 있어, ‘업적 부풀리기용’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이에 대해 ㄱ 교수는 “내 논문을 인용했기에 인용표시를 하지 않았고, 단지 시리즈물로서 기획한 것일 뿐”이라고 언급했으나, 예전의 논문들을 90%이상 있는 그대로 발췌·합성한 것이 과연 시리즈의 원래 개념에 부합하는 지 의문이다.
해당 학술지의 한 관계자는 “일부 인용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다는 것은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사태가 있어도 별도의 제재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자기논문 복제 생산이 끊이지 않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논문 심사제도와 논문수로 학자의 자질을 평가하는 정량적 업적평가제 탓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희재 안동대 교수(무역학)는 “논문 한 편을 심사하는데 2주의 시간이 주어지고 심사비도 3만원밖에 안되는 학술지가 더러 있다”고 말하는데, 상황이 이러하다면 심사위원들의 책임감 결여가 야기돼 엄밀한 심사가 어렵게 될 것이다. 심사과정 자체에 한계가 노정돼 있어 비양심적 논문 투고자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진수 서경대 교수(유럽어학부)는 “이러한 정량평가가 학문별 특성과 차이를 무시하고 있으며, 등재지에 논문을 게재하지 못하면 게으른 교수로 낙인찍히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이어 김 교수는 “좋은 논문, 좋은 번역은 수년치 업적으로 인정해주는 식의 파격적 평가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최장순 기자 che@kyosu.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