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향_프랑스, 새 플라톤전집 22년만에 완간
풍부한 해설에 저렴한 가격...한국 '정암학당'도 준비

2006년 03월 26일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이메일 보내기

올 2월 ‘법률’편이 상·하권으로 나뉘어 역간됨으로써, 프랑스는 또 하나의 플라톤 전집을 갖게 됐다. 이는 1984년 플라마리옹 출판사가 모니크 칸토-스페르베르, 뤽 브리송과 새 플라톤 전집 출판 계약을 맺은 지 22년, 1987년 ‘고르기아스’, ‘서간집’이 첫 선을 보인 뒤 19년 만의 일이다.


플라마리옹판 이전에는 주로 벨르 레트르 출판사의 플라톤전집이나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판이 사용됐다. 전자가 희랍 텍스트 대역본으로서 전문가들에게 읽혔다면, 후자는 매끄러운 번역으로 대중에게 읽혔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고대철학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이전의 두 판본을 현대적 언어감각에 맞게 고쳐 옮기고, 새로 누적된 연구성과들에 기초해 풍부한 주석을 덧붙인 새로운 전집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됐다. 플라마리옹판은 풍부한 설명을 담아냄으로써 전문가들의 연구도구로 사용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원화로 환산하면 1만원 남짓의 저렴한 가격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가령, 뤽 브리송이 번역한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1997)은 출판된 그 해에만 3만 5천부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


지난 해 11월, ‘마가진 리테레르’, 플라톤 특집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뤽 브리송이 잘 지적했듯이 플라마리옹판의 번역원칙 및 체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평균 70여쪽에 이르는) 알찬 서문. 둘째, (충분한 독해에 기초한) 짧고 명료한 번역. 셋째, (수백개의) 풍부한 주석. 가령, 희랍어 텍스트가 훼손됐거나 전승과정에서 판본들이 서로 차이날 때 발생하는 독해상의 어려움, 플라톤의 대화편이 참조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의 논증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중요 구절들이나 특정 주제들에 따라 분류한 풍부한 참고 문헌들, 고유명 및 테마별로 정리한 찾아보기를 제공함으로써, 새 플라톤전집은“일반 대중과 전문가의 대립을 넘어선다??는 최초의 목표를 충실히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고전 번역의 대중적 성공은 저렴한 가격에만 있는 게 아니라, 매끄러운 번역 및 친절한 설명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전의 벨르 레트르판에서 희랍어 텍스트를 제외한 채, 번역문만을 담아 출판한 대중용 포켓판들이나, 포켓북 고전총서를 통해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또 다른 플라톤 번역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플라마리옹판이 전문가나 대중들 사이에서 더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새 플라톤 전집이 20년에 걸쳐 차례로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고대철학분과 내의 자체 합동세미나 및 개별 연구의 축적, 연구팀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비 지원, 국립인문학센터(CNL)의 출판지원이라는 삼박자가 맞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바뀌어도 끊이지 않는 장기 지원은 가장 어려운 일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컨대, 뤽 브리송이 책임자로 있는 고대철학분과에서는 이런 전폭적인 정부의 지원 하에 전 세계에서 출간되는 고대철학연구서들을 모으고, 분류해 매년 ‘문헌학연감’을 간행할 뿐 아니라, 5년에 한 번씩 중요한 플라톤 연구들을 분석 정리한 참고문헌집을 출판하기도 한다. 이에 못지않게, 고대문헌에 대한 번역, 특히 그것이 비단 고전어에 대한 지식 뿐 아니라, 역사, 철학적 배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경우, 개인작업보다는 공동작업이 선호할만하며, 한국의 정암학당에서 계획 중인 플라톤 전집 공동 번역은 위의 프랑스적인 협동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한 권의 번역서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그 텍스트에 대한 연구서들이 비슷한 시기에 함께 나와줘야 한다. 이번에 출간된 ‘법률’편의 경우, 2005~2006년 아그레가시옹 구술 시험 텍스트로 선정된 것과 맞물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여러 권의 연구서들이 선을 보였다. 시험준비를 위한 단편적인 연구서들을 제외하더라도, 1990년에 역간된 바 있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플라톤의 ‘법률'편에서 논증과 행위’가 포켓판으로 재출간됐고, 앙드레 락스의 ‘성찰과 강제, 플라톤의 '법률'편 독해를 위하여’와 레티티아 무즈의 ‘법률가와 시인, 플라톤의 '법률'편 해석’ 등을 꼽아볼 수 있다. 10년이 지나긴 했지만, 파리 10대학 철학과 학술지인 ‘철학적 시간’ 창간호(1995), ‘가능한 도시 국가에 대하여, 플라톤의 <법률>편에 대하여’에 수록된 논문들도 참고할 만하다.


번역작업에 대한 학술적 인정과 정부지원은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된 바 있다. 이에 덧붙여 플라마리옹판 플라톤전집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잘 안 팔리는 철학책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다는 것이 일종의 도박임에도 불구하고, 출판사가 기꺼이 그것을 감행했고,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플라마리옹 출판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누스 새 번역 사업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바 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이러한 사례를 잘 벤치마킹해 전문가/대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양창렬 / 프랑스 통신원 · 파리 1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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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06-03-2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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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3-2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거의 다해 주네. ^-^
22년에 걸쳐 전집을 완성했다 ...
프랑스처럼 연구층이 두터운 나라에서도 전집을 출간하는 데 20년이 넘게 걸린다.

릴케 현상 2006-03-28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 잘 수 있겠네요^^ 몸 건강하세요~

승주나무 2006-03-28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법률이나 후기 저작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구경하기 힘들죠. 박현종 선생의 작업이 하나씩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정암학당에서 전집 작업계획을 세우고 있나요?
아무리 오래된 학문이라고 뭐라 그래도 플라톤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거~쬬^^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balmas 2006-03-29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박종현 선생 ... ^^;;
예, 정암학당에서는 오래전부터 플라톤 저작들을 강독하면서 번역해왔는데,
올해부터 이제이북스에서 몇 권씩 번역서를 내기로 했답니다. 기대해볼 만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