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한겨레신문 기획연재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24회 안토니오 네그리 편입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748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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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아인 2015-02-02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이 쓰신 유럽의 지방화에 대한 서평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덤으로 안토니오 네그리에 대해 한마디)



˝反植民的 感謝의 精神으로만 그것의 地方化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근대성을 유럽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탈유럽적인 것으로도 볼 것인가? 그런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유럽을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선물처럼 ˝수용˝할 것인가 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차크라바르티가 말했듯이 ˝불가결하면서도 부적합하다˝ 는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보편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지요.


발마스 님이나 안토니오 네그리는 보편성이라는 ˝와인˝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차크라바르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발마스 님의 그러한 생각이나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마스 님의 서평을 읽어 보니 제가 보기에는 엉뚱하게 차크라바르티를 소개하고 있더군요.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은 ˝반식민적˝ 감사의 정신으로만 근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초점은 반식민적인 것인데 발마스 님이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읽는 방식은 저로서는 납득하기 힘들군요.

발마스 님의 방식대로 읽으면 그것은 오히려 <유럽을 중심화하기>가 아닐까요?


차아인 2015-02-0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크라바르티의 (˝反植民的 感謝의 精神으로만 그것의 地方化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말은 조롱하고 비꼬는 反語法인 것이지요.

아무래도 그 말이 反語法이 아니라고 이해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아인 2015-02-0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차크라바르티에 의하면 역사주의는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통일체이자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관념입니다.

그는 그 역사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재(말을 하고 있는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지금˝)를 <환원불가능하게 하나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개념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를 무시하거나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 다중 개념은 홉스봄이나 톰슨이 말하는 단일하고 통일적인 계급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장소˝를 간과하는 ˝역사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개념 자체가 역사주의에 사로 잡혀 있으므로

그것은 유럽중심주의에 갇혀 있는 또는 유럽중심주의적인 개념인 것입니다.